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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여행자 정연 Jun 25. 2024

조직문화 연구자가 읽어본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

‘죽음이 예정된 삶은 무의미할까?’ 이 책 3장의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이 조직문화를 연구하는 내겐 ‘퇴사가 예정된 회사생활은 무의미할까?’로 읽혔다. “회사생활, 뭐 별거 있어? 너무 열심히 하지 마. 어차피 얼마간 일하다가 그만둘 건데. 받는 만큼만 해."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런 이야기의 연장선에 있는 질문처럼 보였다.


새뮤얼 셰플러의 용어를 쓰자면, 우리 자신이 죽은 후에도 계속되는 삶(나 이외의 다른 인간의 삶)이 존재한다는 의미의 후생(afterlife)을 믿을 때, 죽음이 예정된 삶이라도 삶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우리의 삶이 세상을 지속시킬 ‘집단적 후생(collective afterlife)’에 대한 암묵적 믿음에서 많은 의미를 얻는다는 셰플러의 말을 저자 딘 리클스가 인용했는데, 이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미안한 얼굴이 떠올랐다.


얼마 전 소설가 장강명 작가의 글쓰기 강연에 참가했다가 말미에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작가님은 내세를 믿지 않는다고 최근 출간한 책에 쓰셨는데요. 오늘 강연을 들으면서 작가님의 동시대 노동과 시스템 문제를 다룬 작가로 기억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둘은 서로 상충하는 것 아닌가요?” 공격하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자칫 도발적으로 비췰 수도 있었던 질문에 작가는 성실하게 답을 했다. 논지가 잘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그 답에 진정으로 수긍하진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를 읽다가 장강명 작가의 욕망과 믿음이 서로 상충하지 않는다는 점을 새롭게 발견했다. 이 지면을 빌어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조직의 한 구성원으로서, 내가 일하는 동안만 일 잘 처리하고 월급 받으면 됐지, 뭐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어?’라는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오늘 하고 있는 일과 그 결과물이 내일의 나와 동료들의 일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 이 조직을 떠난 뒤에 이곳에서 일하게 될 이들의 일과 삶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조직에서의 후생(afterlife)'를 떠올려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일의 무게를 느끼게 되고 의미 추구 활동이 이어지리라 본다. 그 깨우침을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가 내게 선사했다.


뿐만 아니라, 4장에 등장하는 ‘현재 자아는 곧 과거 자아의 미래 자아다.’라는 문장은 미래의 모든 시간을 현재와 똑같이 대해야 할 당위를 전해주기도 했다. 허준이 교수가 서울대 졸업식 축사 말미에 이야기했던 문장과도 연결되어 보인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우리 각자가 일하고 있는 일터에서 현재를 살며 일하고 있지만 이는 미래의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며, 내 뒤에 올 이들의 일터에서의 삶과 일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짧은 인생을 살면서 일터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추구하고 오늘 하루를 오롯이 살아낼 힘을 얻게 된다.


덧.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에도 언급된 알베르 카뮈의 <행복한 죽음>과 함께 페어링 해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성실하게 읽고 쓴 글입니다 :)

#인문학 #철학 #세네카 #을유문화사 #인생의짧음에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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