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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Oct 17. 2021

나를 뺀 이야기

아름다운 보통의 날들





유명해지는 것이 생의 목적이 아닌 사람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아도 나의 이름과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무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녀는 시 「무명인」*에서도 밝혔다. “나는 무명인입니다. 얼마나 끔찍할까요, 유명인이 된다는 건!” (103쪽)

* 에밀리 디킨슨의 시


한정원 『시와 산책』, 시간의 흐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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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뺀 이야기’




아끼는 책, <시와 산책>에서 작가는 “수도자가 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하나의 마음을 평생 가져가는” 할머니 수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서른과 마흔의 나는 궁금하지 않은데, 일흔 즈음의 내 모습은 보고 싶”었다고도 썼다. 서른이나 마흔의 내가 궁금하지 않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 일흔의 내가 궁금한 마음은 또 무엇일까. 어리숙했던 시절의 나에게 서른은 매우 기다려지는 나이였다. 살아가는 일의 방향과 목적이 뚜렷해져서 내 삶을 장악하고 무언가를 이루어가고 있으리라 여겼다. 삶이 무언가를 실현해가는 일이라고 그땐 믿었다. 일흔의 내 모습은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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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글엔 자애나 자만 대신 자아를 부풀리는 마음에 대한 경계심이 있다. 한때 내게 당연해 보였던 성취에 대한 꿈도, 지나간 일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나 원망도 없었다. 살아가는 일에 대한 조급함이나 조바심 같은 것도 없다. 지나갔거나 사라지고 없는 마음이라기보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서른보다 일흔의 내가 더 궁금한 마음은 그렇게 읽혔다. 그녀의 문장은 어딘가에서 할머니 수도자의 삶을 살다가 우리 곁에 온 사람의 것처럼 초연했다. 이 책이 작가의 첫 번째 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놀라웠다. 만약 나였다면, 내가 만약에 책을 썼더라면, 그 책은 ‘나’를 관통했던 사건들로 가득 채워졌을 것이었다. 아니, 나는 그렇게 많은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지도 않으니, 온통 자잘한 ‘나’로 가득했으리라. 작가 프로필에 그녀는 “사람과 장소를 여의는 것이 이력이 됐다”고 썼다. “나를 뺀 글”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문장을 버렸을까. 얼마나 많이 ‘나’를 내려놓았을까. 이 책이 나를 잡아끄는 이유는 여기 있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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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질까 봐





일을 그만두고 육아와 살림에 자발적으로 몰두하면서 한편으로는 나를 잃게 될까 봐 불안했다. 누군가의 엄마나 아내가 아닌, 진짜 ‘나’라고 부를 수 있는 내 존재의 핵심은 사라지고 말 것만 같아 두려웠다. 무엇이 나를 실현할 방법이 되어줄까 찾아 헤맸다. 시간과 에너지, 재능... 모든 여건이 나를 펼치고 싶은 욕망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글을 쓰면 쉽게 자기 연민에 빠졌고, 누군가의 아름다운 글을 보면 쉽게 좌절했다. 잘 쓰고 싶어서 쓰지 않았다. 내 글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쓰기를 멈췄다. 나를 증명하고 싶은 욕심이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게 만들곤 했다. 그러니 얼마나 부질없는 마음인가. 처음부터 나는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유명해지기 위해서 글을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쓰는 행위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어두운 항아리가 내 안에 들어차 있었다. 나는 자주, 내가 가진 것들을 저울에 올려놓았다.





171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되는 나 자신을 상상할 수 있다.


182
이상적인 존재의 상태는 아무런 행동도 할 필요가 없이, 오직 분수인 척하는 것이다. 그러면 제자리로 낙하하기 위하여 공중을 향해 솟아오르기만 하면 된다. 햇살의 헛된 반짝거림, 고요한 한밤의 소음이 되는 것이다.


232
삶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받은 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고양이의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자는 행복하다. 태양이 비치면 빛을 좇고 햇빛이 없으면 어딘가에 있는 온기를 찾아간다. 상상력을 위해서 개성을 포기한 자, 낯선 삶을 지켜보면서 기쁨을 느끼는 자는 행복하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배수아 옮김, 봄날의 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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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까워지는 일




<불안의 서>를 떠올렸다. 그때 처음으로 자아를 축소시키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자아가 지나치게 팽창된 시대를 살고 있다. 페소아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를 바랐고, 그러기 위해 물질을 포함한 대부분의 욕망까지도 버렸다. 사랑이나 명성도 바라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를 무에 가까이 축소시켰다. 대신 페소아는 자신의 꿈과 상상과 글 속에서 자기 자신인 동시에 다른 모두가 될 수 있었다. 평생을 고독 속에 살며 자기 안의 세계를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혼자인 시간에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를 갖는다. 고독하면 고독할수록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된다. 세상에 더 크게 자아를 펼치고 욕망을 실현시키는 일은 어쩌면 진정한 자아실현과는 거리가 먼 일인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두 번째 갈래의 길을 어슴푸레하게나마 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방향에서 만날 수 있는 삶의 한 가지 모습을 <시와 산책>에서 만난 거였다.




이들 책들은, 세상에 나를 증명하고 싶었던 욕구를, 그래서 나를 자꾸만 부풀리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눈에 띄지 않는 삶’, ‘무명인으로 사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했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는 일은 우리가 믿는 만큼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글을 쓰는 것은 어디론가 나아가는 일이었다. 내가 쓸 수 있는 나의 이야기를 내가 쓴다는 건 ‘나에게’ 중요했다. 그것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를 실현해 가는 일이란 단순히 나 자신에게 더 가까워지는 삶, 그래서 가장 나다운 삶을 사는 일인지도 모른다. ​​






이 모든 말이 지난 나를 부정하는 말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쓴다. 어쩌면 내가 했던 모든 방황을 이제는 기쁘게 끌어안을 수 있게 된 거니까. 그 모두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었으니까. 나를 잘 알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그치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것, 그게 나답게 사는 방법일 것이다. 한 사람의 존재의 의미는 그 끝에서 찾아지는 거라 믿으며.






“처음에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지만”






처음에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지만 자기 자신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러다 우리가 마침내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될 때면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메리 루플 <나의 사유 재산>, 박현주 옮김, 카라칼 (2021)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게  때면, 다시 세계로 시선을 돌려야  때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어쩌면 누군가에겐 평생이 걸리는 작업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삶에서 이룰  있는 것이 뻔한 나이가 되어서도 나에게 몰두하는 것은 소모적인 일이었다. 이젠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던  시선을 거두어도 좋겠다.  시선을 세계에 둔다면, 내가   있는 일들은 여전히 많고 많을 것이다. 내가   있는 일들 결코 사소하지 않을 것이다. 남은 내 삶은 그렇게, 나를 뺀 이야기로 채워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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