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이 Apr 04. 2021

국경을 넘던 밤, 그녀가 두고 온 것

『문맹-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한겨레출판




우리는 아이들을 포함해 열 명 남짓의 사람들로 구성된 무리다. 나의 어린 딸은 아이 아빠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고 나는 두 개의 가방을 들고 있다. 둘 중 한 가방에는 젖병과 기저귀, 아이에게 갈아입힐 옷이 있고 다른 가방에는 사전들이 들어 있다.
[…]
“당신들은 이제 오스트리아에 있어요. 이제 곧장 앞으로 계속 걸어가기만 해요. 마을이 멀지 않아요.”
나는 요세프의 뺨에 입을 맞춘다. 우리 모두는 그에게 가지고 있는 돈을 준다. 어쨌든 이 돈은 오스트리아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다.  
우리는 숲을 걷는다. 오랫동안. 너무 오랫동안. 나뭇가지들이 우리의 얼굴을 할퀴고, 우리는 구멍에 빠지고, 낙엽이 우리 신발을 적시고, 우리는 뿌리에 걸려 발목을 접질린다. 휴대용 램프를 켜봤자 그것은 조그만 동그라미만큼만 밝힐 뿐, 나무들, 여전히 계속되는 나무들. 그렇지만 우리는 벌써 숲에서 빠져나왔어야 한다. 우리는 계속 같은 곳을 맴도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한 아이가 말한다.
“무서워. 집에 가고 싶어. 침대에 눕고 싶어.”
[…]
“우리는 길을 잃었어.”
한 청년이 말한다.
“여기서 멈춰봐요. 이렇게 계속 가면 우리는 다시 헝가리로 되돌아갈지도 몰라요. 이미 되돌아온 게 아니라면요. 움직이지 마세요. 제가 한 번 볼게요.”
[…]
『문맹-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한겨레출판)

​​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자전적 이야기, 『문맹』의 <기억> 편에는 그녀가 갓난아기를 데리고 국경을 넘던 밤이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그날 밤 일이 “마치 꿈속에서 혹은 다른 생에서 일어난 일”처럼 잘 떠오르지 않는다고 썼다. “마치 내 기억이 내 삶의 커다란 부분을 잃어버린 그 순간을 떠올리기를 거부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작문 노트뿐 아니라 처음 썼던 시들을 두고 왔고, 오빠와 남동생과 부모님께 인사조차 못하고 떠나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가는 그날, "하나의 민족 집단에 속해 있던 나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라고 적었다. 그녀가 두고 온 것은 시와 가족들, 그보다 훨씬 더 넓고 뿌리 깊은 무엇이었다. '제자리에 있지 않은’ 삶에 대해서 간결하게 이야기하는 이 책은 조국을 떠남으로써 정체성을 잃어버린 한 사람이 다시 새롭게 낯선 언어를 배우고 작가가 되며 정체성을 되찾아 가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1935년 헝가리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속에서 유년을 보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오빠와 가까웠고, 타고난 이야기꾼이었으며, 상상력이 풍부했다. 이 책에 소개된 짤막한 몇 개의 일화들을 통해서 추측해 본 사실이다. 그녀에게 유년의 행복은 짧지만 매우 강렬했던 것 같다. 머지않아 조국이 차례로 독일과 소련의 침략을 받는 모습을 목격해야 했고, 극한의 가난 속에서 가족들과 헤어져 살아야 하는 아픔을 경험했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던 그녀는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남편이 반체제 활동에 연루되면서 4개월 된 딸을 데리고 국경을 넘는다.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 땅에 정착하게 된다. 그녀는 시계공으로 일하면서 처음엔 모국어로 시를 썼다. 훗날 프랑스어를 배운 뒤로는 희곡과 소설을 썼다.



​​

“내가 프랑스어로 말한 지는 30년도 더 되었고, 글을 쓴 지는 20년도 더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 언어를 알지 못한다. 나는 프랑스어로 말할 때 실수를 하고, 사전들의 도움을 빈번히 받아야만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프랑스어 또한 적의 언어라고 부른다. 내가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이 가장 심각한 이유다. 이 언어가 나의 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 『문맹』_<모국어와 적어>,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한겨레출판)




​​대부분의 한국인은 모국어가 한국어이며, 한국 국적과 한민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나 충돌이 없다. 그러나 이민자들, 망명자들, 혹은 입양아들에게 있어, 민족적 정체성이란 매우 복잡한 문제이며 때론 극복해야  대상이 된다. 아고타는 헝가리 태생으로 모국어는 헝가리어이지만 스위스에 거주하며 프랑스어로 글을 써야 했다.   때부터 글을 읽을  알았던 그녀는 스위스로 망명한  다시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문맹 경험한다. 헝가리를 떠날  챙겼던  개의 가방. 그중 하나에는 아이를 위한 물건이, 다른 하나에는 사전들이 들어 있었다고 했다. 사전은 현실의 필요인 동시에 상징적인 의미였다. 그녀가 붙들  있고 기댈  있는 무엇이었다. 인간에게 언어란 무엇일까.  모국어란 무엇일까. 언어란 우리의 내면을 표현하는 수단  이상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만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고 규명할  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없다면 우리는 과거를 넘어설  없고 앞으로 나아갈  없다. 언어는 그렇게 자기 인식의 근간인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 이러한 모든 언어 경험이 모국어 안에 축적되어 있다. 모국어로 말하고   없다는 사실은  모든 기억과 경험의 상실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의 뿌리를 옮기는 일은 다시 어린 아기로 퇴행하는 일이거나 알맹이 없는 납작한 존재로 꺼져버리는 일과도 같다.



​​

국경을 넘던 밤에 대한 작가의 기억이 말해주듯, 모국어의 상실과 더불어 헝가리인이라는 국적과 민족성(문화)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총체적인 정체성의 상실이었다. 인간에게 있어 고독은 양가적이다. 혼자인 시간, 고독한 시간이 우리를 사색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인간답게 만들어 주지만, 근원적으로 혼자이기에, 우리는 늘 존재의 불안을 떠안고 산다. 고독이 깊어지면 고립이 된다. 우리가 원하는 고독이란 사회와 느슨하게 연결된 상태 속에서의 고요다. 사회로부터 유리된 채 홀로 살아가길 바라는 사람은 결코 흔치 않다. 우리가 어딘가에 속하고 고정되기를 바라는 것도, 정체성을 잃고 싶지 않은 것도 ‘혼자’가 고통이 되지 않기 위함이다. 낯선 언어를 새롭게 배우고 끈질기게 글을 쓰면서 그녀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스위스에 거주하며 프랑스어를 쓰는 헝가리 태생의 작가라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정체성 또한 지니고 살아야 했다. 그것은 분명 고독을 견디는 일이었을 것이며, 불행과의 힘겨루기였으리라.





​함께 국경을 넘은 사람들 모두가, 일부라도, 정체성을 되찾는 일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고국엔 망명자들이 돌아갈 자리가 없었다. 투옥되고 중형을 받을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들 가운데 일부는 헝가리로 돌아갔다. 그중 두 사람은 더 먼 나라로 떠났다. 그리고 네 사람은 인간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갔다. '제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새로운 나라에 결코 쉽게 동화되지 못했다. 공장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했지만, 그녀 안의 복잡하고 다중적인 마음까지 그들과 세세히 나눌 수는 없었다. 그러한 거리감과 이질감이 새로운 삶에 밀착할 수 없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구분 짓기를 좋아하고, 동질적인 것에서 편안함을 찾는다. 이방인에게는 온정적이거나 냉담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 보통의 사람이다. 그 양 극단의 시선은 이방인을 타자화한다는 사실에서 동일하다. 새로운 문화와 낯선 언어의 땅에 자연스럽게 섞이고 흡수되는 일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고, 시간만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열광이 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사적인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

우리는 이곳에 오면서 무엇인가를 기대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몰랐지만 틀림없이 이런 것, 활기 없는 작업의 나날들, 조용한 저녁들, 변화도 없고 놀랄 일도 없고 희망도 없는 부동의 삶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 『문맹』_<사막>,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한겨레출판)


 


불안은 존재의 조건이며, 인생은 혼자를 견디는 일이다. 그렇기에 더욱, 우리를 붙들어줄 무언가가 절실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 속에 충분히 소속되지 못하고 내 삶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감각은 우리를 ‘지금, 여기’에 발붙이기 힘들게 만든다. 삶에서 겉돌고 있다는 기분이 무엇인지는 약간의 외국생활만으로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떠나온 사람들은 그들의 본래 자리를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그곳에는 자신과 연결된, 자신에게 속했던 사람들이 있다. 익숙한 음식과 장소와 추억.... 그 모든 것들이 있다.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덜 흔들리고 덜 불안해하며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곳에 두고 온 내 삶은 너무나 강력한 또 하나의 가능성이라서 잊어버리고 무시해버리기가 쉽지 않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속 루카스라는 인물은 여러 면에서 작가 본인을 반영한다. 국경을 넘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 이국의 언어로 글을 쓰는 작가가 된다는 점부터, 쌍둥이 형제를 사무치게 그리워함으로써 어쩌면 자신의 삶이었을 수도 있을 미지의 삶을 강렬히 상상하고 꿈꿔왔다는 점까지.



“내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 어렵고, 더 가난했겠지만, 내 생각에는 또 덜 외롭고, 덜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어쩌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서건 어떤 언어로든지 나는 글을 썼으리라는 사실이다.”

- 『문맹』_<제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들>,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한겨레출판)


 


그녀는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프랑스어에 익숙해졌지만, 그 언어가 자신의 모국어를 죽인다는 점에서 적의 언어라고 칭했다. 작가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사이, 깊은 상실감이 내게로 번져온다. 그 가운데 글쓰기가 그녀를 지탱해주었으리라는 것만이 의심의 여지없는 위안이다.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쓰는 것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때조차. 그것이 영원토록 그 누구의 흥미도 끌지 못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 때조차. 원고가 서랍 안에 쌓이고, 우리가 다른 것들을 쓰다 그 쌓인 원고들을 잊어버리게 될 때조차.

[…]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 『문맹』_<우리는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한겨레출판)


 








작가의 이전글 삶에의 열망과 죽음에의 충동은 같은 뿌리에서 자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