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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Apr 04. 2021

삶에의 열망과 죽음에의 충동은 같은 뿌리에서 자란다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이태동 옮김 (시공사, 2012)




“서로가 서로 안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빅토리아 거리를 가로질러 건너며 인간이 너무도 어리석은 바보처럼 느껴졌다. 무엇 때문에 인생을 그렇게 사랑하고, 어떻게 그런 관점으로 인생을 보고, 여전히 꿈을 꾸는 걸까. 인생을 쌓아 올렸다가 허물어뜨리면서도 매 순간 왜 또다시 지으려는 걸까. 이유는 오직 하늘만이 알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누추한 여인들, (자신들의 몰락을 마시며) 문 앞 계단에 주저앉아 있는 가장 비참하고 절망적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인생을 사랑한다.” (p.9)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 날이다. 대저택의 안주인인 댈러웨이 부인은 얼마 전 병을 앓았다. 심장이 좋지 않은 그녀에게 의사는 낮잠을 권고했다. 그녀의 남편 리처드도 파티가 심장을 자극할 것을 염려했다. 남편의 말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모두를 넘어설 만큼 파티는 그녀에게 중요한 의미였다. 이른 아침,  꽃을 직접 고르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 그녀는 전혀 아파 보이지 않는다. 생기가 넘치다 못해 상쾌한 아침 공기 속에 녹아들 것만 같다. 그녀로 인해 거리가 밝아지는 느낌을 준다. “젊었을 땐 어느 방에 들어가면 그 방이 자신으로 온통 가득 차는 듯했다.(p.46)” 이제 그녀는 쉰 살이 넘었지만, 여전히 우아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존재감을 뿜어낸다. 그녀는 거리를 걸으며 그녀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거기 있다고 느낀다. “인생이, 런던이, 6월의 이 순간이.”(p.10)


 


길을 걸는 동안 그녀는 자주 상념에 빠진다. 그녀가 마주치는 풍경이, 사람들이, 날씨가 그녀를 과거 어떤 기억 속으로 데려간다. 거리의 소음과 새로 나타나는 풍경이 막 뻗어나가던 생각을 흩뜨리고 다른 기억을 불러온다. 그녀의 머릿속 생각은 거리와 뒤섞이고, 길의 모양만큼이나 다채롭고 다양한 갈래의 길로 뻗어나간다.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불리는 이 묘사 방법은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의 방식과 매우 흡사해서 흥미롭다. 소설은 인물이 생각하는 것을 일목요연하게 독자에게 정리해서 보여주지 않고 사고가 일어나는 정돈되지 않고 혼란스러운 과정 속에서의 생각을 보여준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독자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인물을 보다 생동감 있게 그려내는 탁월함으로 작용한다.


 


소설은 파티가 열리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인 동시에,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의 이야기다. 소설의 화자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속을 자유롭게 드나든다. 클라리사가 되어 클라리사의 생각을 전하다가 피터 월시가 되어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이다. 인물들 각자가 가지고 있던 기억의 편린이 모여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고, 과거 사건과 기억 속에서 그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독자는 이로써 피터 월시가 클라리사를 열렬히 사랑했던 일, 클라리사와 샐리 시턴이 사랑에 가까운 우정을 나눈 일, 클라리사가 마음이 통하는 피터 월시를 버리고 리처드와 결혼한 사실 등을 알게 된다. 그들에게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일이 아님을, 그들은 떨어져 지낸 시간만큼이나 서로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왔음을 깨닫게 된다. “서로가 서로 안에 살고 있었다.”(p.16) 클라리사에게 중요했던 과거 속 인물들 모두가 그녀의 파티에 초대받아 한 장소에 모이게 된다. 과거를 현재에 불러 모으는 그녀의 파티는 마치 죽었던 자들이 살아 돌아오는 축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삶이기에, 그 때문에 파티를 여는 거야!”




버지니아 울프는 “이 소설을 집필하는 동안, 클라리사가 독자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고 한다.(p.318, 해설, <댈러웨이 부인>: 죽은 자의 부활로서의 반복) 소설 속에서 그녀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동시에 ‘속물’처럼 그려진다. 화려한 파티를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자기를 과시하기 좋아하고 유명 인사들을 곁에 두기 좋아한다는 눈총을 받는다. 그녀의 남편은 파티를 어린애 장난처럼 여긴다. 클라리사를 바라보는 여러 인물들의 시선 속에서 호화로운 생활과 허영심, 냉소적인 태도, 현실감 없는 모습 등은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녀는 상류사회에 속한 인물로 이러한 시대적 비판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클라리사는 그렇게 단순한 인물로만 그려지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클라리사의 내면으로 좀 더 파고들어가 그녀가 겪고 있는 실존의 문제를 드러낸다. 그녀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클라리사에게 파티란 어떤 의미일까. 그녀가 개최하는 파티의 성대함과 화려함을 걷어내고 보면, 파티는 단조로운 일상을 흔들어 삶에 잔잔한 파동을 그리는 일이다. 바닥으로 꺼지는 듯한 나날들에 활기를 불어넣는 일이다. 어둠에 잠겨있던 삶을 빛 속으로 솟아오르게 하는 일이다. 집에서 여는 조촐한 파티의 설렘과 기쁨을 알고 있다. 평소에는 잘 차리지 않을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준비하고 거기에 어울릴 와인을 고른다. 내가 가진 가장 예쁜 식기와 아름다운 리넨으로 테이블을 세팅한다. 클라리사의 파티는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울 것인가. 클라리사 자신과 많은 이들의 수고가 필요한 일이다. 그런 수고로움을 자처하는 까닭은 파티에서 일상과는 다른 흐름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시시콜콜한 수다가 이어지다가 깊이 있는 대화가 오갈 수도 있다. 우리의 내면에 잠자던 의식을 깨워 수면 위로 건져 올리는 순간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런 날들에 우리는 살아있다고 느낀다. 비로소 자기 안에 있던 자신을 느낀다. 클라리사에게 파티는 그런 의미였다. 파티를 열고, 그녀가 아는 모든 이들을 초대한다는 건  ‘베풂’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가 삶에 바치는 찬가였다. (인맥을 넓히고 자신의 사회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파티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지만) 그녀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일 기회를 마련함으로써 삶의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사람들 각자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평소에는 하지 않을 이야기를 하게 해주고 싶었다. 모두의 삶을 고양시키고 삶을 솟아오르게 하고 싶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파티를 여는 일뿐이었고, 이것이 삶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는 그녀만의 방식이었다.




“그는 클라리사의 파티에 가고 싶었다. […] 아니 뭐, 그저 잡담을 나눠도 좋겠지.

사실 잡담이야말로 우리 영혼의 솔직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자아는 깊은 바닷속 물고기처럼 거대한 수초 사이를 누비며 지나다가, 햇살이 어른거리는 공간을 넘어 계속 나아가 차갑고 깊고 앞을 볼 수조차 없는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표면 위로 솟구쳐 올라 바람을 일으키며 물결 위에서 장난을 치기도 한다. 즉, 영혼도 가끔씩은 잡담을 하며 자신을 솔질하여 활기를 되찾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p.233-234)




 



“그 이름은 ‘전향’이다”



 

"윌리엄 경은 30년간의 경험을 통해, 이건 미친 생각이고 저건 정상적인 생각임을 본능적으로 판단하는 능력, 즉 균형 감각을 판단하는 능력을 길렀다.

그러나 이 균형에게는 거의 웃지 않는, 무서운 얼굴의 자매 여신이 있었다. […] 그녀의 이름은 ‘전향’이다. 그녀는 약한 자들의 의지를 먹어치우고,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강요하기를 좋아하며, 그들의 얼굴 위에 찍힌 자신의 특성을 보고 기뻐한다. 그녀는 하이드 공원 모퉁이에서 나무통 위에 올라가 설교한다. […]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하지만 사실 권력을 원한다. 자신의 길에 방해가 되는 반대나 불만은 없애버리고, 자신의 눈에서 발하는 빛을 우러르며 유순하게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축복을 내린다. […] 사랑이나 의무, 자기희생 같은 그럴듯한 명분 아래 정체를 숨긴 채." (p.145-146)


 


소설이 클라리사를 통해 ‘전향’을 논하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전향’을 강권하는 사회는 “사랑이나 의무, 자기희생 같은 그럴듯한 명분 아래 정체를 숨긴 채” 우리의 진짜 의지를 억누르고, 우리 자신의 만족을 억제하고, 짓누르고, 뒷걸음질 치고, 눈치 보게 하는 악이었다. 그녀가 “애쓰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속을 드나들 수 있었”(p.92) 던 피터가 아니라 리처드와 결혼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자유와 독립’이 중요했다. 피터는 모든 것을 공유하기를 원하는 타입의 사람이었고, 그녀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리처드는 그녀에게 고독할 시간을 허용했고, 두 사람 사이의 심연을 억지로 좁히려 하지 않았다. 클라리사는 결혼 자체를 뿌리칠 수 없고 남편의 허용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고전적인 여성이지만, ‘고독이라는 존엄’을, 자신의 독립성과 자존심을 지켜내는 일의 중요성을 간파한 사람이었다. 클라리사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그늘, 남편이라는 허용하는 존재, 가정생활의 자질구레함은 쉽게 우리의 정신을 흩어지게 만들고 나로 존재할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도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아는 존재했다. 그 본연의 자아를 지키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수적인 삶의 조건이다. 클라리사가 다락방에 누워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음은 독자에게 안도감을 준다. 그녀가 숭고하게 여기는 것은 창문 너머 건넛집에 사는 노부인의 삶이다. 자신의 자리에 고요히 존재하는 노부인의 삶에는 무언가 엄숙함이 있었다. 그런 삶은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다.


 



 


“자살한 그 남자는 자신의 보물을 끝까지 껴안고 뛰어들었겠지”


 


클라리사를 한 축으로 하는 이야기의 저편에 또 다른 축을 이루는 셉티머스라는 인물이 있다. 겨우 소년이었을 때 집을 떠나 런던으로 온 그는 “허영과 야심과 이상주의와 정열과 고독과 용기와 게으름 같은 흔해빠진 씨앗들로 꽃을 피”(p.123)웠다. 그는 부동산 중개인인 브루어 씨의 후원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 브루어 씨가 주입한 강건함과 남자다움에의 신념으로 자신의 본성에 맞지 않는 군대에 지원한다. 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훈장까지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정작 자기를 상실하게 된다. 그가 발견한 것은 동료들이 죽어가는 전쟁의 현장에서 포탄이 자신을 비껴간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망가진 자신이었다. 사랑하는 동료의 죽음에도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죽은 동료, 에반스의 목소리를 듣고 죽은 자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 아니었을까. 조국이라는 가치 하에 숭고하게 포장되는 전쟁은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참혹하고 공포스러운 비극일 뿐이었다. 전쟁의 경험으로 그는 모든 것에 무감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름다운 이탈리아 여인 루크레치아와 결혼을 했어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두려웠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힌다. ‘인간 본성’이 그에게 ‘죽음을 선고’했다고 믿는다. 홈스 의사가 그의 삶을 결박하기 위해 다가오자, 그는  창밖으로 몸을 던져 스스로의 생을 마감한다.



 

울프는 모던 라이브러리판의 서문에서, 클라리사와 셉티머스는 “소통, 완전성, 현실의 합일을 찾는다”는 점에서 “쌍둥이”라고 말했다. 파티는 공허하게 끝나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불길하게도, 클라리사는 자신의 파티에서 한 청년(셉티머스)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셉티머스의 소통을 위한 시도는 두 의사로 상징되는 사회적 힘에 의해 제압당하고 좌절당했다. 소통의 길이 막혀버렸다고 느낄 때, 자신 자신을 지켜낼 유일한 방법은 삶을 스스로 끝내는 일이었다. 셉티머스에게 자살은 저항이었고, 이로써 그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놓여났다. 그녀는 고요히 방으로 들어가 그 젊은 남자의 자살을 생각했다. 그의 아픔이 자신의 것인 양 몸으로 체험되었다. 인생을 참을 수 없는 것이라고 느끼면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녀는 그 공포와 무력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청년이 자신인 것 같다고 느끼고, 셉티머스의 자살이 어딘가 만족스럽게 느껴진다. 그가 ‘자신의 보물을 끝까지’ 지켜냈다고 여겨져서다.


 





“우리는 계속 살아가겠지. 계속 늙어가겠지.”




“우리는 계속 살아가겠지(그녀는 다시 손님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방들은 여전히 붐볐고, 새로운 손님도 계속 오고 있었다), 우리는(그녀는 하루 종일 부어턴을, 피터를, 샐리를 생각했었다) 계속 늙어가겠지. 그녀에게도 지켜내고 싶은 중심의 무언가가 있었지만, 그것은 쓸데없이 복잡한 일상 속에서, 잡담에 파묻히고 거짓말에 더럽혀지기도 하며 녹아 없어졌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그 중심을 지켜냈다. 죽음은 그것을 지켜내려는 저항이었다. 죽음은 그 중심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소통의 시도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신비하고도 자꾸만 손에서 빠져나가는 삶의 중심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기며, 점점 더 그 중심에서 멀어져 가, 거기에 접근하면서 느꼈던 황홀감도 잊어버린다. 그렇게 황폐해져 가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p.269)




클라리사는 셉티머스의 자살에서 오직 죽음으로써만 지켜낼 수 있는 삶의 존엄이 있음을 이해했다. 그런 이후에도 그녀는 자신의 파티로 돌아온다. 아직 자신을 기다리는 손님들에게로, 삶에게로 돌아선다. “어쨌든 인생은 재미있고 신비롭고 한없이 풍요로(p.236-237)”운 것이다. 삶이 아직 견딜만한 것이라면, 죽음의 순간이 오기까지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한다. 살아가는 동안엔 삶을 드높이며 살아야 한다. 셉티머스와 쌍둥이인 그녀는 같은 것을 추구하며 반대의 길을 걷는다. 삶을 솟아오르게 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중심을 지켜내기 위해 분투한다. 그런 이의 삶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주변 이들에게도 생의 황홀을 선사할 것이다.


 


“나도 가야겠어요.” 피터가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잠깐 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 두려움은 뭐지. 이 황홀감은 또 무얼까?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나를 이상한 흥분으로 가득 채우는 이것은 무엇일까?

클라리사야.

클라리사가 거기 있기 때문이었다.”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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