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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Apr 04. 2021

나와 당신 '사이'에, 사이를 이으려는 '시도’ 속에

아름다운 보통의 날들






예전에도 지금도 여행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행이 신선한 자극이기는 하지만 오래 지속되는 즐거움은 아니라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즐거운 습관과 작고 소소한 기쁨들로 일상을 채우고 가꿀 줄 아는 이에게 여행은 그저 강도 높고 일시적인 이벤트에 불과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요한 기쁨들로 채워진 그녀의 평온한 일상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여행은 개인마다 또 시기마다 다른 이유와 의미를 지닐 것이다. 더구나 여행이 어려워진 지금에는 여행의 의미가 또 새로울 터인데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찾아오지 않는다. 여행이 번잡하게 느껴져서 달가워하지 않는 편이 되었다. 나에겐 이제 맘 편히 걸을 수 있는 풍경이면 족하다. 여행을 매우 좋아하고 여행을 많이 다녔던 시기를 내가 이미 지나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행기에서 내려 차를 빌리는 여행도 잦은 편이었고, 주말마다 남편과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홀홀 짐을 꾸리고 지도를 챙기는 일이 가장 즐거웠다. 쳇바퀴 굴리듯 일상에 끌려갈 때면 '지금, 여기'를 벗어나 다른 어딘가로 떠나는 것만이 삶의 기쁨으로 여겨졌다. 그때 내가 여행에서 기대했던 것은 일상과는 단절된 느낌이자 전혀 다른 새로움이었다. 아주 특별한 풍경, 독특한 경험만이 그 기대를 채워줄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한계에 다다랐다. 지속 가능한 기쁨과는 거리가 먼 것임은 그때도 이미 알았다.



지나치게 많은 자극은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즐거움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근본적인 만족감을 표면적인 쾌감으로, 지혜를 얄팍한 재치로, 아름다움을 생경한 놀라움으로 바꾸어버린다. (...) 어느 정도 권태를 견딜 수 있는 힘은 행복한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훌륭한 책들은 모두 지루한 부분이 있고, 위대한 삶에도 재미없는 시기가 있다.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사회평론, 이순희 옮김 (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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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즐거움과 자극을 구분할 줄 몰랐고 지루함을 견디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자극이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일은 현실로 다가왔다. 여행을 다니면 다닐수록 우리 마음을 채워줄 새로운 것은 없었다. 감탄하는 것이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던데, 이러다 감탄하는 능력마저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무리 멀리 떠나도 여행은 이전보다 지루했다. 나는 지나치게 ‘자극’에 길들여져서 어떤 여행으로도 권태를 이길 수 없는 상태를 맞게 된 것이다. 계속되는 자극의 반대편엔 그렇게 헤어나기 힘든 권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삶의 어떤 과정이 단조로운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그럴 때마다 자극적인 해결책을 찾는다면 심심함이나 지루함을 견딜 수 없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러셀은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을 어려서부터 기르는 일이 중요하고,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수동적이고 자극적인 오락거리를 너무 자주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잦은 여행 등으로 강한 인상을 많이 심어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비슷한 일상이 아이들에게는 중요하고, 대지와의 일상적인 접촉이 더 필요하다고 썼다.




아이들은 지루하고 심심할 때 어린이 특유의 창조성을 발휘한다. 저희들끼리 놀도록 가만히 두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활용해 세상에 둘도 없는 기상천외한 놀이를 만들어 낸다. 어른들이라면 너무 시시해서 ‘그게 놀이야?’라고 할 일들에 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재미를 한껏 누린다. 스스로가 찾아내고 기획한 놀이가 주는 기쁨과 충만함은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리모컨만 누르면 볼 수 있는 TV나 이동시간의 지루함과 육체적 피곤함을 동반하는 여행의 즐거움과는 비교조차 불가하다.




진정한 행복은 순간적인 욕구 충족에 있지 않고, 강렬한 이벤트에 있는 것도 아님을 알겠다. 행복은 오히려 끌려 오고 끌려가는 마음속에 있다. 러셀의 말처럼, 행복은 "인간과 사물에 따뜻한 관심을 기울이는 일"에서 비롯된다. 중요한 것은 그때의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이다. 마음이 관심이라는 날개를 달고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갈 때, 어떤 방향으로 가고자 몸을 선회하는 그 움직임 속에 행복이 있다. 누군가와 진실되게 따스한 애정을 주고받을 때, 그 사람과 나 사이로 스며드는 감정이 행복이다. 이 세상에 기적이, 마법이, 행복이라는 것이 정녕 있다면, 그것은 내 안에 홀로 떨어져 있거나 당신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나와 당신 '사이'에 있다. 사이를 이으려는 우리의 모든 '시도' 속에. 시도하는 바로 그 ‘움직임’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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