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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끝에서

박은빈 노래 '눈을 감고 열을 센다면'을 단편 소설로 창작

by 통나무집

소나기가 쏟아지려는지 짙은 먹구름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온 세상을 하얗게 탈색하려는 듯 작열하던 땡볕이 잠시 구름에 가려졌지만 푹푹 찌는 무더위는 여전했다. 공기에 가득 찬 습기가 열기로 자글자글 끓어오르며 두터운 부피를 가진 사물인 마냥 대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8월의 마지막 날, 에어컨의 시원한 냉기가 감도는 카페로, pc방으로, 하다 못해 편의점에라도 가서 영원히 틀어박히고 싶을 만큼 폭염이 절정으로 치닫는 오후에, 지우는 온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코와 입으로 훅훅 밀려드는 열기로 머릿속이 하얘졌고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으며 땀은 폭우처럼 쏟아졌다. 지우가 향한 곳은 도서관 뒤편 언덕 위에 있는 작은 공원이었다. 그 공원은 가파른 계단을 숨이 헐떡이도록 올라가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데, 애써 올라온 노력이 무색하게도, 조그만 벤치 세 개, 철봉 한 세트, 작은 정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보잘것없는 규모여서 평소에도 인적이 드문, 적막한 장소였다.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지우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평소에는 단숨에 오를 계단을 세 번이나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겨우 공원에 도달할 수 있었다.

높은 언덕 위에 있기에 공원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좋았다. 정자에 오르니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지우가 다니는 학교, 하굣길에 자주 들렀던 편의점, 코인 노래방, 홈마트가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지우는 바닥에 앉아 멍하니 읍내를 바라보았다. 매미 소리가 한층 더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주위가 어둑해지더니 후드득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굵어지면서 주위를 무겁게 욱여싸던 열기가 한층 가벼워졌다. 더운 바람의 끝자락에 선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지우는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숫자를 세며 지우는 간절히 기다렸다. 열까지 세었을 때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지우는 기척이 선명해질 때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이윽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늘도 왔구나.


지우는 서서히 눈을 떴다. 한 소녀가 정자의 난간에 앉아 지우를 보며 고요히 웃고 있었다. 조그만 얼굴 속에서 말갛게 빛나는 눈망울을 보자 지우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소녀의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새벽녘 이슬처럼 아릿하게 빛나고 있었다.


-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수연 누나...."


지우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보고 싶었어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선뜻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누나에게 하고 싶은 말들, 묻고 싶은 질문들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들끓었지만 어느 하나 입 밖으로 내어놓을 수 없었다. 지우는 망연히 누나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수연이 난간에서 내려와 지우에게 다가왔다. 얼굴이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수연은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듯 아득한 시선으로 지우를 응시했다. 수연이 말했다.


- 내가 무섭지 않니? 나는....


수연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한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수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다 굳게 결심하는 듯 질끈 다물렸다.


- 나는 3년 전에... 죽었어...


지우는 느꼈다. 지척에 있는 누나의 얼굴에서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음을. 살아있는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생기가 수연에게는 결여되어 있음을. 그럼에도 지우는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수연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수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뒷걸음질하며 지우에게서 멀어졌다.


"상관없어요."


수연은 걸음을 멈추었다. 놀라서 동그랗게 뜬 수연의 눈에 비친 지우의 얼굴에는 공포나 혐오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차오르는 슬픔으로 차갑게 내려앉은, 해석하기 어렵고 풀어내기는 더더욱 버거운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는, 그 모든 감정들을 애써 감춰보지만 기어이 드러내고 마는, 열세 살 소년의 여린 얼굴이었다.


"누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저도 죽었을 거예요."




지우가 수연을 처음 만난 날은 한여름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6월의 첫날이었다. 그때 지우는 표정이 어둡고 말이 없는 아이였다. 유년기부터 지우에게는 말을 걸어주거나 들어주는 어른이 없었다. 가게 일로 분주했던 부모는 지우가 잠이 든 늦은 밤에 집에 들어왔고 지우가 일어나기 전에 가게로 나갔다. 지우를 돌봐주는 할머니는 귀가 먹어서 손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지우는 생후 24개월이 되기까지 '엄마', '아빠'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조금씩 말이 트이기 시작했지만 또래에 비해 말이 느리고 어눌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감염병 유행으로 가게의 매출이 급감하면서 지우의 부모는 자주 크게 다투었고 집안에는 살얼음 같은 냉기가 흘렀다. 지우는 점점 더 말이 없어졌다. 이런 지우와 어울리려 하는 친구들이 없었고 선생님도 지우가 별다른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등교하면 지우는 있는 듯 없는 듯 투명인간처럼 지냈고 학교가 끝나면 냉기로 가득한 집 들어가기 싫어 pc방이나 오락실을 찾아갔으며, 용돈이 끊긴 뒤부터는 도서관을 찾아가 끝나는 시간까지 물렀다. 도서관이 문을 닫으면 도서관 뒤에 있는 공원에 올라가 해가 저물고 읍내에 불이 하나 둘 켜지는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환하게 빛이 켜진 아파트며 단독주택, pc방, 오락실, 편의점, 식당들을 바라보며 지우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해 보지만 딱히 갈만한 곳이 없었다. 한때 PC방에서 밤을 새우며 게임을 해보기도 하고 코인 노래방에서 미친 듯이 노래를 불러보기도 했지만 거대한 구덩이가 파인 듯 공허해진 마음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냥 죽어버릴까?'

어버리면 부모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서로에게 악다구니를 쓰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고, 학교에서 들 즐겁게 어울리는데 나 홀로 외딴 책상에 앉아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 아무도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외로움을 온종일 견디지 않아도 된다. 무력하고 무의미하고 지루하고 권태롭고 쓸쓸하고 수치스러움을 더는 느끼지 않아도 된다... 한 번 죽음에 대해 생각하자 죽어야 할 이유들이 줄을 지어 지우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여기서 뭐 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지우는 화들짝 놀랐다.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 소녀가 보였다. 고운 수선화처럼 하얀 얼굴에 수정처럼 맑은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이며 웃었다. 소녀의 웃음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워 지우는 눈길을 피하며 소녀에게 물었다.

"누구.... 세요?"

"나는 수연이야. 이수연"

수연의 목소리는 여리면서도 선명했다. 적막한 항아리에 들어온 구슬이 또르르 또르르 소리를 내 듯이 수연의 목소리는 지우의 텅 빈 마음 여기저기를 구르며 명랑하게 울렸다.

"너, 어제도 여기 앉아 있었지? 운동하다가 봤어."

지우는 철봉만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공원을 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런.. 곳에서.... 운동을 한다고요?"

지우의 표정을 보며 수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공원까지 오는 계단이 가팔라서 올라가기만 해도 운동이 돼.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면 종종 오곤 했어. 요새 살이 좀 쪄서 다이어트를 해야 하거든."

"아.... 네..."

날씬한 수연의 몸을 보며 왜 다이어트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수연의 해맑은 목소리를 듣다 보니 지우는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너는 이름이 뭐야?"

"김.. 지우... 요."

수연은 붙임성 있는 웃음을 지었다.

"너도 해원중학교 다니지? 1학년 교실로 들어가는 거 봤어. 선도부 활동을 하다가."

"..... 네."

선도부는 3학년 학생만 들어갈 수 있다. 같은 학교 선배였구나.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얼굴을 기억하는 선배가 있다니... 그것도 이렇게 예쁜 누나가 자신을 알아봐 준다는 사실이 지우는 신기했다. 수연은 손목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는 이만 가야겠어."

"네.. 안녕히.. 가세요."

지우는 엉거주춤 일어나며 수연에게 인사했다.

"아무튼 반가워. 다시 보면 인사하자. 안녕."

수연은 힘차게 손을 흔들더니 몸을 돌려서 계단을 내려갔다. 수연의 뒷모습을 보면서 지우는 가슴 한 구석에 스며드는 따스함을 느꼈다. 지우의 눈에 수연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어서 내일 아침이 되어 수연을 다시 보면 좋겠다고 지우는 생각 했다.




다음날 아침 지우는 학교 교문 앞에서 선도부 선배들과 함께 서 있는 수연을 보았다.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는 선배들 사이에서 수연은 진우를 보고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우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수연에게 아는 체를 하기가 왠지 부끄러워 꾸벅 절하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지우는 수연과 우연히 마주치고 싶어 틈만 나면 학교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지우가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종종 수연을 볼 수 있었다. 수연은 항상 여러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오전에 지우는 복도에서 수연이 싱그럽게 웃으며 친구들이 깔깔대며 재잘거리는 이야기를 듣는 모습을 보았고 점심시간에는 선도부 학생들과 함께 후배들이 급식 줄을 잘 서고 있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살펴보고 있는 수연을 발견했다. 자율 시간에는 농구를 하는 남학생들을 신나게 응원하는 수연을 먼발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연은 멀리서도 환하게 빛나는 사람이었다. 수연은 지우를 발견하면 항상 밝게 웃으며 먼저 인사를 했다. 처음에 지우는 모르는 사람 앞에서 수연에게 인사하는 게 어색해서 뻣뻣하게 고개만 숙였지만 자주 인사를 하다 보니 익숙해지면서 나중에는 '안녕하세요.'하고 크게 소리 내어 인사하게 되었다. 지우가 인사하기 시작하자, 수연뿐만 아니라 수연과 함께 있던 선배들도 지우에게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어오는 일이 많아졌다. 하교 후에 도서관에 가면 수연은 항상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지우는 수연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거나 숙제를 했고 도서관이 마치는 시간이 되면 수연과 함께 도서관 뒤에 있는 공원에 가서 하늘이 노을로 붉게 물들었다가 어둑하게 땅거미가 지고 달과 별이 반짝이기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 지우는 수연이 해주는 학생 자치회 활동 이야기, 친구들과의 추억,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해 듣기만 했지만, 점차 지우도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우 마음속 깊이 감추어 두었던 외로움, 부모에 대한 섭섭함, 앞날에 대한 고민들.. 이야기는 점점 길어졌지만 수연은 항상 진지한 표정으로 지우의 말을 들어주었다. 풀벌레 소리가 잔잔히 흐르고 밤하늘에 별빛이 반짝이며 저 아래에선 읍내의 따스한 불빛이 일렁이는, 한적한 공원에서 수연 누나와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나날이 계속되면서 지우의 표정은 밝아졌고 어눌했던 말투도 한층 자연스러워졌다.




학교에 괴담이 돌기 시작한 때는 지우가 수연을 만난 지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떠도는 괴담의 내용은 이러했다. 새벽에 일찍 등교한 3학년 학생이 교실에 들어섰을 때 칠판 아래 편에 작은 글씨로 적힌 문장을 발견했다.


-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참고 열을 센다면

다시 처음으로 되감겨 너는 웃고 있을까


그 학생은 '누군가 노래 가사를 칠판에 적었나 보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수업 종이 울릴 무렵 그 문장은 지워졌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같은 위치에 아래 문장들이 적혀있었다.


-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참고 열을 센다면

다시 처음으로 되감겨 너는 웃고 있을까

해가 조각난 듯 쏟아지던 눈부신 날들

눈 뜨면 또다시 펼쳐져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칠판에는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청소당번이 담임에게 불려 가 혼이 났다. 청소 당번은 청소 시간에 칠판을 깨끗이 닦았고, 하교할 때 칠판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고 담임에게 항변했다. 결국 담임이 직접 칠판을 깨끗이 지운 뒤 퇴근하였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니 똑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칠판을 지우는 시간을 아침으로 바꾸기도 하고 수시로 문장을 지우기도 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어김없이 똑같은 내용의 문장들이 같은 위치에 같은 글씨체로 칠판에 적혀 있었다. 학생들이 칠판에 적힌 문장 앞에 모여 간밤에 귀신이 적어놓았다며 와글와글 떠들었다. 칠판에 문장이 나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밤 12시가 되면 교실 스피커가 켜지고, 어떤 여학생이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참고 열을 센다면'하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아무도 없는 학교 안에 울려 퍼진다는 소문이 퍼졌다. 숙직을 서던 교사가 어두컴컴한 교실에서 희뿌연 여학생의 형체를 보고 놀라서 기절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괴담이 괴담을 낳고 괴담의 내용이 점점 흉흉해지던 어느 날, 종례가 끝난 뒤 지우가 교실 밖으로 나오는데 수연이 불렀다.

"너에게 보여 주고 싶은 곳이 있어."

지우는 가슴이 설렜다. 수연이 있는 곳이면 지우는 어디든 좋았다. 수연이 사람들 사이에서 환하게 빛나던 학교, 공부에 열중한 수연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던 도서관, 수연과 단 둘이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던 공원.... 이번에 누나와 함께 가는 공간에서 또 어떤 추억들을 쌓을 수 있을까. 지우의 마음이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수연이 지우를 데리고 간 곳은 학교 별관에 있는 밴드 동아리실이었다. 동아리실에 들어서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낡은 드럼과 일렉 기타, 베이스, 키보드들이 보였다. 수연은 우수에 젖은 눈으로 밴드실을 둘러보다가 의자에 앉아 통기타를 집어 들었다.

"누나. 기타도 칠 줄 아세요?"

"조금은. 잘 치지는 못해."

수연이 기타 현을 살짝 퉁기며 음을 조율했다.

"목요일이면 친구들과 함께 밴드 연습을 하곤 했어.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왜요?"

"3학년이잖아. 공부에 집중해야 해서."

나지막하게 말하는 수연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슬펐다.

"내가 지은 노래가 있어. 한 번 들어볼래?"

수연이 흐음, 흠 목을 가다듬었다.

창문에서 부드럽게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에 수연의 얼굴이 부드럽게 빛났다. 그 얼굴에 설핏 어린 표정이 왠지 애달파서 지우는 수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연이 노래를 시작했다.


너에게 들리길 내 가슴속 두근거림이

귀를 기울여줘 한 번뿐인 내 첫사랑을

붉은 노을처럼 번져가는 부끄러움도

이해해 너 역시 나처럼 처음일 테니


수연의 음색은 여리고 고요했다. 노래는 지우 마음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수연이 덤덤하게 부르는 노래에는 슬픔과 서러움이 수채화처럼 흐릿하게 칠해져 있었다. 지우는 마음이 아려왔다.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참고 열을 센다면

다시 처음으로 되감겨 너는 웃고 있을까

해가 조각난 듯 쏟아지던 눈부신 날들

눈 뜨면 또다시 펼쳐져


순간 지우는 머리가 멍해졌다. 친구들이 흥분해서 떠들던 괴담이 떠올랐다. 매일 3학년 교실 칠판에 적혀있었다던 문장들. 그 문장들이 수연이 부르는 노래에 담겨 흐르고 있었다. 누나가 매일 칠판에 그 문장들을 적었던 걸까? 도대체 왜? 의문이 계속 일어났지만 지우는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수연이 부르는 노래가 아름답고 애달파서 먹먹하고 슬픈 감정이 가득 밀려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여름이 다가온 거리는

우울하게 촉촉하니까

널 우산으로 당분간 써야겠어

서툴러 엇갈린 발을 맞추는

너의 그 노력이 귀여워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

너도 느껴지니


수연의 노래가 끝났다. 서글프고 그립고 기이하고 아름다웠던 노래. 지우는 황홀함과 슬픔, 의혹이 복잡하게 엉킨 표정으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수연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어땠어?"

"..... 너무 좋았어요."

수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계속 보고 싶어 지우는 수연이 왜 그런 노래 가사를 불렀는지 묻지 못했다. 수연이 말했다.

"다른 노래도 만들었어. 저기 책상 위에 내 공책이 있는데 가져다 줄래?"

지우는 동아리 방 한 구석에 있는 책상으로 갔다. 책상 위에는 악보와 공책들이 널려 있었다. 악보를 들쳐보니 '이수연'이라고 적힌 보라색 공책이 있었다. 지우는 공책을 들고 수연을 돌아보았다.

"이 공책이 맞나요?"

"응. 맞아."

지우는 공책을 들고 수연에게 건네주었다. 수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집에 가야 해서 노래는 더 못 부르겠다. 그 공책은 선물이야. 집에서 살펴보고 내가 만든 노래 가사가 어떤지 나중에 이야기해 줘."




그날 밤 지우는 수연이 준 공책을 펼쳐 보았다. 공책에는 수연이 쓴 노래 가사들과 함께 수연의 일기도 적혀 있었다. 매일 수연은 일상 속에서 했던 생각과 감정들을 공책에 낱낱이 적었고 그 내용을 모아서 노래 가사를 작사했다. 지우는 수연의 일기를 읽어보면서 점점 의아해졌다. 공책에 기록된 수연의 모습은 지우가 알고 있던 수연과 많이 달랐다. 일기 속에서 수연은 자주 외로웠고 친구들에게 잘 다가가지 못해 괴로워했으며, 우울에 젖은 날도 많았고 앞날에 대한 불안함도 자주 토로했다. 날이 갈수록 수연의 일기는 점점 어두워졌고 간혹 자살을 암시하는 내용들도 보였다. 지우는 평소에 활기차고 항상 친구들과 어울리며 당차게 지내던 수연의 모습을 떠올리며 당혹감을 느꼈다. 그러다 한 페이지의 내용이 지우의 눈에 확 들어왔다.


6월 1일 금요일

내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겠지. 나 같은 거 죽어도 아무도 슬퍼해주지 않을 거야. 그래도 죽는다면 이 모든 외로움과 슬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영혼이 되어 이 세상을 떠돌게 될까. 아니면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까.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과는 다르게 살고 싶다. 친구들과 깔깔 웃으며 행복하게 지내고 모두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 남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고 싶어. 선도부 활동도 해보고 싶다. 어디서든 환하게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런 사람이라면 외롭고 우울해서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을 도울 수도 있겠지.


지우는 수연의 공책을 덮었다. 마음 어딘가에서 의혹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미심쩍고 불안한 마음을 애써 무시하며 지우는 생각 했다. 수연 누나는 이 글을 쓰고 나서 달라지기 시작했나 보다. 외롭고 우울한 게 죽고 싶을 만큼 싫어서, 죽을 만큼 애쓰고 노력해서 지금처럼 밝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했던 걸 거야. 래서 나같이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후배를 잘 챙겨주었겠지. 렇게 생각해 보지만 찜찜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 지우는 교문에서 환히 웃으며 인사하는 수연을 보고 안도했다. 그리고 누나에게 밝게 인사하며 교문 안으로 들어가는데...

뭔가 이상했다. 불안한 예감이 울컥 치밀었다. 지우는 애써 그 기분을 무시하며 교실로 들어갔다.

쉬는 시간에 우연히 수연을 보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친구들과 함께 밝게 웃고 있었다. 점심때 수연은 선도부 활동으로 급식 지도를 하는 선배들 사이에서 서 있었다. 항상 그랬듯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수연과 마주칠 때마다 지우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이 점점 고조됨을 느꼈다.

뭘까. 뭐가 이상한 걸까.

하교 때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웃으며 교문을 나서는 수연을 바라보다가 지우는 불현듯 깨달았다.

아무도 수연에게 직접 말을 걸고 있지 않았다.

친구들과 밝게 웃으며 함께 걷고 있지만 수연에게 직접 말하는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수연과 친구들 사이에서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수연이 선도부 선배들 사이에 서 있을 때도, 복도에서 신나게 재잘대는 누나들 사이에 있을 때도 수연에게 곧바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친구들이 웃고 떠들 때 수연은 옆에서 환히 웃고 있거나 친구에게 무어라 말을 하기도 했지만 정작 수연을 바라보며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우는 다시 수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수연 주변에서 걸어가는 학생들은 단단히 지면을 내딛으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수연의 발은 허공을 밟는 듯 흐릿하게 땅 위를 스치고 있었다. 지우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져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지우는 점차 강하게 욱 받치는 생각들을 떨쳐내려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혼란스러운 생각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휘둘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지우는 아무도 없는 교문 앞에 홀로 서 있었다.

순간 지우는 도서관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숨을 헐떡이며 수연이 항상 공부하던 자리를 둘러보았지만 수연은 보이지 않았다. 수연을 찾아 도서관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지만 그 어디에서도 수연을 찾을 수 없었다. 지우는 도서관에서 뛰쳐나와 수연과 자주 갔던 공원으로 달려갔다. 가파른 계단을 한달음에 올라간 지우는 공원을 맴돌며 수연을 애타게 찾았지만 그곳에서도 수연은 없었다. 지우는 수연과 단둘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벤치에 홀로 앉아 해가 뉘엿뉘엿 지고 땅거미가 어둡게 내려앉을 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수연이 사라진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지우는 수연의 자취를 찾아 헤매었다. 아침에 등교하면 수연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던 모습이 눈에 선하였다. 쉬는 시간에 돌아다니면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밝게 웃던 수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점심시간이 되면 급식실 앞에서 선도부 학생들과 함께 서 있던 수연의 진지한 표정이 생각났다. 지우는 가슴이 미어졌다. 학교가 끝나면 도서관으로 가서 수연이 공부하던 자리를 멍하게 쳐다보다가 도서관이 끝나는 시간이 되면 수연과 함께 올라갔던 공원에 가서 밤늦게까지 머무는 것이 매일의 일과가 되었다. 목요일이 되면 지우는 학교 별관에 있는 밴드 동아리실을 찾아갔다. 처음 찾아갔던 그때처럼 동아리실에는 악기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책상 위에 악보와 공책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수연이 노래하며 연주했던 통기타만 보이지 않았고 수연이 앉았던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의자 뒤에 열린 창문 사이로 햇살이 조각이 난 듯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다. 수연이 불렀던 노래가 잔향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그때 갑자기 노래 한 소절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참고 열을 센다면

다시 처음으로 되감겨 너는 웃고 있을까

해가 조각난 듯 쏟아지던 눈부신 날들

눈 뜨면 또다시 펼쳐져


지우는 벌떡 일어나서 쏟아지는 햇살 속으로 달려 나갔다. 수연을 처음 만났던 곳. 수연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장소. 수연에 대한 마음이 무르익었던 공간. 도서관 뒤편에 있는 공원을 향해 지우는 쉬지 않고 달음박질하였다.




후드득 내리던 빗방울이 더욱 굵어졌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소나기에 한여름 무더위가 가시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지우는 수연의 물기 어린 눈을 바라보았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지우는 마음 깊숙이 묻어 두었던 말을 꺼내었다.

"누나가 죽은 사람이래도 상관없어요. 저는 누나와 있을 때만 살아있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 지금처럼 항상 제 옆에 있어줘요."

수연의 눈이 조용히 웃음 짓자 눈에 맺힌 눈물이 고요히 흘러내렸다.

- 지우가 이제 말을 잘하는구나. 처음 만났을 때는 많이 어눌했는데..

"매일 누나가 제 말을 들어준 덕분이에요."

- 그렇구나......

수연은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결심을 한 듯 말을 이었다.

- 지우야. 누나는 이제 떠나야 해.

지우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가지 마요.. 제발."

수연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 지우야. 나는 3년 전에 죽었어. 교통사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가 없어 죽지 못했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죽어 보니까 살아 있을 때 하지 못했던 일들이 슬퍼서 견딜 수 없었어. 그래서 간절히 빌었단다. 단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내가 포기했던 삶을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그리고 나처럼 덧없이 죽음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딱 한 번만 도울 수 있게 해달라고..

지우는 망연히 수연의 이야기를 들었다.

- 그리고 너를 만난 거야. 너를 도우면서 나는 내가 살고 싶던 삶을 살아볼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지우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럼 계속 제 옆에서 도와줘요. 그러면 누나도 원하는 삶을 계속 살 수 있잖아요."

- 지우야.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 되었어. 나는 이제 정말 가야 해.

연의 목소리가 점차 옅어졌고 몸도 점점 희미해졌다. 조금씩 사라지는 수연을 보며 지우는 이별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다.

연은 여리지만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 너는 나처럼 삶을 포기하지 마. 그리고 예전의 나처럼 슬픔에 빠져 삶을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을 도와줘. 그러면 너를 도우며 내가 누렸던 행복을 너도 맛볼 수 있을 거야.

이제 수연은 형체만 흐릿하게 남았다.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수연은 말했다.

- 지우야.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

지우는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수연의 입을 바라보았다.

- 한 번만 밝게 웃어주겠니?

지우는 먹먹한 눈을 들어 수연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가득 고인 지우의 눈이 애써 웃음을 지으면서 구슬 같은 눈물이 뺨을 흘러내렸다. 울먹이며 떨리는 입술을 모아 지우는 애달프고 슬프게.... 웃었다.

지우의 미소를 본 수연이 환하게 웃었다.

-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 말과 함께 수연은 완전히 사라졌다.

지우는 수연이 사라진 자리를, 소나기가 그치고 하늘이 말끔히 갤 때까지 그 하늘에 붉은 노을이 번지고 어둠이 내린 뒤 달과 별이 반짝이기까지,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났다. 지우는 공원으로 향하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공원에 도착한 지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러 해가 지났지만 공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조악한 벤치와 초라한 철봉, 작은 정자로 이루어진 작은 규모의 공원. 그 공원을 바라보는 지우의 얼굴은 여리고 앳된 소년의 티를 벗어나 이제 건장한 청년의 모습이다. 지우는 벤치에 앉아 지난날을 회상했다. 우울했던 유년 시절. 절망 속에서 죽음을 생각했던 순간. 그때 나타난 수연 누나. 누나와 함께 보냈던 행복한 나날들. 누나가 떠나가던 날. 수연이 사라지면서 마지막으로 했던 부탁. 그 모든 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그리움과 행복이 물밀듯이 밀려와 지우의 얼굴에 가득 펼쳐졌다. 지우는 수연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이 좋았다. 누나와 단둘이 앉아 이야기하던 벤치도, 그 벤치에서 보이는 풍경들도, 그 공간에 가득한 수연과의 추억도. 그렇게 수연과의 기억을 만끽하고 있는 지우의 눈에 한 소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소년은 공원으로 향하는 계단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터벅터벅 걷는 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공원에 도착한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벤치에 주저앉았다. 축 처진 어깨에서 아이가 짊어진 고뇌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지우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여기서 뭐 해?"


아이가 고개를 돌려 지우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에 지우의 환한 웃음이 비쳤다. 그 웃음은 고요하고 평온했으며 말수는 적어 보였지만 굳건한 심지가 내비치는 얼굴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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