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매트리스 개발자
Lodon, United Kingdom. GMT + 0
2015년 런던으로 처음 삶의 터전을 옮겼을 때. 나는 새로운 세계로 녹아드는 재미에 빠져있었다. 도시 구석구석 자리잡은 공원들, 서점을 들리듯 가볍게 방문할 수 있는 갤러리의 작품들, KTX 보다 싼 파리행 비행기표, 신진 쉐프들이 운영하는 작지만 개성있는 식당들, 각자의 고유성을 가진 식기와 가구 브랜드들 그리고... 매트리스.
처음 살림을 마련하면서 런던에서 만난친구들에게 다양한 조언을 구했다. 결론은 '가구는 Ikea, 가전은 Argos, 잡화는 Amazon, 식재료는 Waitrose, 매트리스는.. Eve.
Eve 매트리스를 주문하는 기분이 좋았다. 잘 정리된 웹사이트에서의 간편한 구매 경험이 좋았고, 기존의 가구 회사 특유의 묵직함이 아닌 젊은 브랜드 느낌이 좋았다. 매트리스만 만든다고 하니 Ikea 보다는 잘만들 것 같은 막연한 기대도 있었고.
하지만 막상 제품을 받아서 사용했을 때는 아쉬움이 컷다. 처음 사용해보는 메모리폼 매트리스이니 분명 스프링보다는 좋은 것 같은데... 몸을 꽉 잡아주는 뻑뻑함이 없는 약간 헐거운 물컹거리는 느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밀도 메모리폼이 주는 헐거운 느낌을 그때도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민감한엉덩이
오래 쓰는 것 제대로 써보자느 생각에 미국에서 유명하다는 Casper도 써보고, Simba라는 브랜드의 매장도 방문했었다. 그나마 내몸에는 Eve가 제일 잘 맞았던 것 같았다. 그래 아쉽지만 현지인들의 조언이 옳았군.
딱 거기 까지 였다. 예측할 수 없는 인생. 그러고 몇년 뒤 나는 어쩌다 매트리스 개발자가 되었을까?
Paju, South Korea. GMT + 8
한국에 다시 돌아와 살림을 장만하면서 싸게 살수 있다는 말에 파주 가구단지를 쭉 돌아봤었다. 과학이라는 A도 만나보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S도 만나보고, 우주인이 만들었다는 T도 만나봤다. 다들 좋은 침대를 만들고 있지만 난 여전히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270만원인데 이번주에 사시면 240만원이에요. 현금으로 하시면 10만원 빼드리고 베개도 드려요."
>> '응?! 그럼 대체 이거 얼마인거에요?'
"이건 필로탑이고, 이건 호주산 양모가 들어있고, 이건 신년 모델이고, 이건 백화점 상품이 대리점에 풀린거고, 이건 31cm에요."
>> '어.. 저 그냥 허리 안아프고 푹자고 싶은건데 뭐 써야되요?'
"카페에서 일산점이 제일 싸다고 누가 올리셨는데, 사실 저희 파주점이 제일 싸요. 혹시 일산점에서 가격 알아보고 오신거면 저희가 맞춰드릴게요."
>> '그냥.. 저 일산점 어디인지도 몰라요. 그냥 사장님 주실 수 있는 제일 좋은 가격에 주세요."
우리가 바꿔볼 수는 없을까?
아쉬운 사용감이었지만 메모리폼 매트리스에는 분명히 wow가 있었다. 사용감에 투덜대던 나였지만 분명히 자다가 허리 통증으로 깨는 횟수가 줄었다. 나는 늘 옆으로 자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허리 통증이 덜해지니 언제부터인게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워자게 되었다. 한번 메모리폼 매트리스를 사용하면 다시 스프링으로 돌아갈 수 없겠구나.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고 있는데 언제까지 침대는 논현동 가구거리와 백화점에 갇혀있을까? 다방이 스타벅스가 되고 핑클이 트와이스로 변하는 동안 침대 시장은 과연 얼마나 바뀌었을까?
시작은 딱 그정도 였다. 무엇을 모르는지 몰라서 쉽게만 보였던 우리의 첫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