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인도 여행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쉬람 근처에 방을 얻었지만 아쉬람까지 걸어 다니기엔 애매한 거리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쉬람을 드나들면서 매번 릭샤를 타기에는 교통비가 만만치 않았다. 주변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스쿠터나 자전거를 이용했지만, 여행을 가기 전까지 자전거를 못 타던 내가, 더군다나 운동 신경이라고는 바닥인 내가 바로 자전거를 배워서 탄 다는 건 아무리 무모함으로 무장된 시절이었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보조 바퀴가 붙어있는 네발 자전거였다. 체구가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는 내게 네발 자전거는 딱이었다. 속도는 두 발 자전거에 비하면 어림도 없지만 그래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좋은 교통수단이었다. 물론 후일 네발 자전거는 보조바퀴를 떼고 두 발이 되어 나를 아쉬람 주변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게 해 주었지만..
인도에 처음 도착하고 삼 개월은 오로지 명상만 했다. 아는 사람을 만나도 눈인사 정도만 하고 개인적인 만남은 하지 않고 홀로 지냈다. 주거지도 아파트를 독채로 구해 혼자 지냈다. 이것이 나중에 나의 발목을 잡지만..
인도를 가는 데 동력이 되어 준 서울 압구정 센터 도반들에게 ' 수마나는 인도에 가서 명상만 한대 '라는 소문이 쫙 돌았을 정도다. 인도에 함께 갔던 몇몇 도반들과 생활에 관련된 정보가 필요할 때 정도만 왕래를 하고 소위 한국인 사교 모임(?)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이것도 삼 개월 후 어찌하다 주당 모임에 가입하면서 모두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여하튼 초반의 나는 거의 도인의 반열에 오르다시피 진지했다.
명상에 한참 고무되어 있던 시절이니 만큼 아쉬람에서 진행되는 명상 프로그램에는 모두 참석을 했다. 명상 프로그램은 해 뜨는 시간인 새벽 다섯 시부터 저녁 열 시까지 빡빡하게 진행된다. 물론 강제 사항은 아니지만 어떻게 간 인도인데 내겐 한 타임 한 타임이 절실했다.
새벽에 시작하는 명상 21일 코스가 진행됐다. 물론 매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지만 아쉬람 측에서 명상을 독려하는 의미에서 이벤트성으로 프로그램을 만들곤 했다. 21일간 빠지지 않고 참여하리라 다짐했다. 서울에 있을 때에도 센터에서 21일간 새벽 명상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면 직장을 다니면서도 새벽 네시에 일어나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명상을 하고 회사로 출근했으니 인도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었다.
그날도 새벽 다섯 시쯤 집을 나섰다. 내가 지내는 숙소에서 아쉬람은 네 발 자전거로 열심히 달리면 2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해가 뜨지 않아 거리는 캄캄한데 새벽안개가 낀 듯 어슴푸레한 공기와 알싸한 인도 특유의 향내가 느껴졌다. 새벽이어도 대형 트럭이 다니는 대로변이 무서워 뒷길로 가느라 길은 더 어두웠다. 다행히 아쉬람 가는 길은 산야신들이 이용하는 길이라 가뭄에 콩 나듯 가로등이 간간히 보였고 자전거나 스쿠터를 타고 지나가는 외국인 산야신들이 간혹 보이곤 했다. 그런 길을 네 발 자전거를 타고 낑낑거리며 가는 동양 여자 아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동양 여자애를 불쌍히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시선이 아닌, 개였다. 인도에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주인 없는 개들이 많다. 거의 방치 수준이라 그들은 조직처럼 뭉쳐서 새벽이면 영역 다툼이라도 하는지 짖거나 싸우는 소리가 숙소에서도 간간히 들리곤 했다. 그 날 새벽도 여기저기 띄엄띄엄 무리를 지어 앉아있는 개들이 여러 마리 보였다. 그들은 마치 흥분을 이제 겨우 가라앉힌 듯 고무된 느낌이었다. 죄 없는 나는 페달을 열심히 밟으며 그들을 흘깃 바라봤을 뿐이었지만, 무엇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개 한 마리가 나의 자전거 뒤꽁무니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순간 머리가 쭈뼛 서며 등에 땀이 쫙 흘러내렸다. 나는 두 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꽉 쥐고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드는 생각 ' 죽기 아니면 살기다. 누가 이기나 보자'라는 각오를 하고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았다. 개는 오십여 미터를 따라오다가 지들 무리로 돌아가 버렸다. 놀란 맘을 쓸어내리며 가는 길 사위로 날이 밝고 있었다.
인도에서 육 개월 간 지내며 개 사건을 포함 죽을 고비를 세 번 정도 넘겼다. 혹자는' 설마 죽을 고비 씩이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난 그 세 번의 길이 삐끗하고 쓰러졌으면 죽음으로까지 연결될 일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구약 성경 시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니이다 ' ( 시편 23장 4절 말씀 )
그땐 그랬다. 홀홀 단신 여행 가방을 들고 인도행 비행기를 탈 때부터 스스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걸어 들어간 셈이었다. 하지만 명료한 의식과 깨달음, 존재계 혹은 수호신 또는 주님의 도움으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으며 그런 예측되지 않은 위험 앞에 나를 노출시키며까지 겪은 경험담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낸 원동력으로 내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다. 누군가는 말하지 않았던가? ' 온전히 사랑했던 그 기억의 힘이 평생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고'
나의 인도도 그랬다.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 말하지만 자유를 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는 위험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 오쇼 라즈니쉬 [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 ] 중에서
* 북변잡썰
개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다 얘기가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