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산 노트북은 내게 글을 쓰도록 유혹한다. 너무도 익숙한 자판 속 기호와 같은 자음과 모음의 조합은 어느덧 글자로 둔갑하고 매무새를 다듬는 과정을 거쳐 사연을 가진 얼굴을 하고 친근하게 굴다가 의미가 되어 날아가 버린다. 글을 쓴다는 건 매우 감각적인 행위다. 글은 문장 안에서 글자 한 자 한 자가 뇌의 표피를 꼭꼭 눌러준다.
글이란 오묘하다. 자음과 모음이 씨실과 날줄이 질서 정연하게 얽히며 직물이 만들어지듯 글자 한 개 한 개가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 하다 보면 읽을 수 있는 글로 재탄생하는 것은 볼 때마다 새롭다. 처음 ㄱ ㄴ ㄷ 을 배우는 아이 마냥 한 글자씩 글자를 조합하고 의미를 불어가며 신기해하다가 새삼스레 한국어의 위대함도 깨닫고 모국어를 사랑하는 사람이 된 듯 뿌듯함도 느껴본다. 역시 난 말과 글을 가지고 노는 수성이 발달한 사람이다.
점성학 공부를 하며 점성학은 어린 시절 , 인도에 가기 전 어울렸던 도반 중 한 분이 몰두하여 공부하는 걸 지켜본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 점성학이라는 학문이 있는 걸 알았고, 그것이 학교에서 다루는 익히 아는 학문의 영역은 아니라는 것과 별자리와 관계된 공부라는 것 정도의 정보로만 인식했다. 그러고 보면 타로도 그렇고 점성학도 그렇고 내 이십 대 시절 한 번씩 다가온 인연들이었다. 단지 그때는 그런 것들을 배울 여유도, 여력도, 열정도, 머리도 없어서 흘려보낸 것들이었는데 이것들이 어딘가에 고여있다가 내 나이가 오십이 되어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부쩍 드는 생각은 ' 일어날 일은 언젠가 일어난다'라는 말이 주는 깊이다. 이 문장은 퉁쳐서 해석하면 운명론의 다른 말 같기도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운명론과는 결이 다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피해 갈 수 없어서 맞닥뜨리는 것 같아도 그것은 운명론처럼 자의식 없이 휘둘리거나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명료한 의식과 강약을 조절할 수 있는 컨트롤 기제가 반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무의식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이십 대 때 내가 접수하고 막연히 인식했던 타로와 점성학이 정확히 20년 후에 당시에는 없었을 것 같았던 결혼하고 육아를 치르는 동안 기다렸다가 온 손님처럼, 내 의식의 한편에 조용히 머물던 것이 어느덧주인 자리를꿰찮 듯 말이다.
내가 배우는 현대 점성학에는 카이런이라는 소행성이 있다.
이 별은 발견된 지는 40년이 조금 넘은 소행성이다. 실제 천문학에서 태양계에 속하는 행성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점성학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명왕성도 천문학계에서는 왜소 행성으로 탈락했다고 하니 점성학에서 행성의 크기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하겠다. 카이런이 주는 에너지는 인생에서 ' 나의 상처를 인식하고 치유하고 성장하는 여정의 에너지를 주는 행성'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카이런 행성이 강한 사람은 치유자나 힐러 멘토 등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도 한다. ( 참조 - 이 종혁/ 현대 점성학 101 / 북랩 북 )
점성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궁금했다. 나도 카이런이 강한 사람일까? 카이런이 강한 사람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점성학에서 다루는 여러 행성들이 주는 에너지의 영향은 누구나 받는다. 단지 행성들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사람마다 각자 다 다르다. 이것이 점성학의 묘미이며 내가 이 학문을 공부하려고 맘먹은 이유다. 난 항상 어릴 때부터 궁금했다. 내가 왜 사는지, 내가 누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