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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문영 Jun 06. 2018

재앙과 낭만의 끝물

중대 문창과 04학번 이야기

*이 글은 학과 문집에 실린 글입니다


도저히 객관적으로 서술할 자신이 없기에, 나는 우리 04학번 사(史)를 지극히 편향적인 관점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생길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이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04학번의 한계가 아닌 오롯이 나의 한계이다. 

04학번은 여러모로 마지막 학번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은 6차 교육과정, 그러니까 ‘이해찬 세대’의 마지막을 의미하기도 하고, 서로 파편화되기 직전의 ‘술’ 문화, 또한 술에 깃든 낭만의 마지막을 의미하기도 한다. 당시 문예창작학과의 학과장을 역임하던 이승하 교수는 글은 안 쓰고 술만 먹는 우리 학번을 일컬어 ‘문창과의 재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아무튼 04학번 이후로는 술에 대한 낭만의 분위기와 긍정의 분위기가 많이 사그라졌다. 많은 후배들은 대체적으로 술을 싫어했다. 새내기 때의 나와 비슷하게.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나는 04학번 내에서 술에 관한 한 아싸(아웃사이더, 비주류)였다. 

학과의 술 문화를 처음 경험한 것은 예술대 오리엔테이션 뒤풀이 자리였다. 오리엔테이션은 지방의 어느 수련회관에서 진행되었는데, 당일 행사를 끝내고 동기들이 우르르 숙소로 돌아왔을 때, 여러 선배들 틈에 ‘큰’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나에게 물 마시는 종이 잔에 가득 따른 소주를 먹길 원했고,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 술을 마신 뒤 뒤풀이고 뭐고 없이 대자(大字)로 뻗어버리게 된다. 

그 선배는 학과에서 유명짜한 97학번 선배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아무튼 문창과에서의 술 세례를 이런 식으로 겪은 나는 ‘강압적인 술 문화가 별로 좋지 않아 보인다’고 지레짐작해버린다. 처음 한 학기 동안에는 술자리를 나름 피해 다녔다. 그러나 그 선배의 주도(酒道)가 학과의 술 문화의 전부는 아니었고, 그 나름의 뜻과 깊이도 있었다. 선배에 따라서는 주도도 여러 번 바뀌었다. 잔을 두 손으로 들고 있는 나에게 한 손으로 받으라는 선배도 있었고, 아예 술을 권하지 않는 선배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술자리 자체를 즐기는 것. 아무튼 어떻든 간에 네가 이 학과에 들어온 이상 술을 매개로 서로 알고 친해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 문창과의 본질적인 술 문화였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04학번은 잔디밭에서 술을 먹은 거의 마지막 학번이라는 생각도 한다. 하여튼 내가 술을 싫어하든 말든 04학번의 동기들은 대체적으로 이러한 술 문화를 반기는 분위기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예술대 1층의 한 강의실은 한 면이 모두 창문으로 되어 있는데, 그 창문은 바깥 잔디밭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밖에는 일군의 선배들이 아침부터 술을 먹고 있다. 보통 새내기들의 교양 강의나 비평 관련 수업이 그 강의실에서 진행되는데 수업은 그리 재미있지가 않다. 그때 한 선배가 유리창을 똑똑 가만히 두드린다. 물론 강의하는 교수 모르게. 창문 곁에 붙은 사람은 그 신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다. 그는 슬쩍 화장실 가는 척하고 밖으로 나와 잔디밭 술자리에 참여한다. 좀 더 과감한 동기는 창문을 조심스럽게 열고는 훌쩍 넘어 잔디밭으로 뛰어든다. 교수는 그 광경을 때로 목격하는 때도 있지만 짐짓 모른 척 해준다. 술을 먹고, 이야기를 즐기다 시시해지면 노래를 부르고, 다시 술을 기울인다. 우리는 (그것이 비록 설익은 것이라도) 나름의 내밀한 상처와 아픔들을 가지고 있었다. 술자리는 그러한 아픔들을 꺼내어 놓고, 해소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목청 높여 비공식 과가를 부른다.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 이 노래는 한심스런 나태와 위악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지대한 낭만이 깃들어 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공부 따위 뭐! 지금을 살 거야! 04학번은 낭만을 그렇게 술과 함께 지새웠던 것이다. 

아침부터 시작되는 술자리는 보통 새벽녘에야 끝이 나고 잠깐 자취방에서 잠을 청하다 정오 즈음 문자 한통을 받는다. “해장할래?” 그렇게 시작된 오후부터의 “해장술”은 또 밤늦게까지 이어진다. 이런 로테이션을 몇 번 반복하고 나면 몸이 지쳐 나가떨어지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강의고 뭐고  동기, 선배들과 술만 먹은 한 학기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로테이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러한 분위기가 어쩐지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아무튼 그러한 분위기에서는 대학에서 느낄 법한 낭만이 있었던 것이다. 대학 새내기들부터 취직 걱정을 하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였던 터라 더욱 그랬다. 2004년, 문예창작학과 04학번에게 그렇게 술은 하나의 낭만이었고, 풍류였고, 자유였다. 

물론 우리들이 술을 먹고 있는 사이, 2004년에는 많은 ‘사회적 사건’들이 있었다. 김선일씨가 이라크에서 납치당해 사살당하기도 하고, 대통령이 탄핵을 받고, 그 때문에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거두기도 한다. 좌파 지향의 당으로서는 처음으로 진보신당의 전신 ‘민주노동당’이 의석의 10%를 차지한 때가 이 때이기도 하다. 우리는 간혹 선배를 따라 데모 현장에도 나갔으며 술자리에서 정치 이야기를 입에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에 그리 많은 관심을 쏟지는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내밀한 상처와 아픔에 집중했고 그 상처에는 술과 낭만이 어울렸다. 

1학년 1학기, 그렇게 많은 동기들이 학점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고 캠퍼스의 낭만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소설 쓰는 것, 사람 사귀는 것, 연애가 중요하지 학점 따위가 뭐가 중요하냐는 것(물론 이것들에 모든 시간과 정력을 집중한 녀석들은 졸업할 때 많은 고생을 하게 된다). 많은 동기들은 그 해가 가기 전에 세상 끝날 듯이 그렇게 살았다. 재밌는 것은 그렇게 술을 먹고도 나름 열심히 글을 썼으며, 그 글을 또한 나름 열심히 합평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에 한 권의 문집을 발간할 수 있었다. 이승하 교수는 발간사에 「문창과의 재앙」이라는 글을 실었다. 필시 글은 안 쓰고 술만 먹는 것으로 보이는 학번의 분위기를 한탄했던 것이리라. 

04학번은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압도적으로 적었다. 남자 열 명, 여자 삼십 명. 남자가 수적으로 완전 열세다. 상황이 이러하니 여자 동기들의 발언권이나 주도권이 남자 동기들보다 더 세었던 것은 당연했다. 과행사에서도 여자 동기의 참여가 높았다. 나는 2008년 이후에는 민속학과 복수전공을 신청하여 서울 캠퍼스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그때 여자 동기들은 학생회장을 비롯한 학생회의 여러 직함을 가지게 된다. 그때 즈음의 나는 진보신당 활동을 시작하기도 하고, 이후로는 문창과에 대해서 과문(寡聞)해졌다.  

졸업 즈음에서 04학번들은 낭만에서 벗어나 현실에 맞닥뜨린다. 차분히 강의를 듣고, 차근차근 졸업을 하였다. 글은 안 쓰고 술만 먹는다던, 그래서 ‘재앙의 학번’이던 04학번의 동기 중 한 명은 등단하여 작가가 되었고 등단을 하지는 못했지만 계속해서 문학에의 꿈을 품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소설, 시를 쓰는 동기들도 있다. 어느 동기는 게임 웹진 회사에 취직을 하여 중견 기자가 되어 있고, 어느 동기는 드라마 시나리오를 쓰면서 다른 사람들과 소설집을 내기도 했다. 이승하 교수가 말했던 ‘재앙’의 전조는 이제 끝물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아무튼 04학번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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