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주부퀴즈왕』 본 사람이고 안 본 사람이고 이 영화를 별 거 아닌 작품으로 기억하는 것 같은데… 나는 이 영화가 상당히 대단한 명작으로 보인다. 시시껄렁한 작품인 척, 명작 아닌 척 하면서 한국 사회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들을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소개하려고 한다.
먼저, 캐릭터 소개.
방송 진행자였고, 다나 출산 직후 직장에 복귀하게 되었다. 회사를 다니느라 딸에게 많은 신경을 써주지 못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평범한 주부가 되거나 맞벌이를 원했지만 지 생각만 하는 남편 진만의 고집 때문에 홀로 직장 생활을 하여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 집안 다 건사하면서도 오년 남짓한 시간 동안 3000만원의 적금을 부은 능력자이기도 하다. 결혼을 후회하는 뉘앙스를 작품 내내 깔고 있다. 그렇다. 관계를 할지언정 수희는 더는 진만을 사랑하지 않는다.
탄탄한 집안 배경에 멀쩡한 외모, 훤칠한 키,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취직했으나, 지 분수를 모르고 파업하다 자기 혼자 회사를 때려 친, 주부를 가장한 백수.(파업 당사자를 받아줄 회사는 많지 않을 거다. 그렇게 그는 사회에서 매장 당했다. 그러니 이렇게 찌질해진 게 그의 책임만은 아니다.) 매스컴에서 노출된 남성 주부 1호랍시고 페미니스트 운동권스런 말을 이렇게 조렇게 잘도 지껄이나, 기실은 딸 다나를 어린이 집에 보내고(주부 일에서 가장 힘든 게 육아다!) 계모임에서 내기 화투나 치며 인생을 편하게 소일할 생각만 하는 명예욕 가득한 386(486?) 입진보. 아파트 계모임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 아내가 들어둔 적금을 지 맘대로 몰래 깨고 곗돈을 붓다 이제 받을 때가 되니 계주가 외국으로 달아났다. 이제 인생 폭망이혼당할 위기에 처한 호구, 무능력자, 기생충, 놈팽이. 더 심한 말 없나? 아내가 든 3000여 만 원의 적금은 장인 치료비로 쓰일 돈이었다. 미친 거 아냐? 운동권 동아리에서 배운 화려한 언변으로 무능력한 자신을 합리화한다. 똥줄이 탄 진만은 깨진 곗돈과 정확히 일치하는 주부퀴즈왕 3관왕 상금을 노린다. 그래도 주부랍시고 친딸 다나와 가장 많은 감정적 교류를 독차지하는 인물. 무슨 선녀와 나뭇꾼이냐
수희와 진만의 딸. 한국 사회에서 요구되는 표준적 성역할과 반대되는 부모를 가지고 있어 내적, 외적 갈등을 겪는다. 애가 무슨 죄냐
실력 있는 방송국 PD. 수희의 본질과 매력을 가장 잘 꿰뚫어 보고 그녀가 성장할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뒤를 봐주는 (정체를 대놓고 드러내는) 키다리아저씨. 수희와의 사랑을 꿈꾼다. 수희의 생사여탈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그 권력을 함부로 이용하지는 않는다.(수희가 대충 일하려고 할 때는 무섭게 질타한다) 작품 중간부터 캐릭터가 어처구니없이 바뀌어 수희를 강간하려 드는 등 성격이 돌변하나, 끝내 진만과 수희의 관계가 원만해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진만의 어머니, 아버지, 진만의 친구 등등… 등장인물이 더 있으나 여기서 중요하지 않으니 이만 각설하고…
처음 나는 이 작품을 “양성평등이 한국에서 본질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시스템이 어쩌고 블라블라……” 할 생각이었다.(큰 그림에서는 그리 다르지 않지만) 몇 년 전 이 작품을 십 수 번 돌려본 본 내 기억에는 한국 사회에서 그래도 가장 능력과 의지와 배경을 가진 한 엘리트가 가족 내의 개혁을 한번 이루어보려는 시도가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읽혔기 때문이었다.(‘진만’의 가족은 다시 행복을 찾지 않느냐고? 이 작품의 마지막 전개는 웃기지 않은 농담과도 같다. 작품 스스로 자조한다는 확신마저 드는.) 마치 신과도 같은 능력을 가진 영웅이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별짓을 다했는데도 결국 어머니와 동침하게 된 어떤 신화처럼.(『오이디프스』) 또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족구성원 중 적어도 한 명은 한국의 시스템에 길들여지고 깎여지고 갈아지기 때문에 한국 사회 전체 시스템을 들어엎지 않고는 가족이나 개인의 노력만으로 절대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래서 가족이라는 곳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행복을 절대로 얻을 수 없다…는 식으로 논지를 이끌어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간만에 다시 본 이 영화는 내게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내가 그렸던 그림과는 아귀가 조금씩 맞지 않았다. 뭔가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애초에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던 것은 아닌가.
진만은 과연 가족을 시작으로 사회를 바꿀 의지와 능력을 가진 엘리트였던가. 영화를 다시 보았다.
수희가 담당하던 프로그램이 중단 되는 등 수희가 처한 상황의 어려움은 작품에서 갈등의 한 축으로 내내 기능하나, 진만의 주부 생활은 여유로움과 유쾌함으로 넘친다. 수희와 진만의 가족생활은 이제 어쩌면 서로의 괴로움을 토로하는 것을 포기한 것으로도 읽힌다. 이제 수희와 진만은 절대로 생활의 괴로움을 공유하지 않고,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귀찮아한다. 말하자면 수희나 진만이나 서로의 삶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거기다 진만은 유한 주부가 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가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발언권은 절대로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진만은 말하자면 가부장 남성으로의 기득권은 유지하면서 한국 주부가 가진 유한성을 부러워하고 갖고 싶어 했던 거다. 아, 진만 또한 사회와의 불화를 겪지 않느냐고? 이를테면 이런 거?
이런 모욕은 생활을 짊어지는 자의 괴로움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진만에게 이런 괴로움은 잠시지만 수희는 말하자면 직장에서 이런 식의 모욕과 스트레스를 매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참는다. 노래방에서 대학동창과 다투고 사라지는 다음의 장면에서 우측 상단에 있는 동판화를 보자. 이 동판화에는 진만의 욕망이 그려져있다.
위의 그림은 영화 미술 감독으로 활동하는 크리스 콘사니Chris Consani의 작품 자바드림즈JAVA DREAMS이다.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데 원본은 이거다.
당대의 대스타 제임스딘, 험프리 보거트, 엘비스 프레슬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는 마를린 먼로를 바라보고 있다. 이상하게도 남자가 셋이나 등장한 이 그림에서 그들은 마를린 먼로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마를린 먼로가 가진 무엇인가가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다. 해석하자면 진만은 유한 계급이 되고 싶은 거고, 생활의 어려움을 피부로 감당하고 싶지 않다는 거다.
그나마 감정적인 교류가 가장 많은 딸에게마저 피상적으로 접근한다. 아빠가 집안일을 한다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자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응수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이건 봉합도 되지 않음을.
자, 찌질이는 잠시 내버려두고 이미 진만을 사랑하지 않게 된 수희를 따라가 보자. 섹스를 하지 않을 때나, 다나가 없을 때 진만을 대하는 수희의 표정은 항상 이런 식이다.
물론 다나가 있거나 섹스 직전의 표정은 좀 다르다.
수희는 가족의 의미를 성욕과 자식에게서 찾는 듯이 보인다. 아니면 수희는 이미 배우자에게서 ‘사랑’을 찾는 것을 중지한 듯이 보인다. 생업에 몰린 수희에게서 근대적 의미에서의 ‘사랑’ 같은 것은 끼어들지 못한다. 영화 내내 수희는 진만에게 불만을 말하고, 진만은 방어한다. 여기에서 합의점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가족의 대소사는 진만의 의도대로 흘러간다. 가족의 생업을 책임지고 있음에도 가부장적인 실권마저 관습에 강탈당한 것이다. 그래서 아마 행복해 보이던 처음 장면에서부터 수희는 ‘이혼’을 항상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었을 테다. 거기다 진행하던 프로그램이 중단되면서 수희는 고립된다. 자기가 무너지면 가족은 붕괴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등장한다면? 거기다 그 사람이 자신을 진실로 이해하고 자신의 본 모습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거기다 직장에서의 위치가 흔들거리는 자신의 위치를 든든하게 잡아줄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금상첨화겠지. 바로 방송국 PD 남규 같은 사람. 이 인물이 등장하는 시점에서 이 영화는 이상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남규는 수희의 괴로움을 우연히 알게 되고 호감을 품는다. 영화 서사 상으로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수희를 농락하는 캐릭터여야 할 터인데 남규는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자존감을 잃은 수희를 도와주려 물심양면으로 노력한다. 이를테면 수희가 슛을 넣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음과 같은 장면. 수희의 낮아진 자존감을 달래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되게 충격적인 장면으로 생각하는 다음의 장면. 진만과의 갈등으로 수희는 집에 들어가지 않는데 그걸 우연히 목격하게 된 남규는 수희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온다.
다음 장면부터 영화는 계속 이상해진다. 다나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진만으로 이야기 축이 움직이며 10여 분간 수희는 작품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진만이 주부퀴즈왕을 통해 매스컴의 각광을 받는 스토리로 넘어간다. 대체 남규와 수희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러나 영화가 끝나도록 이에 대한 속 시원한 답변은 들을 수 없다. 말하자면 미싱링크인 셈이다. 뒤에서 남규는 수희와 자지 않았다는 것을 남규의 “오늘은 그냥 못가.”라는 대사로서 알 수 있으나. 이 말을 곧이듣기에는 수희는 이미 남규의 매력에 넘어갔었고, 그 때에 바로 남규는 수희에게 본격적으로 마음을 드러냈다. 말하자면 자지 않을 이유가 없는 거다. 결혼 계약이라는 속박 외에는. 다나에 대한 죄책감 외에는.(이후 수희가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수희는 다나의 유치원에 홀로 찾아가 다나를 그리워한다. 정말 선녀와 나무꾼) 그리고 이후 수희의 분명한 입장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거의 분명히 ‘남규와 수희는 동침했다’. 그러나 표피적으로 ‘가족의 소중함’을 내세우는 영화의 컨셉과 『바람난 가족』이나 『해피엔드』 같은 진지한 불륜 이야기로 넘어가기에는 이미 영화는 너무 즐겁고 유쾌해버렸다. 또한 해당 영화가 개봉할 당시 법률적으로도 간통은 금지되어 있었다. 다수 대중에게 소구하려던 감독은 아마도 그래서 둘의 불륜을 긍정적으로 다룰 수 없어 소거해버렸을 것이다.
수희가 다시 등장할 때 회사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퍼져 있다. 남규를 꼬셔 새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진행자를 꿰찼다는 거다. 거기에 수희는 그냥 묵묵부답으로 당황한 표정으로 있다. 그리고 다시 수희를 유혹하는 남규는 캐릭터가 완전히 변해 있다. 그 어떤 개연성 없이.
말하자면 수희와 남규는 실제로 잤고, 그 일을 없었던 셈치고 천연덕스럽게 영화를 이어나가려는 약속을 하기로 한 거다. 감독과 등장인물과 편집자의 암묵적 공모. 뭐 이해할만하다. 내 눈에도 코미디로 컨셉을 잡은 대중 영화에서 이런 주제를 다루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제 슬슬 결말로 온 듯 싶다. 장인의 치료비를 허공에 날려버리고, 아내와의 갈등은 골이 이미 깊어 도저히 손쓸 방도가 없는 이 집안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 뭐가 있을까……. 진만은 고민하고, 답을 찾아낸다. 그것은 바로
너 나랑 결혼반지 끼면서 영원히 사랑할 것을 약속했잖아! 그러니 약속 지켜! 다나도 있고 말이야! 다나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 셈이야?
여기에서 뒷목을 잡을 독자에게 물어본다. 말하자면 이게 한국 가족의 표준이 아닌가. 가족 내의 모든 불만들을 잠재우는 것은 가부장의 폭력이거나 혹은 사회적으로 법률적으로 형성된 “계약관계”이지 않은가. 이것은 비록 진짜로 평등하지 않더라도, 한쪽에게 너무 유리한 계약이라도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장치인 거다. 말하자면 가족 내에서의 완전한 양성평등은 가족에서 일어나는 괴로움들을 서로 고르게 나눠가지는 것인데, 기득권들은 이 세계적 추세를 벗어나고자 계속해서 머리를 굴린다.
그래서, 어쩌면 성격 무던하고 나름대로 사회적인 고민도 하고 있는 진만이 여기에서 가장 교활하고 무의식적으로 한국 가족의 불평등에 기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희생을 감내하기 싫은 진만은 가족을 만들면 안 되었던 거다. 결혼 후에도 늘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해왔지 않은가. (혼자 퇴사, 아내가 괴로움을 토로할 때 그걸 귓등으로 흘리고 자기 괴로운 것만 이야기 하는 것 등.)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어려움을 같이 이겨내는 사람일 텐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아직도 진만은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사회적으로 비웃음거리가 된 자신의 지위를 상승시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얘기하고 싶은 건 여기까지다. 영화의 결말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진만이 결혼반지를 내밀고 다나가 그 가운데 끼어 행복한 표정을 지을 때 임시로 봉합되듯이 활짝 펴지는 수희의 표정은 얼마 안 가 다시 굳어질 것임을 안다. 다만 이런 가정을 해볼 필요는 있겠다. 수희의 직장이 안정적이고 가족을 챙길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웠다면, 혹은 진만이 진짜로 ‘근본적으로’ 가족의 역할을 고민하고, 자신의 입장이나 위치를 고민하여 생업을 같이 고민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수희가 그런 직장을 얻었던들 그게 한국 중산층의 표준이 아님을 우리 모두 알고 있고, 아무리 고민을 한들 진만의 아비투스(습속)는 좀처럼 몸에서 잘 떨어져 나가지 않고 덕지덕지 갈등을 유발할 것임을 안다. 하루 이틀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진만이 그렇게 자기 맘대로 살아갈 거였으면 가족을 만들면 안됐었다. 그러나 진만은 가족을 만들었고, 누군가는 또 만들 것이고, 지속해서 불행은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
영화에서 줄곧 묘사된 전근대적 가족에서 행복을 느끼기에는 우리의 감성은 너무 진보되어 버렸다. 시스템이 뒷받침 되지 않은 감성의 진보는 필연적으로 불행을 배태한다. 시스템이 획기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앞으로 수 십 년간 비슷한 처지에 놓일 듯하다. 가족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는 거 말이다. 표준적인 한국 가족을 개혁하려는 이 영화는 비록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데는 실패했고, 장르를 확정한 상업영화를 지향하여 개연성에서도 실패했지만, 여러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게 한다는 측면에서 진짜로 좋은 영화였다. 우리는 우리가 관성적으로 받아들이던 삶을 지속해서 반성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는 거다. 나도 계속 고민해봐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