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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솜 Jun 22. 2019

저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그립지도, 그립지 않지도 않은. 짧지만 강렬했던 나의 첫 직장

대학교 4학년 2학기, 졸업 작품 발표 막바지에 교수님의 추천으로 취직을 하게 됐다. OO그룹 계열사 홍보팀 막내 자리였고, 계약직이었다. 주요 업무는 브랜드 SNS 관리, 각종 행사 준비와 보조, 그 외 자잘한 디자인 잡무였다. 회사 입장에서는 이런 잡다한 일을 처리할 사람을 새로 뽑기도, 외주로 돌리기도 애매하니 '파트너'라는 값싼 이름으로 대학생들을 데려와 1년마다 교체하며 사용하고 있었다.


영리한 동기들은 취업을 앞둔 이 중대한 시기에 1년짜리 계약직 '나부랭이'나 하며 시간을 뺏기고 있을 틈이 없었기 때문에, 별로 영리하지 못한 나한테까지 순번이 온 듯했다. 당시에 나는 광고대행사 취직을 희망하고 있던 터라 이때가 아니면 언제 대기업 구내식당에서 식판 밥을 먹어볼까 싶었다. 큰 고민 없이 교수님의 제안을 넙죽 받았다.


내 업무는 시시할 만큼 쉬웠다. 문제는 일 말고 다른 게 전부 어렵고, 이상했다.


일단, 아침에 출근하면 가방을 내려놓고 용모를 단정히 한 다음 상무님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기척이 들리면 문을 열고 한 발짝 들어가서 '안녕하십니까. 상무님,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90도로 배꼽인사를 하는 게 하루 업무의 시작이었다. 모든 직원이 그렇게 했다. 진한 경상도 사투리에 눈매가 날카로운 상무님은 '그래. 누구누구 왔나.'를 기본으로 그날 컨디션에 따라 '좋은 아침'이라는 멘트 또는 반갑다는 손짓으로 답했다.


그렇게 아침 의식(?)을 마치고 자리에 돌아와 앉으면 사무실 기둥마다 붙어있는 대형 TV에서 사내방송이 시작됐다. 주요 내용은 우리 기업의 성과와 비전에 대한 '자기 찬양'이었다. 사무실에 앉아있는 수십 명의 사원들은 매일 아침 그 방송을 보며 애사심을 강요당했다. 신기하게도 다들 그 방송을 열심히 봤고, 난 그런 사람들 얼굴을 열심히 봤다.


복장 규정을 따로 듣진 못했는데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무채색 계열 옷만 입었다. 나도 덩달아 그런 옷만 입었는데 문제는 하이힐이었다. 또깍또깍 소리가 나는 하이힐은 되도록 신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지만, 하이힐 만은 죽어도 포기할 수 없었던 스물셋. 난 하루 종일 발 뒤꿈치를 세우고 종종거리며 걸어 다녀야 했다. 사무실 안에서 슬리퍼 같은 편한 신발로 갈아 신는 건 허용되지 않았다. 상무님이 싫어하신다는 이유였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하늘하늘한 하늘색 쉬폰 원피스를 입은 사람이 내 앞으로 지나갔다. 무릎 위까지 훌쩍 올라간 미니 원피스는 칙칙한 무채색 물결 속에서 단연 튀었다. 나도 모르게 젓가락질을 멈추고 그 사람을 눈으로 좇았다. 앞에서 같이 밥을 먹던 선배 언니가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아~쟤~?'라고 아는 체를 하며 말을 이어갔다.


"쟤 우리 회사 직원 아니야. 회사 안에 있는 은행. 거기 다니는 애."


그 말투에서 느껴지는 묘한 구분선 때문에 왜 내가 기분이 상했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밥맛은 똑 떨어졌던 것 같다.


점심을 먹고 휴식 시간이 되면, 내 밥맛을 떨어지게 언니를 포함해서 나이가 비슷한 여자들끼리 모여 커피를 마셨다. 저 멀리(아니,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OO전자 건물이 내다보이는 휴게실에 모이는 날이면 대화 주제는 어김없이 'OO전자'로 흘러갔다. 올해 OO전자는 성과급이 몇 % 인지, OO전자 사람들끼리 결혼하면 한 달에 얼마를 벌고, 무슨무슨 동네에 집을 사며, 어떤 생활을 하는 게 가능한지에 대한 TMI가 쏟아졌다. 그리고 이 대화는 '어떻게 하면 OO전자 사람을 만나 결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 혹은 과제로 이어졌다. 그중에 나이가 제일 어렸던 나는 그 과제에 별다른 아이디어를 못 낸 채 언니들 틈바구니에서 유난히 쓴 커피만 홀짝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회사에 대규모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자금 관련 뉴스가 연일 터지면서 회사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과장급은 허리에 무전기를 차고 다녔고 퇴근할 때는 PC를 완전히 끄고 서랍에 넣은 후 열쇠로 잠그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내 PC를 뒤져봤자 아무것도 나올 게 없겠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이런 와중에 상무님으로부터 다음 달 사보에 들어갈 글을 하나 쓰라는 명령이 우리 팀에 떨어졌다. 요는, 현재 대규모 구조조정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파트너인 나까지 포함한 홍보팀 전 직원이 작은 회의실에 모여 앉아 '그것'을 찾기 위해 분투했다. 아무도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할 때, 누군가 '삼국지 유방 얘기는 어때?'라며 입을 열었다.


한나라 유방이 팽성 전투에서 항우에게 폐하고 휘하 병사 하나 없이 하후영과 마차로 도주할 때의 일이었다. 하후영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유방과 그의 자식 둘을 전장에서 구해 태우고 마차를 모는데, 말이 지쳐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그러자 유방은 마차가 무거워 속도가 나질 않는다며 자기 자식들을 마차 밖으로 집어던졌다. 달리는 마차에서 나가떨어진 자식들을 하후영이 몇 번이고 다시 주워와 태웠지만, 그때마다 유방은 자식들을 다시 집어던졌다. 유방의 이런 행동에 대한 평이 엇갈리긴 하지만, 그가 '대의'를 위해 서라면 '자식까지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있었다는 점을 '대규모 구조조정'과 엮어서 풀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였다. 몇 명은 '괜찮다'고 했고, 몇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고, 나는 구석에서 눈만 동그랗게 떴다. 


이게 '사회'구나 싶었다.


계약 기간이 끝나고 송별회 하던 날, 친하게 지내던 선배 언니가 '꼭 우리 회사에 입사해. 또 같이 일하자.'며 눈물을 글썽였다. 애매하게 겉도는 나를 잘 챙겨줬던 착한 언니라 나 역시 정이 많이 들었었다. 그래도 차마 빈말은 할 수 없어서 '언니. 저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전 대기업이랑 안 맞는 것 같아요.'라며 씨익 웃고 헤어졌다.


일 년 내내 목에 걸려있던 출입증을 반납하고 몇 가지 없는 내 물건을 챙겨 들고 회사 정문을 나오면서, 문득 나 역시 이 'OO그룹'이라는 마차에서 던져진 사람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스산해졌다. 그렇게, 짧지만 강렬했던 나의 첫 직장 생활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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