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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솜 Jul 10. 2019

나는 커서 디자인어가 될꺼다

그럼 이제 뭐가 돼볼까.

1993년, 국민학교 3학년 일기장에 뜬금없이 '나는 커서 디자인어가 될꺼다'라고 적은 이후로 장래희망이 바뀐 적은 없었다. 디자이너가 디자인어인 줄 알았던 꼬맹이 주제에, '되고 싶다'도 아니고 '될꺼다'라고 쓴 패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 이후에 과학상상화 같은 걸 그릴 기회만 있으면, 엄청난 기술 발전을 이룬 미래 도시를 배경으로 유명 패션 디자이너가 된 내 모습을 그렸으니 '디자인어'가 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꽤 강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왜 하필 패션 디자이너냐고 묻는다면 엄마가 양복점에서 일했던 영향이려나...)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꿈은 여전했지만, 강한 의지에 비해 성적은 앞보다 뒤에서 훨씬 가까웠다. 맞벌이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나에게 바라는 건 '부디(오빠처럼 말썽 피우지 말고) 건강하게만 자라 다오' 밖에 없었던 부모님을 탓하고 싶지만, 실은 공부라는 것엔 한 톨도 관심이 없었던 내 탓이었다. 그 당시 나의 일상은 오빠가 사모은 팝송 테이프를 늘어질 때까지 들으며 공상과 낙서를 하는 일 만으로도 하루가 짧았기 때문에, 도저히 공부까지 할 시간이 없었다.


중학교 3학년 1학기 진로상담 시간이 돼서야 내가 가고 싶은 고등학교에 '산업디자인과'는 이런 형편없는 성적으론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됐다. 마음만은 이미 디자이너였던 열다섯 살 소녀에게 인생 최대 위기가 찾아온 순간이었다. 진로상담을 하던 선생님은 애꿎은 볼펜만 딸깍딸깍 거리며 "3학년 내신이 제일 중요하긴 하지만..."이라고 말끝을 흐리더니 "좀 어렵지 않겠니?"라고 말을 맺었다. 발등과 심장에 뜨거운 불덩이가 떨어진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난생처음 독서실이란 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이때 우리 엄마는 딸이 자발적으로 독서실에 다닌다는 사실에 크게 감동하면서 '옳거니! 쟤가 선생님이 되려나보다'라며 내심 기대했단다. 그래서 얼마 후에 내가 들이민 학교 안내 팜플릿과 입학원서를 본 엄마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팜플릿을 들추는 둥 마는 둥 했던 것이다. 엄마는 (아마 난생처음 들어봤을) '산.업.디.자.인.과'라는 단어를 읽고 내 얼굴을 한번, 그 학교가 우리 집에서 버스로 한 시간, 지하철로도 한 시간이 걸리는 먼 곳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한번 내 얼굴을 쳐다봤다. 팜플릿을 내려놓은 엄마는 내게 D여고에 가는 건 어떻겠냐고 했다. 선생님이 되면 어떠냐고. D여고는 우리 집 베란다에서 운동장이 내려다 보일 만큼 가까운 학교였다. 인문계는 싫고, 여고는 더더욱 싫다고 대답하고, 죽었다 깨나도 선생님은 하기 싫다는 말은 꾹 삼켰다.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 선생님과의 좋은 추억 같은 건 별로 없다는 걸 우리 엄마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결국 '부모님의 도장'을 받지 못한 채 원서 제출 마감날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난 누가 하지 말라고 하는 일에 더욱 열성적으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고집은 또 얼마나 질긴지 우리 이모의 구수한(..) 표현을 빌려 적자면 '태생이 우라지게 고집 씬 년'이 바로 나다. 우리 엄마, 김순옥 여사님도 고집 세고 독하기로 유명하니, 그 피가 어디 가나? 아무튼, 엄마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며 어물쩍 원서 마감일이 지나길 바라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 갈 때, 난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엄마가 아침 일찍 출근한 날, 잽싸게 안방으로 침투했다. 장롱문을 열고 도장이 있을 만한 서랍을 홀딱 뒤집어서 엄마의 도장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서랍 깊숙이 숨겨져 있던 작은 자주색 손가방 안에서 인주랑 함께 나란히 누워있는 도장을 꺼내서 원서 위에 꾸욱 찍고 후후 불어 말렸다. 그렇게 '부모님의 도장'이 찍힌 원서를 가방에 넣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내달렸다. 구르던 발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에게 '초심'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그 순간 일지도 모르겠다.


시흥동 범일운수 버스 종점에서 107-1번 버스를 타고 당산동 회차점 내렸다. 정류장에서 15분 정도 걷자 주택가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학교가 나왔다. 학교 정문에서부터 원서 접수처로 안내하는 화살표를 따라가니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선생님들 몇몇이 책상에 앉아있었다. 여자애가 혼자 접수처에 오는 경우는 드물었는지, 한 선생님이 "학생 혼자 왔어요?" 놀라며 물었다. 낯가림이 심했던 중3 소녀는 가방에서 원서를 꺼내며 "네에. 부모님이 바쁘셔서요."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고는 얼굴이 새빨개졌던 것 같다.


원서를 받아 든 선생님은 내 성적을 확인하곤 고개를 갸웃하며, "학생 성적이 좀 간당할 것 같은데, 알고 있죠?"라고 물었다. 그 말인즉, 내가 이 학교에 안전하게 합격하기엔 성적이 다소 부족하고 만약에 떨어지면 1년을 꿇어(..)야 하니 다른 학교에도 원서를 넣어야 하는 걸 알고 있냐는 확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학교 원서는 받은 적도, 받을 생각도 없었다. 만약에 진짜 이 학교에 떨어져서 1년을 쉬어야 한다면 어차피 빠른 생년이니 괜찮지 않을까-라는 태평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마도) 턱걸이로 그 고등학교에 붙었고 빠른 생년 카드는 몇 년 뒤 대학 입시에서 미끄러졌을 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내 이름 옆에 디자이너라고 찍힌 명함을 처음 받아 든 지 올 해로 12년 째다. 추진력은 강해도 늘 지구력이 부족해서 뭐든 쉽게 질리는데 이 일만은 끊임없이 하고 있다. 꽤 즐겁고 가끔은 보람까지 있으니 이 정도면 천직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26년 전에 겁 없이 '디자인어가 될꺼다'라고 쓰길 잘했다. 그러니 오늘도 겁 없이 다음 꿈을 써본다.


"난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될꺼다"


첫 장래희망을 선언하고 이루기까지 14년이 걸렸으니, 다음 장래희망도 그 정도 걸릴 거라고 생각하면 조급한 마음이 차분해진다. 언젠가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까지 성실하고 느긋하게, 계속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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