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최초의 기억은 이모의 등에서 시작됐다. 엄마와 8살 터울의 큰 언니, 일찍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대신해 우리 엄마에게 엄마가 되어준, '정자 이모'.
이모는 날 낳고 몸을 푸는 둥 마는 둥 일터로 나가야 했던 우리 엄마를 대신해 날 맡아 키웠다. 내가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사진 속에 장판도, 못난이 인형처럼 울고 있는 사진 뒷배경에 벽지도 모두 이모네 것이다.
오늘 그 이모가 입원한 수원 병원에 다녀왔다. 나 모르는 사이에 팔순이 다 되어가는 이모는 양쪽 무릎관절 연골이 다 닳아져 연골 이식 수술을 받았다. 양쪽 다리에 커다란 깁스를 한 채 해쓱한 얼굴로 병상에 누워있는 이모에게 '뭐 해줄까?' 물으니 씻고 싶다고 했다. 이모를 일으켜서 휠체어에 태우고 샤워실로 갔다. 수술 후 일주일 동안 감지 못했다는 머리를 시원하게 감겨주고 수건으로 몸을 닦은 뒤 환자복을 새 걸로 갈아입혔다. 이모는 어린애 마냥 내 팔을 꼭 붙들고 '네가 나 때문에 고생이네' 하면서도 '네가 오니까 좋다. 오늘 안 가면 안 되냐'며 응석을 부렸다. 30년도 더 전에 내가 이모에게 그랬던 것처럼.
기차 시간이 다 되어 집으로 돌아와야 했을 때, 이제 내 품 안에 쏙 들어올 만큼 작아진 이모를 꼭 안 주고 등을 토닥였다. 이모 힘내, 괜찮아.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택시 운전을 하셨던 이모부의 빤한 벌이에 한창 손 많이 가는 삼 남매와 나까지 키워냈던 우리 이모. 이모의 무릎 연골이 닳아 없어진 건 내 탓도 있구나. 어느새 어둑해진 6인실 한 구석에서 손을 흔드는 이모의 실루엣을 뒤로하고 돌아 나오는 길에 참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어렸을 때 종알종알 말이 많았던 나를 이모는 '여수'(여우 같다는 충청도 말)라고 불렀다. 여수는 자기가 어른이 되면 이모와 꼭 세계여행을 갈 것이라고 했단다. 그 여수가 어른이 된 지는 십수 년도 지났건만, 세계 여행은커녕 국내 여행도 한번 변변히 못 모셨고, 이모의 다리는 양쪽이 다 고장 나서 편히 걷지도 계단을 오르내리지도 못하게 돼버렸다. 기차 안에 앉아 뿌연 하늘을 보면서 언젠가, 아니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이모가 내 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다가 눈을 감았다. 눈 속에서 조금 전 이모가 날 향해 손을 흔들던 모습이 계속, 계속 재생됐다.
2019. 3. 5.
이 글을 써 놓은지 이렇게나 오래되었다니. 아기를 갖고, 낳고 사람을 만드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어제 위 글의 주인공인 정자 이모가 다녀갔다. 아이가 태어나고 110일 만에 첫 만남이었다.
이모 품에 포옥 안겨서 한참을 잘 노는 아이를 보면서 나 역시 이모의 따듯한 눈길과 손길을 먹고 이렇게 자랐구나 생각했다. 한참 마음이 외로웠던 20대에는 이 결핍에 원흉(..)이 어렸을 때 엄마손에 크지 못한 탓이 아닐까, 원망 아닌 원망을 했던 적도 있었는데. 난 충분히 사랑받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