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국정원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지만, 국정원의 전신 중앙정보부 시절에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위세가 있었다. 그런 중앙정보부가 만든 축구단이 있다. 바로 양지팀이다.
양지팀은 1967년 2월에 탄생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형욱이 강하게 밀어 붙여서 만든 팀이다. 1960년대에는 프로팀이 없었고 각 군 축구팀이 강했는데 양지팀을 만들면서 각 군은 물론이고 내로라 하는 선수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골키퍼 이세연을 비롯해 김호, 김정남, 조정수, 서윤찬, 허윤정, 정병탁, 김삼락, 임국찬 등 쟁쟁한 선수들이 강제로 한 팀에 모였다.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에 진학하려고 했던 이회택은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지프차에 실려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입대를 당했다고 보면 된다.
중앙정보부로 간 선수들은 그 곳에서 병역의 의무를 하면서 축구를 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영화 ‘실미도’와 비슷한 것을 생각하겠지만, 중앙정보부는 훈련 여건을 최고로 제공했다. 이문동 중앙정보부에는 당시에는 유일할 수도 있는 잔디 운동장도 있었다.
이 팀은 누가 왜 만들었나?
그런데 이 팀은 누가, 왜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일단 시대상황부터 살펴봐야 한다. 한국과 북한은 당시에 엄혹한 냉전체제 속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전쟁을 또 벌일 수는 없었으나 여러 부문에서 경쟁했다. 특히 가장 극심했던 것이 스포츠 대결이었다.
1964도쿄올림픽에서 일본이 전범국 이미지를 급격하게 바꾸면서 국력을 자랑하면서 스포츠가 이념 선전에 좋은 도구라는 게 알려졌던 바도 크다. 한국과 북한은 스포츠 무대에서 만나면 이런 상황 속에서 극렬하게 대립했다.
천리마 축구단이라는 영화로 유명한 북한대표팀은 1966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에 오르며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했다. 실제로 이 팀은 엄청나게 강했다. 당시에는 아시아에서 이들을 견제할만한 팀이 없었다. 한국은 패배를 두려워해 잉글랜드 월드컵 예선전에 불참했을 정도다.
이들의 강력함을 보이는 일화가 있다. 당시 재일교포로 이뤄진 재일조선축구단은 일본대표팀도 꺾을 정도로 강했는데, 1964도쿄올림픽을 보이콧한 북한대표팀과 경기를 해서 0-8로 대패했다.
“8-0 완패였어. 도저히 대적할 수가 없었지. 기본기, 체력, 속도. 더 말하자면 다리 굵기부터 가슴 두께까지 모든 게 우리랑 아주 달랐어. 그 당시 북한대표는 구소련이나 동류럽 나라들에서 자주 연습시합을 해왔어. 도쿄 올림픽 전에는 소련 원정경기에서 스파르탁 모스크바를 이겼지. 그래서 1966년 월드컵 8강에 올랐을 때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주장이었던 신영규나 이탈리아전에서 골을 넣은 박두익, 1966년 월드컵에서 활약핶던 멤버들은 거의 1964년 시점에서 유럽 축구에 대한 면역이 있었던 거야.”
<우리가 보지 못한 우리 선수>, 신무광
북한을 이겨라!
북한이 1966잉글랜드월드컵에서 성공하자 한국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가장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북한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목표인 양지팀을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중앙정보부 슬로건이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였기 때문이었다.
선수들은 서울 이문동에 있던 중앙정보부 내 숙소에서 합숙하면서 그 안에 있는 천연잔디 구장에서 훈련을 받았다. 선수들은 당시 국영기업 중견 간부 월급과 비슷한 2만 5천원(쌀 한 가마니에 4천원)을 받았고, 1969년에는 한국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전지훈련을 105일 동안(서독과 프랑스, 스위스, 그리스 등, 평가전 성적 26전 18승 2무 6패) 떠나기도 했다. 1969년 한국 1인당 국민 소득은 240달러로 세계 평균인 757달러에 크게 뒤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념 전쟁을 위한 투자는 아끼지 않았다.
흥미로운 건 엄청난 대우는 물론이고 치밀한 감시까지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세연 골키퍼는 노컷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어느 날 최정민 감독이 이틀씩 휴가를 줬다. 우리는 명동으로 진출해 진탕 마시고 여자들과 어울려 놀았다. 복귀 후에 감독이 한 명씩 불렀다. ‘휴가 중에 뭘 했느냐?’고 묻기에 ‘그냥 집에서 쉬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감독이 씩 웃으면서 서류철을 보여줬다. 거기에는 내가 48시간 동안 어디서 뭘 했는지가 1분 단위로 적혀 있었다. 선수 한 명당 요원 몇 명씩 붙어 미행한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양지팀은 아시안클럽챔피언십에서 결승에 진출해 마카비텔아비브에 0-1로 패했다. 한국이 AFC가 주관하는 대회에서 입상한 건 처음이었다. 이 팀은 1969년 10월 12일 멕시코월드컵 한일전에서도 승리했다. 그런데 그날 경기가 끝난 뒤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사임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떠난 이후에 양지팀은 바로 해체되기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1970년 3월 17일 북한과 맞대결도 치르지 못하고 사라졌다. 냉전이 만든 팀은 얼음이 녹아 없어지듯 3년 만에 자취를 감췄다.
이들은 해체된지 35년만에 국정원 직원으로 구성된 ‘구룡회’와 친선전을 가졌다. 2005년 5월 21일 대결했는데, 기사에 이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혈기방장한 청년들이 초로의 신사가 되는 동안 양지팀의 모체는 중정에서 안기부를 거쳐 국정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청사도 서울 이문동에서 내곡동으로 옮겼다. 그렇지만 ‘철저한 보안’만큼은 여전하다. 양지 시절 외출 때마다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했던 이들은 오는 21일의 방문을 앞두고 엄격한 신원조회를 받았다. 당일 청사 내에서는 카메라와 휴대전화 사용이 일절 금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