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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블루 Aug 08. 2021

곰은 왜 사자에게 '동물의 왕' 자리를 내줬나

곰, 몰락한 왕의 역사를 읽고


더 깊고 넓은 엠블럼 세계로 가는데 꼭 필요한 책이다. 바로 전에 읽었던 '문장과 함께하는 유럽사 산책'가 입문서라면, 이 책은 유럽 최고 상징사 학자인 미셸 파스투로가 만든 세상으로 가는 개론서이자 필독서다. 


곰은 기독교화되지 않은 유럽에서 가장 강하고 상징적인 동물이었다. 게르만족과 켈트족 그리고 많은 유럽 부족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곰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두 발로 설 수 있고, 도구까지 사용하는 곰은 인간과 가장 비슷한 동물이었다. (아서왕은 그 이름 자체로 곰과 관련이 있다. 한국엔 웅녀가 있다.)

북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였던 베르세르키르(베르세르크)는 전쟁 때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오직 곰 가죽만을 뒤집어 쓰고 싸웠다. 이들은 거의 무아지경에서 싸우며 적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스스로 숲을 지배하는 곰이 되려고 했다. 


내용보다는 형식에 더 주목해야 하는 왕이나 공작의 신화 그리고 초기 성인전에도 곰이 자주 등장한다. 곰과 육박전을 벌여 승리하는 이야기다. 곰이 그만큼 강하고 상징적이었기에 이를 굴복시키는 이는 높은 자리에 오를 자격을 받을 수 있다. 곰은 자격 시련에 나오는 '끝판왕'인 셈이다. 

기독교는 '야만의 상징'인 곰을 몰아내고 기독교 교리와 생활을 정착시키려고 곰과 전면전을 펼친다. 샤를마뉴는 두 차례 큰 곰사냥을 벌였고, 곰은 가장 강한 동물에서 가장 악한 동물로, 이후에는 웃기고 불쌍한 동물로 격하된다. 왕의 동물원에서 제후의 동물원으로 그리고 서커스단 우리로 이동한다. 


그 틈은 이미 유럽에 살지 않는 사자가 메웠다. 현재 유럽 엠블럼 중 사자가 가장 많은 이유가 여기 있다. 그리고 유럽에서 동물의 왕을 사자(혹은 호랑이. 이는 우리 문화권의 특징)로 여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독교는 곰을 폐위시켜서 광대로 만들었다. 

십자군 전쟁에서 용맹함을 떨쳐 '사자심왕'으로 불리는 리처드(1157~1199)가 괜히 사자를 상징으로 쓴 게 아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가장 용맹한 동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아마 리처드가 100년만 전에 태어났으면 '곰심왕'이 됐을 수도 있다. 


책에도 이런 서열 이동이 잘 나와 있다. 수많은 판본이 등장하는 '여우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의 '동물관'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곰은 처음에는 사자 밑에서 일하는 사제(브렁, 브루노)인데 아둔하고 탐욕이 많다. 등장 동물 중 유일하게 죽는 버전까지 있다. 


워낙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이 작업이 진행됐기에 곰은 앞으로도 동물의 왕 자리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다. 12~13세기 당시에는 사자가 '만들어진 전통'이었으나 800년이 지나자 상징사를 점령했다. 


재미있는 것은 곰이 다른 방식으로 반격에 나섰다는 사실이다. 곰은 동물의 왕은 아니지만 귀여움과 친근함으로 우리에 다가온다. 테디베어, 아기곰 푸우는 이미 많은 아이들 마음을 사로 잡았다. 곰과 인간은 생각보다 단단한 고리로 얽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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