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야 단단해지는 건 종이만이 아니야.
서예에서 배첩(褙貼, mounting)의 뜻을 풀이해 보면
‘뒷면[背]에 옷[衤]을 입힌다 [貼]’는 뜻으로,
보존을 위한 기술적 공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큰 틀 안에 포함된 초반 단계가 배접(褙接, backing)이다.
배접은 작품의 뒷면에 종이를 겹쳐 붙여
구김을 펴고 장력을 잡아 하나의 면을 만드는,
‘종이와 종이를 포개어 붙이는’ 공정이다.
주름과 수축을 막고, 먹의 번짐과 박락(剝落)을 예방하며
얇은 화선지에 지지력을 더해
습도 변화에 따른 뒤틀림을 최소화한다.
사람의 손이 귀해지면서 기계배접이 늘고 있다.
다만 기계배접은 본드를 사용해 한 번 붙이면 되돌릴 수 없다.
귀한 작품일수록 시간을 들여 전통 배접으로 작업하는 이유는
유지뿐 아니라 '되돌림, 복원'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배접 과정은 작품을 펼쳐두고,
배접지와 작품 모두에 수분을 충분히 먹인 뒤
풀을 발라 서로 포개어 고정시키고 말리는 일이다.
배접에 쓰는 풀은 우리가 김장 때 쑤는 그 풀이 맞다.
전분 성질이 섞인 어떤 것도 가능하다고 하는데,
때로는 발효까지 시킨다는 말을 듣고 그 이유가 궁금해 찾아보았다.
갓 만든 밀풀에는 지방, 단백질, 당류처럼
부패를 유도하는 성분이 남아 있다.
하지만 발효를 오래 거치면
이 성분들이 천천히 분해되고
초기 발효를 담당하던 미생물도 자연 사멸한다.
전분 구조는 변질되지 않는 방향으로 굳어지며
곰팡이가 슬지 않는 안정된 접착력만 남는다.
필요하면 다시 물을 먹여 풀릴 수 있는
되돌림의 성질도 유지되는 것이다.
전통 배접의 핵심이 바로 이 발효 풀에 있었다.
(실제로 선생님이 쓰시는 발효한 일제 풀은 꽤 비싸다고 했다.)
작품은 단계를 반복해 거치며
섬유끼리의 장력이 맞춰진다.
이완 선생님 작업실에서는
가끔 가까이서 그 과정을 볼 기회가 있다.
물을 먹어 잠시 투명해진 종이는
배접지 아래로 포개지고,
건조판 위에 눕혀져
거친 빗자루 세례에 무참히 얻어(?) 맞으며 제자리를 찾아간다.
물을 머금기 전에는 초봄 잎사귀처럼
만지면 부서질 듯 귀하게 다루다가도,
물 먹고 늘어지기만 하면
거친 솔질이 숨 쉴 틈 없이 몰아친다.
힘을 실어 쓸어내리고, 눌러 두드리고,
섬유의 결을 다스리는 과정이 반복된다.
부드러움과 매서움이 번갈아 오가며
종이는 오래 버티는 구조를 갖는다.
과정을 지켜보면
글씨는 고요하게 쓰이지만
그 뒤에서는 매섭게 두들겨 정신 들게 하는 일종의 담금질이 몇 번이고 반복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며칠 동안 몸살과 오한에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 앓았다.
첫 기침이 기세라고,
부정하면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상한 믿음으로 계속 비타민 메가도스를 외치며 한 움큼 때려먹고 버텼다.
심지어 어제는 몇 년 만에 하이부츠를 신고
해방촌 핫하다는 바들을 돌아다니며 먹고 마셨다.
온몸이 보이지 않는 주먹과 빗자루질에
골고루 다져지는 체험을 하고 나니
어쩐지 모든 관절이 바로 펴지고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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