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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냥 Aug 28. 2023

아직은 갈급하지 않은 여행 생각

그러나 몸은 여행 준비 중

영화는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준다. 평론가는 비평이란 이름 뒤에 숨어서 자기 결핍을 드러낸다. 이건 이래 저건 저래 라는 얘기는 들으면 이들도 결국 남한테 하지 못한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이들에겐 영화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말은 하고 싶은데 트리거가 없는 별 볼 일 없는 인생에, 두꺼워진 전두엽으로 떠들고 싶은 말은 많은데 딱 영화가 제대로 부추겨줬구나.. 그런 생각. 영화 아니었음 저렇게 떠들지는 못했을 거야...라는 생각도.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는데 평론가들 말에 질려 보기를 관두고 났더니 심술이 난다.


프랑스 가서 공부해 볼까,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영화 참 미치도록 좋아했는데, 지금은 1년에 한두 편 정도 본다. 어느 순간부터 영화가 지루해졌다. 안 지루할 거 같은 영화를 골라골라 보다 보니 많이 봐야 1년에 한두 편 보게 됐다.  3년 전에 본 <쓰리빌보드>가 그나마 강렬했다. 올해는 3편이나 이미 봤다. <다음 소희>, <이니셰린의 벤시>, <비밀의 언덕>.


영화를 너무나 좋아하는 친구들이 집 근처 명 필름에 예매해 놓은 덕에 억지로 본 영화 <비밀의 언덕>은 진부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많은 영화가 좋다. '저는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요'라 말하는 10대 초반 여자 아이가 아슬아슬했는데, 안타깝고 슬프고 조마조마하고 그랬다. 생일이었는데, 친구들에게도 고맙고. 엄마가 미역국을 맛없게 끓였다. 엄마의 미역국이 맛없었던 건 처음인 듯. 한 살 더 먹고 나니 찝찝했다. 죽음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니 더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여행이 가고 싶다.


<비밀의 언덕> 때문인지 문득 처음 죽음을 인했을 때가 떠올랐다. 초등학생이었는데, 눈두덩이를 만지다 내 눈 주위로 동그란 뼈가 만져졌는데 그게 해골의 일부인 걸 알아채고 얼어붙었다. 내 얼굴 안에 해골이 있다... 너무 놀라서 그 무서운 해골이 내 몸 안에 있다는 것 때문에 내가 필멸의 존재임을 냅다 받아들였다. 자의식이 왜 그렇게 형성되었는지 난 내가 천잰 줄 알았고, 안 죽을 줄 알았지 뭐냐. 나약한 자존감 붙들고 조그만 영토에서 왕노릇이나 하면 딱 맞을 약간 맛 간 인간이었을 뿐이었는데.

 

뜬금없이 영화평론가 까고 생일 얘기에 미역국 맛없었던 얘기, 해골 얘기까지 왜 주절주절 하고 있냐면... 사실 여행 얘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여행을 가고 싶기도 하고 안 가고 싶기도 하다. 올해 초 터키 여행을 계획했다가 집주인이 집팔테니 나가라, 고 한 것부터 몸이 아파 받은 수술까지 오만 가지 복잡하고 꼬인 일들로 좌절했다. 큰 문제는 해결 안 됐고 아픈 몸은 잠깐 무시하기로 하고 가난하고 늙은 몸은 다를 게 없지만, 여행을 안 가도 달라질 게 없는 9월을 앞두고 있다. 게다 올해 말이면 소멸될, 유럽왕복 가능하고도 남는 마일리지가 있다. 일리지로 튀르키에까지 편도 108000원.


여행 생각, 안 하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9월부터 일을 줄이고 있다. 풉... 이게 뭔 무의식으로부터 촉발된 미필적 고의 같은 시추에이션인지, 약을 길게 달라고 의사를 조르고 낡아서 너덜너덜한 안대를 꿰매고 귀마개도 새로 사고, 여권이 어디 있지? 숨겨둔 달러 없나, 같은 걸 신경 쓰고 있다. 여행 갈 때마다 첫 준비는 늘 여행노트다. 무겁지 않고 많이 쓸 수 있고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노트를 보니 그때서야 마음이 벌렁거린다.

  

그런데 갈급하지 않다. 막 재미 붙이기 시작한 일이 있고, 합쳐서 200살 꽉 채운 엄마 아빠와 나의 시간이 있고, 하루라도 안 보면 그리운 반려견이 있다. 엄마 아빠와는 함께 있고 싶기도, 아니기도 하다. 갈급하지 않은 여행을 간다니, 여행에 대한 모독 아닌가.


돈 걱정도 크다. 한국도 그렇지만 여행지 물가가 폭발 수준이라는 얘기를 계속 듣고 있다. 여행은 돈을 써야 가능하다. 낯선 곳에서 자는데 먹는데 특별한 경험을 하는 데 다 돈이다. 돈걱정에 마음이 결정적으로 쪼그라든다.


마음이 매일매일 널뛴다. 9월에 나는 어디에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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