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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서율 Mar 06. 2024

내 낡은 티켓북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 20041015

'눈을 감고'


퇴근을 하고 밥을 먹으러 잠시 들른 동네 일본식 덮밥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낯익었다. 히라이 켄이라는 가수의 ‘눈을 감고’라는 노래. 2024년을 사는 지금 나는 2004년의 추억을 곱씹으며 3분 여동안 아주 잠깐 그 녀석의 얼굴을 떠올린다. 젠장. 여전히 마음은 그때 그대로인가.




내 기억이 맞다면 노래가 먼저 발매되었고, 그다음에 영화 OST로 쓰였던 것 같다. 노래가 발매되었을 때 나는 일본에서 수학하고 있었고, 친구인지 연인인지 모를 그 녀석도 내 주변 언저리에서 함께 ‘있었다’. 어릴 때는 세상에 참 많은 길이 있는 것 같아서, 만났다가도 헤어지고 그러다가도 다시 만나고는 했었는데 – 그 녀석과 나의 인연은 아마 2004년 벚꽃 피기 시작할 무렵 무터 아주 더운 여름까지, 딱 두 계절이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2004년 10월 개봉이었구나.



대학 4학년 마지막 학기에 용감하게 교환학생을 일본으로 갔었다. 짧은 기간 동안 수학하며 많은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 녀석은 영화론이라는 수업시간에 알게 되었다. 수업 과제는 한 학기 동안 영화 두 편 정도 보고 감상평 내기인 꿀 같은 수업을 청강으로 들었던 나는, 그때도 지금도 영화가 좋아서 100명이 있는 큰 강의실 제일 앞에 앉고는 했었다. 그 녀석은 첫 수업이 끝난 후 내게 다가와 소위 말하는 ‘번호를 따갔다’. 그 이유는 수업시간에 잘 대답하는 내 빠릿빠릿함이었을지, 혹은 아직 염색 물이 덜 빠진 내 핑크색 머리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몇 개의 영화를 봤고, 그렇게 몇 번의 데이트를 했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수많은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쏟아내며 서로의 생활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둘 다 고집스러웠고, 둘 다 몇 달 뒤 일본을 떠날 계획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만나, 그런 판타지 같은 연애가 가능하지는 않았다. 마음이 생긴 다음에 그걸 다시 도려내는 것 같은 짧고 또 긴 이별을 하고 나서 (후에 그 녀석을 우연히 다시 만난 건 운명일까. 모두 다 지난 이야기지만) 한국에 돌아와 취업 활동을 하던 나는 어떤 회사의 면접을 보고 그 복장 그대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손에는 분명, 울 것 같아 휴지 한 묶음을 들고. 대강 낮 시간의 영화관이었으니깐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열에 한 커플이 앉아있었다. 대부분의 일본 멜로 영화가 그렇듯이 이뤄지지 않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추억 영화였고, 그냥 나는 그 녀석이 생각나서 , 그리고 내 생활이 힘들어서 펑펑 울었다. 나는 그때 그런 공간과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 같다. 내 옆에 앉은 커플은 남자가 일하다 나온 모양새였는데, 계속 업무 전화가 와서 들락날락 하느라 울다 말고 자리를 비켜줬던 기억도 나고, 짜증 나서 그 여자친구를 째려봤던 기억도 난다. 그냥 나는 마음이 안 좋았다. 이별 때문에 상처받았었고 그걸 인정하기 싫어했고, 괜찮을 줄 알았으나 전혀 괜찮지 않았다.




20년의 시간이 흘러 나는 그 녀석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녀석의 친구 몇 명이랑은 지금도 연락하며 일본에 갈 일이 있으면 만나고는 한다. 살아오면서 만난 인연들로 이름 붙인 방이 있다면, 내 마음속에 그 녀석의 방은 두 번째로 클 것 같다. 어딘가 구멍 난 그 방은 아직도 이 노래가 들리면 조금은 아프다. 하지만 그런 추억들이 있는 게 나쁘지는 않다. 그걸 알고도 추억할 수 있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자랑스럽다. 마음에 있는 말은 그때 그때 해야 후회가 없는 것 같다.



'조용히 눈을, 감고 너를 생각해.'


그래도 추억이 있어서 나는 행복해. 현실을 살지 않는 것이 아니야.

이 현실을 버틸 수 있는 힘을 네가 주고 있는 거야.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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