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을 불러줘 no.1
<내 이름을 불러줘>는 31개 시군에 거주하고 있는 경기 시민들을 릴레이 인터뷰 형식으로 소개하는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 기획자는 최초의 인터뷰이만 섭외하며, 이후로는 인터뷰이가 자신의 지인 중 다음 차례의 인터뷰이를 추천하는 방식입니다. 첫 번째 인터뷰이는 다섯 번째 인터뷰이를 전혀 알지 못하지만, 어쩌면 여섯 번째 인터뷰이 혹은 열 번째 인터뷰이와는 어떤 접촉점이 있을 수도 있지요. 이런 방식으로 인터뷰이는 지인의 지인 형식으로 모두 연결되고, 우리가 사는 사회의 축소판을 구현해내게 됩니다. 본 프로젝트의 무대는 경기도이지만, 우리 사회를 이루는 이러한 방식은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는 실상,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각각의 인터뷰이는 그들 삶을 이루는 행복, 가치, 꿈, 흔들리던 순간 등을 묻는 10가지 질문에 답하며 자신의 경험과 삶을 나누고,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또 다른 모양의 길과 삶을 들여다봅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 그리고 익명으로 존재했던 이웃들의 고유한 삶을 품고 있는 도시의 다양한 얼굴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웃들의 이야기가 나를 돌아보게 하고, 다른 이의 걸어간 길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며, 불확실한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희망을 만들어갈 힌트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이름과 사는 곳은?
김포에 사는 권미영입니다.
2. 당신이 사는 도시에서 당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요?
21년 전 이곳으로 이사를 결정했던 가장 큰 이유는 논과 밭, 그리고 산 때문이었어요. 또한 서울로 출퇴근하기 멀지 않다는 것과, 절친이 살고 있고, 어릴 적 방학이면 찾아오던 외가댁이 있는 곳이라 망설임 없이 왔어요. 그때만 해도 아이들이 학교를 갈 때면 집 가까이에 학교가 없어서 논길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곤 했지요. 그러던 곳이 지금은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인구 46만의 도시가 되었네요.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28층, 베란다 문을 열면 바로 앞에 허리 휘고 야윈 외할머니 등 같은 허산이 내려다보여요. 나이 때문일까요? 초등학교 시절 제 기억 속에 허산은 엄청 크고 나무가 우거진 깊고 깊은 산이었거든요. 어릴 때 방학 때면 장사를 하시던 부모님이 어김없이 저를 외갓집으로 보냈는데, 허산을 넘어 외갓집에 걸어갈 때는 왜 그리 멀고 험하게 여겨졌는지... 그 시절 허산엔 입안 가득 뿌드드하게 떫던 개암나무 열매랑 고염 열매가 있었고, 허산 아래 외갓집 앞마당엔 국화꽃이, 집 안 벽장에는 이종사촌들과 귀신 놀이하다가 몰래 먹던 콩가루 묻힌 엿과 강정이 있었어요. 허산 고개만 넘으면 며칠은 또 그렇게 달콤한 추억이 쌓이곤 했지요.
새벽 4시, 잠을 놓쳐버린 탓에 아예 차 한 잔 마실 요량으로 일어나 앉았는데 뻐꾸기의 청아한 울음이 추억을 더욱 돋게 하네요. 그동안 정신없이 사느라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게 하는 허산이 여전히 참 좋네요.
김포지역은 3만 정도의 이주민이 함께 살고 있어요. 공장이 많다 보니 이주노동자가 많고, 줌머 난민공동체와 미얀마 재정착 난민들도 지역사회 구성원으로 꿈을 꾸고 있는 곳이에요. 여전히 논밭이 있는 도농복합지역이고, 북한 땅이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도 하죠. 어르신들과 만나 프로그램을 하다 보면 지금은 철조망에 둘러싸인 한강변이 예전엔 아이들이 놀던 모래사장이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기도 해요. 세상은 자꾸 변해가지만 지역의 문화적 다양성이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역에서 이를 위해 애쓰는 많은 활동가들을 응원합니다~~
이런 것들을 함께 고민해보기 위해 만들었던 단체 ‘다가감’은 제가 아직 김포를 떠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해요. 최근 몇 년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곳이죠. 저는 요즘 다가감을 생각하면서 내가 얼마나 옳았는가 보다는, 내가 함께 하는 이들의 생각을 읽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에요.
3. 어떤 일을 해오셨고, 지금 몰입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살면서 무엇이 되겠다거나 먼 훗날의 계획을 긴 안목으로 세워본 일도 없이 지극히 단순하게 지금, 여기, 눈앞의 일과 사람에 집중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누군가는 그런 나를 무모하다고 하고, 용기 있다고도 하고, 하고 싶은 대로 산다며 부러워하기도 하죠. 근 30년을 잡지사 기자로, 농사꾼으로, 시민단체 활동가로, 대안학교 교사로, 중도입국 청소년을 만나면서 그리고 지역교육활동가로 살았어요. 내게는 그 일들이 만나는 사람들만 다를 뿐 모두 같은 일의 연속이었어요. 내 마음을 잡아끄는 일이 있다면 내 깜냥을 따져보거나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지 않고 갈등 요소를 아예 마음에서 없애버렸죠. 그런 일들이 제게 즐거움만을 준 것은 분명 아니었을 테고 얼마만큼 의미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지향이 같은 사람들과 만나 뭔가를 도모하는 일을 참 좋아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아요.
스무 살에 마오쩌둥 책에서 ‘공독’이라는 단어를 발견한 이후로 언젠가는 나도 함께 노동하며 함께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었죠.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 꿈은 변하지 않을 거 같아요. 혼자 하는 일보다 ‘함께’ 하는 일은 오히려 더디고 갈등도 만만치 않지만, 서로서로 배우면서 덜어내고 채우는 관계는 매력이 있죠. 최근 몇 년 동안 다문화, 다양성, 평화를 화두로 교육 활동을 한 것도 그런 생각이 전제되었어요. 하나의 교안을 준비하기 위해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고 고민했던 시간만큼 나도 함께 성장할 수 있었고, 청소년들을 만나는 일은 늘 제 삶과 생각에 신선한 자극과 동기를 부여했죠.
그러다 작년 겨울쯤부터 조금은 긴 슬럼프에 빠졌었어요. 원래는 덤벙이고, 허당이라 좀 천천히 쉬어가며 돌아다보고 충전도 해야 하는데, 그럴 여유를 갖지 못하다 보니 마음도 몸도 소진이 되더라고요. 때로는 지역 기관과 함께 일하면서 마치 내가 위탁 근로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죠. 하루가 넘 짧다고 느낄 정도로 지역 사람들과 이러저러한 일들을 작당하기도 했는데 그런 것들이 그냥 사업으로 끝나버릴 때,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헛헛함이 느껴질 때... 그런 시간이 반복되다 보니 조금 지치더라고요. 아마 활동가라면 누구나 이런 슬럼프를 겪지 않을까 해요. 무엇보다도 나는 지역에서 함께 고민하고 의기투합할 동지를 만나고 싶었던 거 같아요. 생각해보면 나는 아무런 보상을 해줄 여력도 없으면서 “함께”를 강조하며 꼰대 짓을 하고 있던 거 같아요. 다양성, 평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살아온 역사와 삶의 방식이 다른 활동가들에게 나는 유연하지 못했고, 때론 누군가를 원망하는 일로 나 자신을 달래고 있더라고요. ‘아~ 이건 위험신호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치 ‘고인 웅덩이’를 열심히 채우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올 상반기 코로나로 힘든 분들에게는 죄송한 얘기지만 제게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시간이 되었어요. 틈틈이 그동안 미뤄뒀던 보고서와 논문을 쓰면서 지역 교육활동을 돌아볼 수 있었고, 지행합일이 되지 못하는 삶이 건강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럼 바꿔야 하고,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멈춰야지요.
요즘도 여전히 교육활동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틈틈이 한두 달에 한 번씩 전국을 다니며 인터뷰 기행을 하고 있어요. 여성농민운동을 하면서 만났던 1세대 선배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이지요. 여성운동사, 여성농민운동사는 이미 발간이 되었지만 무엇을 했는지보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당사자 그녀가 직접 말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해 보였어요. 당사자의 ‘말하기’는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삶을 공적 활동으로 바꾸어 가는 일이고,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 과거의 묵은 감정들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올초부터 여행 겸 시작했는데 아직은 차분히 글 쓰는 일에 몰입하고 있지 못하고 있네요. 감히 몇 줄의 글로 담아낼 수 없는 그분들의 삶이기에 실은 부담도 되고요.
4. 무엇이 당신의 생각과 행동에 영감/영향력을 주나요? 혹은 그런 사람이 있나요?
진정성 있는 사람,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만큼 설레는 일이 있을까 싶네요. 제가 좀 둔하고 건조한 사람인데요, 그런 내 마음이 막 설레고 뜨거워질 때가 있어요. 특별히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거나 책을 읽다가, 혹은 영화를 보다가 누군가의 삶에 뭉클해질 때가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든 내 삶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이 들어요.
5. <나의 컬렉션> 당신이 아끼는 7가지 아이템으로 당신의 취향을 소개해주세요.
이 질문 의외로 어렵네요. 나의 모든 것을 탈탈 털어봐야 할 거 같아요ㅎㅎ. 내가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에 대해 이렇게 집중해보다니... 잠시 생각해봤는데 특별하게 아끼는 것들이 떠오르지 않아요. 무언가를 소중히 생각하며 살지 못했나 봐요 ㅠ
아낀다기보다는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몇 가지를 생각해보면 아주 가끔 힘들 때 열어보는 가족앨범, 장구와 쇠(특히 굿거리장단 칠 때), 그리고 커피랑 소주를 좋아하고요. 일의 근거를 찾게 해주는 책들, 예를 들면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전우익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와 같은. 영화로는 '델마와 루이스'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데, 우리는 살면서 자신을 너무 억누르며 살 때가 많잖아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몰입이 돼서 펑펑 울었어요. 그것이 끝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할 것 같은 아쉬움도 있었고요.
6. 일상에서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일중독이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방해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에 몰입할 때를 즐기는 편이에요. 코드 잘 맞는 누군가와 만나 대화하면서 “아, 그래그래, 그거야!”라며 소통이 잘 될 때, 특히 어느 땐 코드가 맞는 듯하다가도 알다가도 모를 30년 지기 남편과 함께 소주를 마시면서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일, 청소년들을 만나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 누군가의 삶이 기특하고 아름다워서 뭉클할 때, 주로 사람 만나는 일을 하다 보니 사람 속에서 행복감을 느낄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내가 꼰대임을 늘 상기시켜주는 아들 딸로부터 괜찮은 엄마라는 소리를 들을 때는 세상을 얻은 듯이 뿌듯하고요 ㅎㅎ
아주 가끔 집안일이 산더미처럼 쌓였어도 불편한 마음 없이 그냥 뒹굴거리며 책 읽거나 드라마 몰아서 볼 때, 휴대폰 꺼놓고 하루 종일 연습실에서 장구랑 쇠를 치면서 붙박이로 지내는 일, 어쩌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걸 즐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침 일찍 하우스 문을 열었을 때 흙냄새와 함께 꼬물꼬물 땅을 비집고 나오는 모종들, 물도 주지 않았는데 화분에 떨어진 다육이 잎이 뿌리를 내린 것. 그렇게 기특하게 알아서 뿌리내리고 열매 맺는 것들을 보는 것도 좋아해요.... 잡지사 다닐 때 기사화했던 내용이 국가보안법에 걸리면서 보수적이던 가족의 감시(?)가 극에 달했을 때 편지 한 장 달랑 써놓고 집을 나왔는데, 그날 가까이 사는 선배의 오토바이를 타고 새벽을 가르던 해방감! 쓰다 보니 일탈이 주는 행복도 있네요.
7.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나 원칙이 있나요? 그것을 얻게 된 계기가 있나요?
8. 인생을 살며 큰 변화가 있었던 일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고 그로 인해 무엇이 바뀌었나요?
(7,8번 공통으로 대답할게요) 혼자 농사를 짓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서울에서 시민단체 활동하느라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던 때, 단체의 프로젝트를 위해 전북 순창을 갔던 적이 있어요. 농한기면 장에 나가 생선을 팔곤 하던 여성농민 한 분이 팔고 남은 생선 머리를 귀하게 튀겨서 올려주신 황후의 밥상 때문이었다고나 할까요. 제 고민은 좀 더 빨리 행동으로 이어졌고, 충북 제천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남자(지금의 남편)를 만나 두 아이를 낳고 5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살았어요.
그 와중에 방 한 칸을 내어 동네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만들었어요. 학원은커녕, 농번기면 학교가 끝나자마자 일손을 도우러 논밭으로 향하는 아이들이 언제든 와서 함께 공부도 하고 책을 읽을 수 있는 ‘민들레 공부방’을 열었는데 처음엔 좀처럼 마음을 트기가 쉽지 않았어요. 동네 사람들이 산에 고사리 뜯으러 가면 따라나서고, 동네 천렵(물놀이) 가는 날이나 동네 관광 가는 날은 어김없이 틈에 끼어 관광버스 춤을 추어대던 시간들이 한참을 지나서야, 집에서 기르는 콩나물이나 집 두부를 아이들 손에 들려 공부방으로 보내곤 했지요.
그러다가 마을 사람들과 서울 농민대회에도 함께 나서고, ‘얼굴 허연 서울 학출이 얼마나 버티나 보자’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는 말을 웃으면서 할 정도로 스스럼없는 관계가 될 즈음, 남편 건강 문제로 서울로 와야 했어요. 내 땅 한 뙈기라도 갖고 싶은 꿈을 이루기는커녕 영농 빚을 진 채, 일하는 만큼 평등하게 대접받고 서로서로가 덜어내고 채우는 농사 공동체를 이루겠다는 뜻도 부채로 남긴 채로.
그 이후로도 김포에서 서울로 왔다 갔다 하며 낮엔 단체의 활동가로, 저녁엔 생계를 위해 논술과외를 하면서 바쁘게 살았지만 현장을 떠났다는 부채의식에서 자유롭지를 못했어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죠. 신기한 건 그 시절 그런 고민들이 늘 내게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내 청춘을 다 했던 그 시절의 그런 고민이 아마도 삶의 철학이나 원칙 같은 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불의에 침묵하지 말고 신심대로 살되 ‘삶의 맥락을 이해해주는 사람’으로 살자는. 너무 거창한가요? ㅎㅎ
9. 언젠가 이루고 싶은 모험, 꿈이 있나요? 그것을 위해 현재 준비하고 있는 게 있나요?
글쎄요. 다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고, 공부도 하고 좀 더 생태적으로 살아볼 요량으로 이것저것 고민 중이에요. 언젠가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당장은 뭔가 욕구가 넘쳐날 때까지는 천천히 가고 싶어요.
10. 삶에 흔들리는 순간들에서 당신을 지켜주는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늘 흔들리는 삶입니다. ㅎㅎ 어쩌면 나는 가족들에게 이기적인 딸, 동생, 아내, 엄마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 그래도 마음먹은 일은 꼭 해야 하는 나를 믿어주는 가족이 있기에 일상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을 만나도 늘 으쌰으쌰하고, 잘못한 일에는 따끔한 비판도 서로 존중해주는 오랜 지인들이 내게는 ‘든든한 빽’이에요.
다음 인터뷰이를 소개해주세요.
이태옥, 최현정을 소개합니다. 태옥 씨와의 인연은 30년이 되었네요. 농민운동을 함께 한 동지이기도 하고 현재는 탈핵과 사드 반대를 위한 현장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에코페미니스트랍니다. 현정 씨는 저와 함께 이주민 관련 활동과 문화다양성 교육 활동을 하는 활동가입니다. 그림책 활동을 하다가 문화다양성, 평화를 화두로 교육활동을 하게 되면서 최근엔 늦깎이로 대학원 공부도 시작하게 됐는데, 현정 씨의 고민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인터뷰에 응해주신 권미영 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