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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우리 Aug 27. 2022

소리 내어 웃고 소리 없이 울게 만드는 문장들

무언갈 좋아하다 보면 더 이상 관객으로 남을 수 없는 때가 온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게,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일기의 단골 소재는 꿈이었다.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 되고 싶은 것을 생각 나는 대로 적곤 했다. 뭐 하나 진득하게 하는 건 없지만, 특별히 못하는 것도 없이 두루두루 평균은 했다. 그래봤자 애매한 재능과 솜씨였지만.



관심사가 다양한 만큼 변덕도 심했다. 다행히 천성에 딱 맞는 직업을 찾았다. 매거진 에디터였다. 어릴 때 적은 꿈 목록 중 '나의 이름을 걸고 글 쓰고 사진 찍고 그림 그리며 살고 싶다'도 있었는데, 에디터로 일하며 그 꿈을 얼추 충족하며 살고 있다.



매체 소속 에디터라고 한들 기사 수만 정해져 있지, 매달 다른 주제와 콘셉트의 콘텐츠를 만들었다. 프리랜서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브랜드 일을 동시에 하는지라 매번 새로 공부해야 했지만 그래서 좋았다. 아침엔 와인에 대해 쓰고, 저녁엔 패션에 대해 썼다. 다음날은 모델과 스틸 촬영을 하고, 그 다음날은 영상 콘티를 만드는 식이었다.



일하며 사진과 글을 매일 같이 다루다 보니, 어린 시절 가졌던 애정과 달리 어느새 애증의 관계가 되어 있었다. 잘하고 싶은데 어렵고, 어려워서 더 재미있는. 한편 그림에 대한 꿈은 저만치 구석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존재감은 희미했지만 그만큼 안전한 꿈이었다. 그러다 친구의 전시를 보러 간 어느 날, 일상에 치여 잊고 있던 꿈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화실을 등록했다. 처음엔 그저 그림을 그렸다. 판단 없는 그림을 그리리라 다짐하며 캔버스를 채워나갔다. 하지만 목적 없이 그리는 낱장의 그림은 모아지지 않고 흩어지는 부스러기 같았다. 그저 그리기 위해 그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전시반을 등록했다. 발행을 목표로 한 글과 독자 없는 글이 다르듯, 그림도 봐줄 이가 필요했다.



두 계절 동안 전시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그림을 벽에 걸었다. 여러 작가들과 함께 진행하는 단체전이라, 무명작가인 내 그림도 많은 관람객들이 봐줄 터였다. 다행히 코로나도 한풀 꺾인 시기였다. 흰 벽, 조명 아래 놓인 그림 여섯 조각은 내 것임에도 생경했다. 관람객들의 동선을 상상하며 그림 앞에 섰다. 작품과 작품 캡션만 배치된 다른 작가들과 달리 나의 그림에는 글이 함께 놓여 있었다.



⌜Acrylic on Canvas. 캔버스에 물감을 얹듯

Pages on Canvas. 그림에 글을 싣는다.



나를 스쳐간 투과한 마음을 문장으로 엮어 색으로 담아.



그림 앞에 비치된 글을 함께 읽어주세요.

그림과 글을 하나의 작품으로 감상해 주세요.

말 그대로 'Pages on Canvas'랍니다. ⌟




전시를 준비하며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그림의 시작과 완성에 스스로 납득할 만한, 감상하는 이들을 납득시킬 만한 당위성이 필요했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기에 앞서 왜 그리고 싶은지 끊임없이 되물었다.



마침표와 느낌표로 끝맺는 답을 찾는 과정에서, 감각하고 표현하는 시야와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 질문과 답은 그림만으론 글만으론 표현하기 부족해, 부족한 나를 메우려 그림의 빈틈을 글로, 글의 빈틈을 그림으로 채웠다.



전시 준비 중 받은 질문이 있다. "오늘 작품 하나 끝냈어. 이제 하나 남았어."라는 나의 말에 되돌아온 질문이었다. "작품을 '끝냈다'라는 건 어떻게 결정해?" 그러게 말이다. 나의 경우엔 '더 손볼 게 없다'였는데 그건 완벽이나 완성이 아닌 '더 해봤자다'라는 포기 선언에 가까웠다. 전시장 벽에 작품을 설치하면서도 아쉬운 점만 눈에 들어왔으니까.



자신의 작품은 언제나 미완일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고 그게 곧 완성이다 싶었다. 세상에 내놓은 것만으로도, 이대로 내 품에서 떠나보내는 것만으로도 후련했다. 자랑스러운 결과물은 아니지만 마음껏 감상하고 평가하길 바랐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글을 쓴다. 전시 준비하며 달라진 마음과 몸으로, 그림과 마찬가지로 글도 내 품에서 떠나보내고 싶어졌다. 일에서 다루는 글이 목적과 타깃이 뚜렷한 정보성 혹은 홍보성 글이라면, 세상 어딘가에 가닿을 걸 기대하고 풀어놓는 나만의 이야기도 쓰고 싶었다.



무언갈 좋아하다 보면 더 이상 관객으로 남아있을 수 없는 때가 온다. 몸이 근질근질하고 무대에 오르고 싶어지는 거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르는 에세이. 소리 내어 웃고 소리 없이 울게 만드는 문장들.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웃음과 눈물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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