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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우리 Apr 06. 2022

에세이 | 맨발의 삶

길과 그늘


돈독이 잔뜩 올라 있던 2021년 여름이었다. 국내 주식으로 재미를 본 뒤 미국 주식도 도전해볼 참이었다. 미국 주식 스터디 비슷한 유료 온라인 워크숍을 신청했다. 매일 올라오는 게시물로 미국 주식의 기본에 대해 공부하고 매일 주어지는 과제를 완성해 제출해야 했다. 다부진 의지로 시작한 워크숍이었지만 2주차에 접어들자 공부도 과제도 며칠째 밀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노트북과 필기구를 싸 들고 집 앞 카페로 향했다.


카페 요호는 그럴 때면 찾는 곳이다. 해야 하지만 하기 싫은 일을 집중해서 하려 할 때, 가방에 한가득 필요한 걸 챙겨 가면 되는, 집에서 1분 거리의 카페. 널찍한 1, 2층엔 각각 베이커리 카페와 브런치 카페가 있어 음료부터 식사, 디저트까지 한 곳에서 해결할 수 있다. 심지어 술도 판다(중요). 


좋아하는 자리는 2층 창가. 카페 안 사람들을 등진 채 통창과 바짝 마주 앉아 바깥 풍경을 보며 먹거나 마신다. 일기를 쓰거나 일을 한다. 이날은 밀린 워크숍 과제에 열심이었다.


창밖엔 여름이 가고 있었다. 그새 하늘은 짙어지고 햇살은 덜 눈부셨다. 공부는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길 구경, 사람 구경이 어찌나 재밌는지. 이게 다 가을이 오기 때문이라고 핑계 대며 한참을 바라봤다. 사거리의 횡단보도를 내려다보며 지난주와 또 달라진 사람들의 옷차림에 다가올 계절을 실감했다. 하나둘 차들이 멈추고 사람들의 발이 움직였다. 잰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무리 사이로 유독 다른 리듬의 걸음이 눈에 띄었다.


5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캐리어와 빵빵한 비닐봉지 여럿을 두 손으로 낑낑대며 끌고 있었다. 가만 보니 마스크를 끼지 않았다. 바이러스가 옮을 거리는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아무리 밖이어도 마스크는 써야지.’ 아저씨의 양 어깨가 번갈아가며 크게 기우뚱했다. 한쪽 다리를 절뚝이는 모양이었다. 다리를 따라 시선을 내리니 까만 발이 보였다. 맨발이었다.


꽤 긴 보행자 신호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반대편에 다다른 아저씨는 고깃집 담벼락 그늘 아래 철퍼덕 주저앉았다. 숨을 고르며 손부채질을 했다. 햇빛에 그을린 얼굴과 손발. 제아무리 가을이 코앞이라 한들 한낮엔 여전히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것도 역병이 창궐한 여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런 아저씰 흘깃 쳐다보거나 뒤돌아 재차 보거나 빙 돌아 피해 갔다.


바로 며칠 전, 유명인의 자살 소식을 접한 뒤였다. 익숙해지기 싫지만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흔하디 흔한 부고였다. 누군가는 사는 게 힘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누군가는 길에서 사는 한이 있더라도 생을 이어간다.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각기 다른 선택이다. 왜인지 나는 길에서 사는 일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고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의 삶에 함부로 우는 건 너무나도 쉽고 비겁한 일이다.


지갑을 챙겨 카페를 나섰다. 맞은편 하모니마트에 가 장바구니를 집었다. 맛있으면서 건강한 음식과 한여름에도 상하지 않을 간식을 몇 챙겼다. 물과 주스도. 이리저리 슬리퍼를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해 대신 적당한 사이즈의 욕실화를 담았다. 계산하려고 보니 계산대 옆 마스크와 살균 물티슈가 보였다. 마스크 한 박스와 살균 물티슈 몇 통을 집었다. 묵직한 봉투를 든 채로 횡단보도 앞에 섰다.


건너편에 아저씨가 보였다.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혼잣말을 하고 있는 아저씨. ‘미친 사람이면 어쩌지. 괜한 해코지당할 수도 있어. 장본 건 그냥 집에나 가져다 둘까.’ 덜컥 겁이 났다. 신호등이 바뀌고 길을 건넜다. 한 걸음 한 걸음 망설임이 배어 있었다. 잰걸음의 사람들 사이 다른 리듬의 걸음을 눈치챈 아저씨가 고개를 들었고 눈이 맞았다.


“안녕하세요. 음식이랑 몇 가지 샀어요.”

“감사합니다.”


방금까지 큰 소리로 떠들던 아저씨는 허리를 숙이며 정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직 초록 불인 횡단보도를 서둘러 건너 카페로 갔다. 돌아온 자리엔 경제 책과 주식 창, 재테크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두 손으로 끌 수 있는 짐이 전부인 아저씨와 더 큰 집이 더 좋은 차가 더 많은 물건이 필요해 불로소득을 벌겠다며 돈 써가며 공부하는 나. 경제용어와 각종 숫자들 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봉투 깊숙이 손을 넣어 휘적이며 한참을 물건들을 살피던 아저씨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물부터 마시려나. 배고플 테니 음식부터 먹을까.’ 아저씨 손에 든 건 물티슈였다. 물티슈를 한 장 꺼내 열심히 손을 닦고, 다음 한 장을 꺼내 다시 또 손을 닦았다. 한참을 손과 몸만 닦는 동안 경찰차가 신호에 섰다. 차에서 내린 두 명의 경찰이 아저씨에게 다가가 뭐라 뭐라 말했다. 아저씨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자리를 옮겼다. 그늘 밖으로, 나의 시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스크와 욕실화를 장착한 아저씨의 걸음은 이전보다 빠르고 힘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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