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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 Aug 05. 2019

오늘도 못난 자식은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3

엄마, 자식은 처음이라

그 날 이후, 부모님의 모든 지원은 일절 끊겼다.


'그만둘까.'

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이유는 여러가지고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고작 하난데 끝없이 고민했다.

당시 대단한 학교를 간 건 아니었지만

'고졸보단 대졸이 낫다.'

비록 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에겐 학벌중시 사회가 남아있다는 시선이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기술이 없으면 남들하는 기본은 하자.


나는 휴학을 선택했다.

남들 휴학해서 어학연수에 스펙 쌓을 동안 나는 알바를 했다. 알바-직원-매니저까지 진급하다 돈을 모으고 복학을 위해 그만뒀다.

휴학 후 이년 동안 별 다른 공부도 안했는데 더이상 부모님은 뭐라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그, 심성은 착하겠으나 꼴통같던 남자친구와 헤어졌으니 다행이라 여겼을 수도 있고,

따발총이 마구 그려진 F학점에 큰 충격으로 포기를 하신 걸 수도 있고,

것도 아니면 동생이 고등학생이라 관심이 옮겨가서 그런 걸 수도 있다.


당시 내가 마구 어긋날 때, 그녀도 괴로움에 여기저기 조언을 얻으며 힘들어했다고 지인에게 들었다.

'걱정말라고, 00이가 그럴 애도 아니고, 어릴 때 잠깐 방황하는 것 뿐이라고. 그러다 나중에 정신차려서 더 열심히 한다고. 나도 그랬다 등등...'

그녀도 나처럼 주변의 숱한 조언으로 괴롭고 위태로운 마음을 위로받고자 했겠지만 결국 답은 하나였을 것이다. 나는 그 답이 믿음이라고 생각드는데,

과연 뭐였는지 다음에 물어봐야겠다.



복학 후 걱정과 달리 나는 매우 잘지냈다.

지난 맘고생을 보상이라도 받는 것처럼 후배들과 복학한 동기, 선배들과 어울려 대학생활을 즐겼다.

우리끼리 동아리를 만들어 밤새 아마추어 독립영화를 찍기도 했다.

외국인만 받던 기숙사가 증축되며 재학생을 선착순으로 받았다. 기숙사에 입주하며 타과 학생들과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이른 막차 걱정없이 술자리도 즐기고 학교 축제도 즐겼다.

돌이켜봐도 정말 행복했던 순간이다.

단, 그동안 뿌려놓은 F학점을 거두느라 계절학기를 가득 채워들어야 했던 단점만 빼면.


정신없이 흘러가는 대학생활 중 내가 처음으로 그녀를 이해한건 아마도 스물셋-넷이었던 것 같다.

학교 근처 삼겹살 집에서 나보다 한 살 더 나이많은 친구와 술 한잔 하다 가정사 얘기가 나왔다.

'엄마는 남들한테 가선 날 사랑하는 척,

온갖 내 걱정 해대면서, 정작 나한텐 말도 안해.

난 엄마랑 마음을 나누고 싶은데,

그게 하찮다고 생각하나봐.

본인은 학원에 과외에 대학까지 보내줬으면 고마운줄 알라며 뒷바라지가 전부라고 생각한다고.

나는 엄마가 날 사랑한다고 느껴본 적이 없어. '

이렇게 말하면 항상 '니네 엄마 진짜 너무하시다.'

혹은 '너 힘들었겠다.' , '우리 엄마는-' 하고 대화가 이어졌던 것 같다.

그런데 친구에게 나온 대답은 새로웠다.

'너 첫 딸이잖아. 너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기 때문에 서툴어서 그럴거야. 생각해봐.

너네 엄마도 네 엄마이기 전에 여자라고.'

나는 그동안 그녀가 엄마니까. 엄마이기 때문에.

당연히 엄마가 설거지하고 엄마가 빨래하고 엄마가 청소하고 엄마가 밥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해야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한 번 심부름도 하고, 집안일 도와주는 그 정도.

'먹여주고 재워주고 키워줬으면 고마워하라고? 그건 당연히 부모의 의무 아냐?'

나는 아주 뻔뻔하게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갑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녀에게

'엄마. 내가 처음으로 엄말 이해한 계기가 있는데-'

하며 얘기를 꺼내자 뭉클한 가슴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 이후로 완전히 개과천선한 딸이 된 건 아니다. 그랬으면 엄마와 딸로 태어나지 못했겠지.


잠시나마 기숙사 생활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은 정말이지 평화로웠다. 어정쩡한 코스모스 졸업 탓에 가족과 함께하는 졸업식은 고등학교 이후로 끊겼다.

씁쓸하지만 내가 지고가야 하는 선택의 결과였다.



나는 휴학동안 시궁창같던 딜레마를 극복했다.

처음엔 누가 내 이 괴로움을 도와줬으면.

고민상담도 하고 조언도 듣고 답을 찾아 해맸는데,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답이 없는 이유를.

답은 나에게 있었다. 때문에 결정도 내가 했다.

괴로움이 시궁창 아래 저 밑바닥 없을 무에 닿고, 더이상 잃을 것도 없으니 '해야겠다.' 발돋움을 할 수 있었다.

다들 겪는 삶의 딜레마가 나는 조금 빨리 온 것 뿐이라고 위로했다.

'내 인생 매순간 최종 결정권자는 나다.'

라는 뻔한 의미를 새롭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던 '꼭 밑바닥을 겪을 필요는 없다, 남들은 그런거 안해도 잘 먹고 잘 산다.'

말도 무슨 의미인지 바닥을 찍고나서야 알게됐다.

나는 첫 딜레마로 인생이라는 물 속에서 완전히 가라앉지 않는 법을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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