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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bin Son Feb 02. 2020

60대 엄마들도 공유할 취향과 꿈이  있다.

장금자 프로젝트의 시작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써봐야겠다고 결심한 마음은 10년 전 교양 과목 [여성학] 수업의 리포트에서 시작되었다. 중간고사 과제로 '여성으로서의 엄마'라는 주제의 리포트를 제출하는 것이었는데, 나에게는 인생 과제로 기억이 된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눈물 콧물 훌쩍이며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엄마를 한 개인으로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살면서 얼마나 있을까? 그 귀한 기회를 나는 교양 과목 덕에 가지게 되었고, 엄마의 인생을 한 개인으로 한 꺼풀씩 벗겨내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의 나는 25살이었는데 딱 그때 나이의 엄마는 큰 외삼촌 공부를 모두 뒷바라지하고 뒤늦게 미대에 들어갔던 나이였다. 이 사실도 과제 덕분에 엄마를 인터뷰하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25살에 늦깎이 대학생의 삶을 시작했던 엄마를 떠올려보면 그 심정이 상상이 가면서 좀 가엾다. 얼마나 공부를 하고 싶었으면 그 늦은 나이에 대학을 갔을까. 하지만 만학도였던 엄마의 꿈은 결혼하면서 다시 고스란히 접힌다. 엄마는 아빠를 중매로 만났는데 아빠가 영 자기 취향이 아녔단다.(아빠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죄송합니다만 이해는 갑니다..) 엄마는 음식을 무척 가려먹고, 청결에 민감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여러 부문에서 멋을 꽤 부리는 사람이었다. 엄마의 젊을 때 사진을 보면 엄마가 상당한 멋쟁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경상도 남자로 대표되는 면을 충실하게 갖춘 아빠는 무뚝뚝하고 거친 상남자에 가까웠다. 멋보다는 의리, 아내보다는 친구가 우선이었던 아빠랑 엄마가 만났으니 그 전개는 짐작이 간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데이트는 늘 투박한 음식점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루는 데이트 중에 음식에서 머리카락이 나와서, 놀란 엄마는 한 입 먹고는 먹던 것을 멈추고 (소극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냈다고 한다. 무던한 성격의 아빠는 배가 안 고프냐고 묻고는 엄마의 남은 음식까지 가지고 가 홀라당 비었다고 한다. 지금 태어났으면 아빠는 인기가 참 없었을 것 같다. (몇십 년 전의 이야기일 텐데도 엄마는 살짝 찡그리며 이야기하시고, 아빠는 기억에 없는 일이라 한다...ㅎㅎㅎㅎ )

미대생이었던 엄마의 솜씨는 직접 만든 옷에서 나타난다. 천연 염색과 수놓기를 사랑하는 그녀.


엄마는 아빠랑 맞지 않는다고 느끼고, 결혼을 하지 않을 거라고 하자 외할머니는 몇 주를 말 그대로 드러누우셨다고 한다. 드라마에 나오는 하얀 띠를 머리에 두른 채.(드라마는 역시 현실을 반영한다) 외할머니는 키도 크고 훤칠한 아빠가 현대 중공업이라는 큰 회사에 다니니 딸이 놓쳐서는 안 될 신랑감이라고 생각하셨고, 본인의 딸은 노처녀에 가까워진 나이에 까탈스러운 취향을 가진 별난 여자라 빨리 해치워야 할 숙제처럼 생각하신 것 같다. 그 당시 엄마는 28살이었는데, 외할머니는 동네에서 흠있어서 결혼을 못 간다고 소문이 난다며 일생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결혼을 마치 중고시장에 물건을 팔 듯, 엄마의 취향과 욕망을 한쪽에 구겨놓고 결혼을 강행하셨다. 그렇게 엄마는 결혼과 엄마의 꿈을 맞바꾸는 결정을 하게 된다.

엄마의 영향으로 공간을 샅샅이 살피는 터프가이 손진규 씨 (아빠)


기억력이 좋은 오빠가 엄마가 버린 꿈을 시각적으로 기억하고 이야기해준 것이 있다. 오빠가 6살 되던 해에 엄마가 화구를 쓰레기로 밖에 내놓았던 장면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오빠는 그 날을 엄마가 꿈을 버린 날이라고 했다. 오빠와 내가 서른 살이 넘으면서 엄마라는 말 대신 '장금자 씨'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개인으로서 잃었던 엄마의 욕망을 복원하기 위한 작은 노력의 시작이었다.



엄마의 꿈을 복원하는 금자 씨의 작은 부엌


아내이자 엄마가 되면서 그녀의 꿈은 펴보지도 못하고 접혔지만, 그럼에도 엄마에게 작은 놀이터가 있었다. 아파트에 내내 살았던 엄마는 아주 작은 시골집 하나를 매입해서 매 주말 그곳에 가서 장도 담그고, 불도 피우고, 꽃밭도 가꾸셨다. 집밥에서 지분이 컸던 채소는 모두 엄마가 그곳에서 키운 것들이었다. 음식에 민감한 엄마는 시중에 판매하는 된장 고추장 간장을 사 먹기 싫어서 (외할머니는 요리에 재주가 없으셔서 엄마의 김치와 장을 오히려 가져가신다.) 시작한 일이기도 하지만, 엄마 삶에서 숨통 트이는 공간이 하나 필요했던 것 같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주말마다 낡은 시골집으로 데려가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해, 시골집에 가자고 할 때마다 정말 귀찮아한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는 자신의 취향과 호기심의 세계를 그 시골집에서 지켜내고 싶어셨던 것 같다. 그리고 꾸준히 그 시간을 보낸 엄마의 30년의 세월이 엄마의 요리 실력과 장맛으로 쌓인 것 같다.


비록 이름 있는 셰프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장인의 태도는 프로페셔널하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와 삶을 대하는 태도에는 다른 감동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오빠와 함께 엄마의 작은 공간을 찾기 시작했다. 그 보다 엄마가 쌓은 세월에 대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엄마가 행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빠가 공간을 찾고, 함께 공간을 기획하고, 아빠가 목공을 직접 해서 지금 '금자씨 부엌' 을 만들었다. 전문가의 손 없이 진행한 데다, 네 식구 모두 공사다망한 관계로 월세를 2개월 반을 그냥 주면서 천천히 공간이 만들어졌다. 늦게, 그리고 덜 멋지더라도 이 과정에서 엄마도 아빠도 재미와 보람을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우리는 큰 간섭을 하진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이었다. 퇴직 후 목공을 배운 아빠는 이 과정에서 굉장히 놀라울 정도로 목공 실력이 느셨고, 엄마는 온전히 자신의 이름을 건 작업 공간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장금자'라는 이름을 안 좋아하는 엄마가 자신의 이름을 '장희영'으로 바꾸고 '희영이의 공간'으로 이름 붙이고 싶어 했지만, 설득 끝에 장금자라는 이름으로 공간이 등록되었다. 그렇게 2019년 8월 무더운 여름 엄마의 이름으로 작업 공간이 열렸다.


원래 명인 종합 건축 설비였던 공간이 아빠의 손을 거쳐 간판도 없는 금자네 부엌으로 탈바꿈
엄마가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작은 공간
여름 내내 고생했던 1년 차 아마추어 목공수, 아빠의 작업 모습


장금자 첫 번째 프로젝트, 건강 클럽

부엌이 열리고 지인들이 많이 찾아왔고, 지인들의 친구들이 또 찾아와 줬다. 엄마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겠다고 오는 지인들마다 선물과 덕담을 한 아름 준비해주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처음에 엄마가 즐거워했던 것은 나 같은 젊은 사람들이 와서 그릇을 다 비우고 맛있게 먹고 가는 것이었다. 다만 엄마가 걱정했던 것은 젊은이들의 취향이었다.


 '이런 집밥을 요즘 젊은 친구들이 좋아하겠니? 너는 엄마 입맛에 길들여져서 맛있지'


라는 말을 많이 하셨는데, 오빠와 나는 오히려 나는 집밥이 귀한 시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료 하나하나의 질을 고려하고, 정성을 들여 끼니때마다 새로 지은 밥은 흔치 않다. 우리는 조리된 음식을 데워먹고, 부엌이 보이지 않는 식당의 밥, 혹은 고기 위주의 음식을 먹는 것이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실제로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 다녀갔고 후기들도 참 감동적이었다. 오는 사람들이 엄마의 음식만큼 감동이었다.


하지만 공간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생각했던 딸과 엄마가 함께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잘 안돼도 엄마의 욕망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작은 프로젝트가 큰 동기부여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시작한 프로젝트는 [건강 클럽]이었다. 항상 음식을 통해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고 믿는 엄마와 최근 담낭염으로 부쩍 건강에 관심이 높아진 나는 건강과 관련된 책을 읽고 있던 와중에 건강한 엄마 밥을 먹고 정신적/육체적으로 건강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강 클럽]이라는 이름의 모임을 12월에 세 번 진행했다. 가볍게 시작한 모임이지만, 엄마랑 같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나에겐 큰 의미가 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보고 [어라운드] 매거진에서 연락이 와서 얼떨결에 엄마와 촬영까지 하게 되었다. 작은 실행은 생각보다 많은 추억을 가져다주었고, 엄마는 처음보다 더 엄마의 음식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번 어라운드 매거진에 소개된 장금자 프로젝트


장금자 두 번째 프로젝트, #장금자친구클럽

가장 하고 싶었던 프로젝트는 #장금자친구클럽 이다. 우리 시대는 취향 맞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어렵지 않다. 트레바리, 프립, 남의 집 프로젝트 등 취향이 비슷한 낯선 사람들을 만나 생각을 나누고, 더 나아가 친구가 되는 경우들도 있는데, 엄마 나이 때 (50대 후반 이상의 어머니들)인 사람들은 자신과 결이 비슷한 친구를 소셜 모임에서 만날 수 있는 접근성이 매우 낮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인생을 다시 곰곰이 들여다보면, 엄마는 확고한 취향이 있었는데, 맞는 친구가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결혼한 후 엄마의 친구들 모임은 대부분 오빠 혹은 나의 학부모 모임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애초에 취향이 아니라 자식들로 묶인 그룹이었다. 엄마는 고기보다는 채식을 좋아하고, 합성 섬유를 싫어하고, 꽃을 참 좋아하고, 음악과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집에서 잠시라도 쉬는 것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도 계 모임이 여럿 있었지만, 모임 후 엄마가 집에 돌아오면 피곤한 기색으로 '나랑 참 안 맞다'라는 이야기를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만나면 연예인 이야기, 누구 가십거리, 자식 자랑을 하는 게 엄마는 비생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나의 취향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이런 말로 대신했다.


'하빈이 너는 참 좋겠다.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그거 참 인생의 큰 복이야. 잘 누려


사실 엄마 취향이 독특한 것이 아녔는데도, 평균적인 엄마 나이 또래 사이에서 별난 사람 취급을 받았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엄마가 아들 이야기를 안 하면 '너네 아들은 모해? 아들 사업 망했니?'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오빠 사업은 망하진 않았다 ㅎㅎㅎ)  그래도 평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엄마는 계모임 비를 꼬박꼬박 내면서도 일 년에 한두 번 얼굴을 내미는 것으로 갈음했다. 엄마는 계 모임에 가는 대신, 매일 음식을 연구하고, 꽃을 키우고,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보는 것을 더 좋아했다.


어쩌면 우리 엄마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비슷하진 않더라도 자신의 색깔이 강한 엄마들이 점처럼 흩어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점을 이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스타그램을 하는 딸이나 아들이 그런 엄마를 이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장금자친구클럽이라는 이름으로 취향이 뚜렷하고 자신의 꿈을 품는 엄마를 추천해달라고 했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사연을 받았다. 처음에는 아무도 안모이면 어쩌나 생각을 했는데, 감동적인 메시지들이 왔고 모집인원이었던 5명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엄마를 묘사하는 긴 메시지를 보내왔다. 마음이 뭉클했다. 본 적 없는 딸들인데도 동지애를 느꼈다.


 



신청해준 딸의 사연들 중 2개



5명의 어머니들이 모이던 2 5일. 회사를 다니면서 수없이 밋업을 하고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번 모임을 준비할 때는 정말 떨렸다. 일단 어머니들이 과연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활발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까, 혹시 불편해하지 않을까 등등 떨리는 마음으로 어머니들을 맞이했다. 어머니들은 모두 늦지 않고 등장했고 설렘이 가득해 보였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어머니들은 낯을 가리지 않고 바로바로 인사를 하셨다. 그래도 이 모임의 호스트인 내가 진행을 안 할 수 없어서 가볍게 내 소개를 하고, 자기소개를 하는 동안 음식을 서빙하겠다고 했다. 엄마가 다 요리했고, 난 그저... 그릇에 담고 서빙하는 역할만 했다. 이 모임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따님 분들이 보낸 엄마에 관한 스토리를 듣고 초대되신 거라 이야기했더니, 어머니들이 술렁거리셨다.


박 여사 : 우리 딸이.. 저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나: 네, 정말 길게 보내셨고 따님이 어머니가 어떤 취향이신지, 어떤 사람인지 보냈어요.

조 여사 : 세상에 우리 딸이 ㅠ.ㅠ


한 분이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하자 모든 어머니가 일제히 눈물을 글썽였다. 엄마 이야기를 하면 많은 딸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엄마들도 딸 이야기가 나오니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 똑같아서 깜짝 놀랐다. 분위기를 반전시켜 밥이 나오는 동안 자기소개를 할 수 있도록 장금자 여사를 먼저 호명했다. 엄마는 갑자기 일어서서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제 이름은 장금자고요..."라며 소개를 했다. 내가 앉아서 해도 된다고 하자, 엄마는 얼굴이 발그레해져서는 다시 앉으시자, 모두 소녀처럼 깔깔 웃으셨다. 모두 앉아서 한 명씩 자신의 이름과 함께 소개를 시작했다. 재밌었던 것은 어머니들이 음식이 나오면 대화하다 말고 항공 샷을 찍는다는 점이다. 한 어머니는 음식과 함께 셀피를 찍으시길래 사진을 찍어드린다고 했지만, 셀피를 좋아한다며 다정하게 거부하셨다.

항공샷과 셀피에 빠진 어머니들


처음에 밥을 먹는 동안에는 자연스럽게 본인의 이야기보다는 남편 이야기, 자식 이야기를 하셨다. 가족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지는 시간을 가지셨다. 일단 음식이 나오니 어머니들이 정신없이 음식을 드셔서 내가 준비한 음식은 아니지만 서빙을 한 입장에서 뿌듯했다. 장금자 씨가 음식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설명을 하면서 어머니들은 음식에 대해서 조밀한 질문들을 하시고, 맛있다는 말을 연거푸 하시면서 맛있게 음식을 드셨다.

음식을 담는 것만 제가 했어요.


진짜 어머니들의 이야기는 밥을 먹고 차를 드시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호스트인 내가 어머니들에게 '꿈'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리고 준비해둔 꿈 노트를 하나씩 선물로 드렸다.


"오늘은 남편 이야기, 자식 이야기, 혹은 연예인 가십 이야기하지 말고 어머니들이 자식 키우면서, 아내로 살면서 하지 못했던 꿈 혹은 어린 시절부터 가져왔는데 이룰 수 없었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 어떨까요? 오늘만큼은 어머니들이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시고, 집에 가셔서 꿈 노트에 적어보세요."


이번에는 분홍 모자를 쓴 귀여운 어머니를 호명했다. 어머니는 신나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나도 모르게 의자에 앉아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는데, 이 모임이 어쩌면 나를 위한 시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들이 살아오면서 느낀 한마디의 말들은 인생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말이었다.

미리 준비한 선물인 빨간 꿈노트


무용을 하고 싶었지만 가난 때문에 포기했던 박여사님

"5남매 중 딱 중간인데, 집이 가난하니까 하고 싶은 것 못했죠. 근데 나는 어릴 때 진짜 무용이 하고 싶었어요.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 근처에 무용학원이 하나 있었는데, 무용은 너무 하고 싶은데 할 형편은 안되니까 수업 마치고 집에 가면 맨날 그 무용학원 창문으로 구경을 하는 거야. 나는 소질도 꽤 있었거든요. 유연하기도 했고.. 아마 했으면 잘했을 텐데.. 근데 가난하니까 그냥 못하는 것을 받아들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종로 사직동 도서관에 가서 창밖을 보는데 지붕이 다 낡은 동네가 보이는 거예요. 지붕이 낡은 풍경을 보면서 이런 생각했어요. 내가 가난한 게 아니라, 이 나라가 가난하구나. 우리 모두가 참 가난하구나. 이런 걸 깨닫고부터는 내 가족의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다른 형제들은 집이 가난하니까 부끄러워서 친구도 안 데려왔는데 나는 친구들도 맨날 데리고 오고.. 난 떳떳했어요."


그림을 잘 그렸지만, 간판장이의 꿈으로 취급받았던 장여사님  

"나는 그림을 참 잘 그렸던 것 같아요. 딱히 취미는 없었는데 소질이 있었는지 그림만 그리면 상을 많이 탔어요. 대상도 꽤 많이 탔어요. 집에서는 대줄 형편도 안되고, 반대도 했는데 학교 선생님들이 화구를 사주고 대회에 나가는 것을 다 지원해줬어요. 어머니가 너무 싫어하셨죠. 그림 그리면 그때는 간판장이밖에 안될 텐데 무슨 그림이냐고 하나도 못하게 했어요. 그림 그리고 집에 늦게 들어가는 날에는 쓸데없는 짓 하고 집안 일도 안 돕는다고 많이 혼났어요. 그때 집 나와서 그림을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보면 엄마 말대로 간판장이가 되었더라도 행복하긴 했을 거 같아요"


인테리어 디자이너였지만 교수의 꿈을 접어야 했던 이여사님

"저는 3살 연상연하 커플이었어요. 그때 당시 참 늦게 결혼을 했죠. 35살에 했는데 3살 연하의 남자를 만났는데, 저의 꿈을 지원해주기보다 제가 남편을 많이 챙겨야 했어요. 미국 유학 중에 만났는데 저는 인테리어 디자인 박사를 전공하고 돌아가 교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어요. 교단에 정말 서고 싶었는데 남편이랑 시어머니가 미국에서 계속 살면서 애를 키우자 그래서 교수의 기회를 포기하고 나니, 이젠 나를 찾아주는 곳이 없어요. 오히려 학력이 높은 게 마이너스예요. 한국에 들어와서 일을 하려고 하니까 오히려 다 학력이 높다고 아무도 안 받아줬어요. 참 신기하게도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만 학력 높은 경력 단절 여성을 받아줬어요. 그래서 듀오 유부녀 직원들은 다 학력이 그 당시에 높았어요. 거기밖에 없으니까 "

엄마들이 젤 귀여워


수다 삼매경


그리고 다섯 명의 어머니들은 남은 인생을 위한 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셨다. 어머니가 자식들의 꿈을 키워주었듯 이제 자식들이 어머니의 꿈을 지원해 줄 차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이쁘게 꾸미지 못했다고 하셨던 (하지만 꾸미고 나오신 게 분명한) 박여사의 꿈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서, 죽는 순간에 그냥 요양원 방한칸에 갇혀있는 노인들이 가여웠어요. 결국 나도 저렇게 죽어갈 텐데, 적어도 죽어가는 과정에서 즐겁게 살다 가면 좋을 것 같아 사회복지사를 준비했어요. 대학원 석사 해서 1급 자격증을 땄어요. (2급은 쉬운데 1급은 어려워요!) 내 꿈의 요양원을 만들기 위해 폐교를 샀는데, 3500평 정도 되어요. (이 평수에 어머니들이 입이 쩍 벌어지고.. 나도 벌어짐. 스케일이 남다른 어머니였다) 너무 크니까 뭘 할 수 있냐고들 하는데 난 뭐든 할 거예요. 그냥 특별한 것은 필요 없어요. 그냥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 행복하다면, 그 공간에 뭐든 하면 되죠"라고 말하셨다. 난 정말 박여사의 강단과 쿨함에 너무 반해버렸다.


우아하고 감성적인, 유일하게 인스타그램으로 장금자 계정을 딸에게 먼저 보내준 김여사의 꿈

"남편이 프랑스 주재원이 되면서 프랑스에서 살면서 하나 깨달은 게, 그 사람들은 너무너무 이쁜 것을 좋아한다는 거예요. 그릇도 이쁘고 바닥도 이쁘고.. 그냥 다 이쁜 것을 좋아하는 걸 보면서 저도 이쁜 것에 관심이 생겼어요. 앤틱보다 전 빈티지를 좋아하는 타입이라, 이쁜 공간 구경하는 게 너무너무 좋아요. 그래서 지금 저는 강릉에 땅을 보고 있는데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아들이 지금 네덜란드에 있는데 아들 통해서 이쁜 빈티지도 많이 구해서 꼭 저만의 공간을 만들건대.. 장금자 친구 클럽 멤버도 다 초대할게요. 호호호

   

김여사 님은 정말 곱고 우아하셨는데, 들어오시자마자 장금자씨 선물로 핸드메이드 키친타월을, 다른 분들과 나눠 드시려고 제일 좋아한다는 레어치즈 케이크를 5조각 사 오셨다. 포장도 얼마나 이쁜지, 어머니가 만들 공간이 너무 기대돼서 나도 꼭 만드시길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김여사는 장금자씨를 금자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유명한 셰프의 이름과 같은 이름이 싫어 현재 개명신청 중인 이여사님

"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림을 배우려고 해요. 그리고 자폐증이 있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심리상담 자격증도 따려고 해요." 이여사님은 유일하게 직접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보내서 신청해주신 분인데 최근에 항상 이야기를 나누는 친언니들을 모두 하늘나라로 보내고, 언니 같은 친구들이 그립던 차에 장금자 친구 클럽을 신청하셨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런 건강한 한식을 가족들은 싫어해서 늘 이런 음식을 참 좋아했던 언니들과 왔는데 최근에 갈 사람이 없으니 첨으로 외롭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좋은 친구를 만들고 싶어 신청하셨는데 이런 음식을 너무 좋아한다고 하셨다. 앞으로 장금자 씨를 언니 삼아 자주 보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쁜 이름으로 개명하시면 꼭 다시 뵙고 싶은 멋쟁이 이여사님이었다.


금강산 백두산도 가봤는데 한라산을 못 가본 관광을 너무 사랑하는 조여사님

"어릴 때부터 나는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고 사람들이랑 놀러 다니는 것을 너무 좋아했어요. 난 뭐 하고 싶은 일이 딱히 없고 그냥 여행 다니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관광하러 다니는 것이 너무 좋아요. 나 다 가봤는데 한라산을 못 가봐서 이제 한라산 갈까 하고 있어요. 난 그냥 일하는 것 싫고 그냥 놀러 다니면서 사는 게 제일 좋아요" 어머니들로부터 가장 귀엽다는 평을 받으신 조여사님. "욜로족이네"라고 귀여운 놀림도 받으셨는데, 사실 최근에 남편을 잃으셔서 중간중간 훌쩍이시기도 하셨지만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은 분이라 참 밝고 천진난만하셨다. 우시다 가도 이내 밝아져서 다 같이 한라산 놀러 가자고 하시는 리더십을 보이셨다. 특히 장금자 씨가 일손이 필요할 때 자긴 노니까 언제든 부르라고 하셨다.


인생은 일회용이라 한번 쓰면 끝인 인생, 열정을 다해서 살고 싶다는 장금자 여사님

"나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열정도 많고 그랬어요. 지금도 인생 한 번뿐이니까 늙었어도 뭐든지 내 이름을 걸고 하고 싶다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 된장 스타트업 투자를 받으려고 정부 사업 과제의 발표를 준비하고 있어요. 아파트에서도 발효하는 짜지 않은 된장을 연구했는데, 지금 시대에 맞다는 생각을 해요. 미세먼지와 기후 온난화로 인해 된장 담그는 법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난 항상 나를 채찍질하려고 이 종이를 들고 다니는데, 이걸 볼 때마다 '금자야 할 수 있다'라고 외쳐요"


장금자씨가 너덜너덜한 종이를 가져오자 어머니들이 돌아가면서 읽으시고는 모두 사진을 찍어 가셨다. 미국의 국민화가로 불리는 '모지스(Moese)' 할머니가 남긴 말로, 75세 늦은 나이에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세상을 떠난 101세까지 모두 1600여 점의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분으로 유명하다. 삶의 마지막까지 열정으로 가득 찬 화가 모지스 할머니는 엄마의 롤모델이었다.





" 당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은 당신 자신이다.
도전하지 않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일이다.
꿈은 아이들만 꾸는 것이 아니다.
꿈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당장 실천하라. 그것이 장수의 비결이며 행복의 지름길이다"



첫 장금자 친구 클럽이었는데, 어머니들의 딸들과도 조우하고 싶어졌다. 실제로 모임이 끝난 후 메시지를 주고받은 딸들이 있는데, 다음에는 꼭 만나고 싶다. 이 모임의 간단한 결론은 '딸이 최고다'였다. 아드님들... 분발하세요. 다음 장금자 클럽에 좀 신청해주세요.


매달 장금자 친구 클럽을 꾸준히 열어, 어머니들이 자신들의 이름으로 더 많이 연결되면 좋겠다. 여름이 되었을 때 딸과 어머니를 모두 지금 부모님의 양평집에 초대하는 장대한(?) 계획도 세우고 있다. 장금자 클럽이 시니어계의 트레바리처럼 커지는 그날까지!

장금자 친구 클럽 1기. 내가 젤 신남.


장금자 식당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jang_keum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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