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유감>은 작년 초 재미있게 읽었던 <개인 주의자 선언>의 저자 문유석 판사님의 첫 책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무게감과는 달리 가볍고 짧은 글들이 주를 이룬다. 통근 시간에 짬 내며 읽기에 좋았다.
<개인 주의자 선언>을 읽을 땐 몰랐는데 저자가 거쳐간 부서가 굉장히 많은 모양이다. 그 중에서도 파산부에 있었던 에피소드와 글이 가장 인상깊었다. 작년 초 현재 더민당의 비례대표로 계시는 제윤경님의 <빚 권하는 사회, 빚 못 갚을 권리>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었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우리나라 채무자들의 현실과 약탈적 금융 구조를 다루고 있다. 당시 책을 읽고 그 동안 빚에 대해 얼마나 그릇된 관점을 가지고 살았는지 반성했던 기억이 난다.
<판사 유감> 역시 저자가 직접 겪은 재판 사례를 통해 채무자들이 빚을 갚지 못한 상황에 대해 공감하고 이를 부추긴 한국 사회의 금융 구조를 비판한다.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판사유감>의 경우 저자가 직접 담당한 재판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어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저자가 발췌한 미국의 채무자에 관한 자료가 기억에 남는다. 미국 파산자 중 상당수는 맞벌이로 상당한 소득을 올리는 중산층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높은 소득을 올리지만 고정지출 상승 폭이 훨씬 커 여유 자금이 이전보다 훨씬 줄어든 빡빡한 삶을 살다가 실업, 급여 감소, 질병 등 변동 요인이 발생하면 곧바로 파산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때 고정지출의 대부분은 자녀의 안전과 교육에 관한 지출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파산자들이 빚을 지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 대신 돈을 갚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돈을 빌릴 수 있냐며 분노한다. 파산자들의 도덕성을 의심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위 자료를 보면 파산자들은 사치는 커녕 남들만큼만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 여유 자금도 없이 자신들 소득의 대부분을 자녀에게 투자한 사람들이다. 과연 이들을 남의 돈 떼먹는 파렴치한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질병이나 재해 등 삶의 변동 요인에 대해 그 어떤 대비 없이 자식에게만 투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이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도덕적 해이에 빠져 사치에 남의 돈을 탕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큰 오해이다.
오히려 반문해본다. 왜 사람들은 자식 교육과 안전에 그토록 많은 돈을 쏟아야 했을까? 왜 채권자들은 충분히 갚을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기꺼이 돈을 빌려주었을까? 우리는 채무자들의 잘못을 따지기 전에 우리는 사회 안전망 부재, 무능력한 정부 그리고 탐욕스러운 금융기관들의 행태를 먼저 따져 보아야 한다. 채무자의 잘못은 그 이후에 따져도 늦지 않다.
후반부에 가서 조금은 고개를 갸웃하게 부분도 있었다. 저자는 세상을 의미 있게 바꾸기 위해서는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수긍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주장을 펴야 한다고 얘기한다. 논리와 당위보다는 배려와 설득으로 상대방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저자는 성 전환자의 성별 변경을 법적으로 허용하여야 한다는 논문을 쓸 때, 성적 소수자 보호의 당위성이나 성에 대한 가치 상대주의, 다원주의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최대한 배제하고, 오히려 성 전환자의 성별 변경을 허용하는 것이 일반 다수자의 입장에서도 부작용이 적을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나는 이러한 방식이 판사인 저자에게는 유효한 방법일지는 모르나 그 자체로 옳은 방식인가에 대해선 의문이 들었다. 저자는 판사라는 기득권의 위치에서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만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실제로 사람들의 생각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실질적이고 유효한 '전략'을 고려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기득권의 주변부에 있는 대학생으로서 나의 역할은 설득이 아니라 의문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사회적으로 논의를 형성시킨다. 논리와 당위로 사회를 비판하고 역사적 근거와 소수자에 대한 공감으로 사회적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내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판사인 저자가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성 전환자의 성별 변경을 이야기할 때, 권력의 주변부에서 나는 성적 소수자 보호의 당위성과 다원주의적 관점을 이야기해야하지 않을까.
오랜만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판사들의 일상과 그들의 직업적 고민이 궁금하다면 가볍게 읽어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