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 9번 : 클라우디오 아바도 & 베를린 필하모닉 - 잘츠부르크 실황
나만 알고 싶은 음반이 있는 반면, 널리 알아 줬으면 하는 음반이 있는데 바로 이 아바도의 베토벤 9번 교향곡 잘츠부르크 실황이 그 중 하나다. 이후에 녹음한 베를린 전집이 워낙 유명해서 묻히는 감이 있지만 참으로 탁월하며 인간미까지 느껴지는 연주다.
이 연주가 특별한 이유는 아바도가 베토벤을 해석하는 관점의 변화, 나아가 주류 음악계가 베토벤을 탐구하는 음악적 사조(思潮)가 변화하는 과정의 중간 흐름을 포착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 전후의 음반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변화과정 중간의 연주를 담아낸 음반은 이 것이 거의 유일하다고 본다. 그것도 아바도와 베를린필하모닉이라는 인류대표 음악가의 연주로 말이다.
그 변화란 것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하자면, 오랫동안 베토벤 교향곡 악보의 표준으로 취급 받아온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어텔 社' 판본 악보에서 '배렌라이터 社' 판본 악보로 베토벤 해석의 기준이 넘어온 변화를 말한다. 브라이트코프 판본은 베토벤 시절부터 라이센스를 가지고 출판된 악보이나, 베토벤 초고의 엄청난 악필과 오류를 교정하지 않고 그대로 뽑아내 음악적으로 여러 문제가 많았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냐면 음악적으로 오류가 많기 때문에 지휘자가 악보를 따르기보다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았고 때문에 베토벤의 작곡의도나 당대의 음악적 고증과는 거리가 먼 연주가 횡행하게 되었다. 특히 자의식이 강했던 바그너가 독일 후기낭만주의적 관점을 베토벤 해석의 기준으로 밀어 붙이면서 베토벤 교향곡이란 - 으레 우리가 선입견을 가진 - 웅장하고 장대한 느낌의 것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반면 '배렌라이터' 판본은 베토벤의 원래 의도를 최대한 살려 엄격하게 재현한 악보다. 영국의 음악학자 조너선 델마의 주도로 베토벤의 초고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음악사적 연구 성과를 적극 도입하여 베토벤의 작곡의도를 가능한 끌어 올려 고증하는 동시에 그동안 베토벤 해석에 덕지덕지 붙었던 구습적 관례를 모조리 덜어내 버렸다. 어차피 같은 음악인데 이러한 악보 수정이 얼마나 다를까? 할 수 있겠지만 연주의 느낌은 놀랍도록 다르다. 무겁고 웅장하게만 울리던 베토벤의 음형들이 극히 샤프하고 산뜻하게 바뀌었다. 마치 컨템포러리 음악을 듣는 것처럼 각 음가의 울림이 딱 떨어져 명징한 구조감이 나타나고, 각 악기의 독자적인 선율이 돋아져 날카로운 엣지가 살아 있다. 더불어 엿가락처럼 늘어지던 템포를 아주 타이트하게 교정해 매우 탄력적이고 역동적인 에너지가 넘친다. 베토벤의 교향곡이 이처럼 모던한 음악이었던가 놀랄 정도다.
이 배렌라이터 판본으로의 변화는 90년대 시작되었고 2000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아바도의 이 잘츠부르크 베토벤 실황은 96년도 연주다. 아직 사조의 변화가 완성되지 않은 정확히 중간 시점의 연주였고 그렇기 때문에 구식 사조와 신식 사조의 여러 면면이 뒤섞여 있다. 여전히 전체적인 구조에서는 구습적 전통이 유효한 영향을 발휘하고 있으나 미완의 신식 사조가 곳곳에서 혁신의 놀라움을 역설하고 있다. 한결 가뜬해진 템포가 상쾌한 박진감을 부여하고, 각 악기군의 대비는 높아져 근육의 데피니션이 분명해졌다. 비브라토를 절제한 합창단의 딕션은 가사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전하고 있어 이 음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지 더욱 명징하게 들려준다. 구판본과 신판본의 가장 핫한 논란거리인 4악장 '알라 마르시아' 부분은 구판본에 조금 더 가까운 템포를 취하나 신판본의 터치감을 한껏 도입하여 어쨌든 변화하는 중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이모저모 어렵게 설명하였으나 요지는 이렇다.
변화하고자 하는 모습은 서투르나 아름답다. 그리고 그 변화 과정의 서툰 모습을 대중에 드러내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아바도와 베를린필이라는 세계 최정상의 음악가들이 그 서투른 미완의 모습을 드러내는 걸 두려워 하지 않고 음반으로 남겼다.
누구나 변화를 마친 말끔한 결과물을 보여주고 싶어하고, 이 베토벤 교향곡 역시 신판본의 해석을 완벽하게 구현한 음반들이 오늘날 즐비하게 나와 있다. 그러나 나는 변화하는 중의 서투른 해석들이 낱낱이 담긴 이 미완의 연주에 훨씬 정이 간다. 예술의 사조는 변화하는 것이며, 안주하지 않는 최고의 음악가들이 변화에 동참하고자 하는 역력한 노력의 흔적이 용감히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2020.06.26. 안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