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협주곡 1번, 발라드 - 조성진/노세다/런던심포니
지난 세대와 달리 더 이상 ‘음악신동’이라는 단어가 화제가 되지 않는 시대다. 얼마 전만 해도 어린 나이에 무슨 콩쿨에 입상했느니 유럽 어디 악단과 협연했느니 하는 소식이 꽤나 큰 뉴스였는데 말이다. 그만큼 우리 음악계가 성숙했다는 좋은 현상일 것이다. 깜짝신동보다는 일생에 걸쳐 예술혼을 일궈온 대가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안목이 생겼다. 그런 시대라 ‘조성진 신드롬’현상은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 이 어린 피아니스트가 단순한 이슈 거리가 아닌, 진정 대가의 자세와 격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이 시대의 눈과 귀가 간파한 것 아닐까.
조성진의 말과 행보를 보면 그가 얼마나 담대하고 넓은 내면과 아름다운 끈기를 가진 음악가인지 알 수 있다. 쇼팽 콩쿨 우승 이후에도 스타덤을 즐기기보다는 학업에 전념하는 꾸준한 모습을 지키고 있다. 피아노는 좋아하는 일을 계속해 온 것이고, 오랫동안 음악을 계속하며 오래 사랑받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며 소박하지만 단호하게 밝힌 언행은 진정성이 느껴진다. 그런 조성진이 DG에서 낸 첫 번째 스튜디오 음반이 우리 앞에 있다.
수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첫 정규 음반이지만 조성진은 여전히 담담하고 성실한 연주를 들려준다. 과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터치, 함부로 지나친 감정을 가감하지 않는 템포다. 쇼팽의 감미로운 기교에 흔들리지 않고 한음 한음 단단하게 꼭꼭 씹어 넘기는 집요함에선 우직함까지 느껴진다. 어느 한음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 않고 분명하게 짚고 나아가는 덕분에 마치 베토벤을 듣는 것처럼 구조감이 탄탄하다. 화려한 색조의 물감을 모두 거부하고 오직 단단한 지필묵으로 하나하나 정자를 새겨나가는 쇼팽이랄까, 그동안 달콤한 선율과 기교 속에 가려 우리가 놓치고 있던 쇼팽의 진솔한 모습을 조성진은 벗겨내고 다듬어 보여준다. 노세다와 런던심포니의 정갈한 반주 또한 조성진의 해석을 적극 돕는다. 지휘자 노세다는 오페라 반주 경험이 많은 만큼 언제 오케스트라가 나서고 들어와야 할지, 또 어떤 순간에 피아노와 섞여야 하는지 노련하게 파악하고 있다. 런던심포니의 깔끔하고 직선적인 사운드가 좋은 궁합인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운좋게도 조성진의 연주를 볼 기회가 많았다. 물론 그 때는 쇼팽콩쿠르 이전이었기에 지금처럼 보기 힘든 시절은 아니었으나 대가적인 안목과 역량은 그때도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에게 쇼팽콩쿠르의 수상은 그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할 것이다. 내면은 여전히 강하고 빛났으니까.
아늑한 금호아트홀에서, 가까운 서울시향과의 협연 무대에서 곧잘 마주치던 그이다.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친근하게 자주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만 아쉬운 마음보다는 기대가 더 크다. 우리가 지켜 보았고 사랑하는 조성진이라면 언제든 돌아올 것을 믿기 때문이다. 스타의 왕관을 내려 놓은 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열심히 연습한 결과를 들고 뿌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돌아올 모습이 선하다.
쇼팽이 그 모습을 본다면 분명 기뻐할 것이다.
-2020.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