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협주곡 20번 - 조성진 DG.
작곡가이기 전에 스스로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던 모차르트는 피아노 협주곡을 27개나 썼으며 알알이 알찬 작품으로 남아 많은 수가 명곡으로 즐겨 연주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예술성이 드높다고 여겨지는 곡은 피아노 협주곡 20번 K466 이다. '미소짓는 슬픔'이라고 일컫는 모차르트다운 정서가 가장 잘 담겨 있고, 원숙기의 탄탄한 구조감과 더불어 청년기의 실험적인 도전까지 어우러져 있는 곡이다. 반갑게도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가장 좋아하는 협주곡도 바로 이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0번이란다. 들어보지 않을 수 없다.
조용하나 긴박감 넘치게 시작한 1악장의 극적인 테마가 순식간에 청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야닉 네제-세겡이 이끄는 유럽체임버오케스트라는 편성 규모는 작지만 그만큼 예리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 음열의 하나하나가 촉촉하게 젖어 있으나 끈적하지 않은 질감으로 마무리되기에 충분히 이입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다. 그리고 어느샌가 그 테마의 한 구절을 붙잡아 시작하는 조성진의 피아노는 과감하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는 단호한 전개, 세련된 울림...!
베를린필의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평하기를 조성진의 피아노는 시를 읽는 것과 같다고 묘사하였다. 감정이 충분히 농축되어 구절마다 녹여져 있지만 간결한 운율로 다듬어져 있어 신파로 빠지지 않고 여운만 마음에 길게 남기는 시처럼, 조성진의 피아노가 가진 간명하고 고결한 장점을 캐치한 찬사가 아닐까? 조성진의 여러 연주가 훌륭하나 본 20번 협주곡에서 그러한 시적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다고 느낀다. 조성진의 피아노를 들으면 윤동주의 시가 떠오른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절절한 감정을 소박하고 정제된 언어에 꾹꾹 눌러담아 정갈한 담음새로 내오는 구성. 조성진이 모차르트를 표현하고자 했던 고민의 결이 윤동주의 그것과 닮지 않았을까 감히 상상해본다.
간 <윤동주>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사쓰 산중에서 도망해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2악장에서 잠시 서정적인 선율을 한껏 풀어내며 긴장을 푼 연주는 3악장에서 다시금 예리한 칼날을 꺼내든다. 서슬퍼런 다짐 혹은 선언으로 시작한 3악장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테마를 주고 받으며 긴밀하게 확장시켜 나간다. 엄숙하게 시작했으나 재치어린 멜로디가 계속해서 끼어들며 정서의 폭을 고도화시키는 마지막 악장은 모차르트다운 유희와 화려한 매력이 느껴진다. 모차르트가 오페라 <돈 조반니>에서 선보인 웃음과 슬픔, 환희와 분노의 극단적 정서의 조합이 이 작품에서 좀 더 규모는 작지만 예리한 형태로 나타나는 듯 하다. 조성진의 피아노는 급하게 나아가지 않으면서도 극적인 리더십을 갖고 악장 전체를 끌고 간다. 조성진의 진중함에 비해 야닉의 오케스트라가 조금 많이 발랄한 것이 다소 귀에 걸리나 큰 흠은 아니다. 피날레는 산뜻면서도 충분한 만족감이 느껴진다.
조성진의 피아노에 좀더 집중하고 싶은 청자라면 앨범 다음 트랙에 담겨진 소나타 3, 12번과 판타지아를 놓치지 말 것. 훨씬 보폭을 넓혀 움직이는 조성진의 해석을 들을 수 있다.
P.S : 이만큼 훌륭한 연주에 비해 앨범커버의 사진이 매우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