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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 Mar 09. 2017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요구


                                                                   


"꼭 필요한 사람이 되자"                                                                                                                                                             

                                                                                                                                                                            어린 시절 우리 집 한 쪽 벽면에 걸려있던 

장식물 글귀

딱히 가훈을 정해두지는 않았지만 
아빠가 그걸 처음 벽에 거시는 순간 
암묵적으로 가훈으로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어느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성장해야겠다는 다짐을 
매일같이 가슴속에 새기던 시절이었다

'꼭 필요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그 필요의 정의는 무엇인가?'

'사회적인 쓸모에 부합하지 못하면 
무가치한 인간인가?'

한때의 무비판적인 학습 효과가 
훗날 어떠한 파장을 몰고올지 미처 몰랐기에 
이런 물음은 
자책 어린 때늦은 반성처럼 느껴진다

기억의 편린 하나

내가 미술, 
그리고 역사에도 
특히 관심을 가졌던 어린 시절

아빠와 함께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무심결에 내 관심사를 밝혔다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무안을 당한 경험이 있다    



                                                                                                                                              "어린애가 고리타분하게

하필이면......"                                                                                                      


                                                                                                

내가 법조인이 되기를 내심 바라셨던 건 알았지만
나를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철부지로 낙인찍는 아빠의 태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듯 바라보는 차디찬 눈길에 
형언하기 어려운 서운함과 야속함을 느껴 
그 뒤로는 또 다른 관심사가 생겨도 일체 함구했다

물론 딸이 꽃길을 걷길 바라는 
아빠의 마음이 지나치게 앞선 나머지 
역사 비하성 발언까지 경솔하게 튀어나온 것이리라 
미루어 짐작은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이 사회는 
계속해서 꿈과 직업을 혼동하게 만든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선 
배곯을 각오를 해야 하고 
성공하기 위해선 
어떠한 역경도 불사하며
물불 가리지 않고 험지로 뛰어들기를 종용한다

성공이라는 허상을 쫓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불행한 삶을 살도록 
잔혹한 경쟁의 길로 친히 인도한다

꿈이란 건 희망 직업, 장래희망의 동의어가 아니며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논리로는  
그저 모두가 패자로 남을 뿐,
생의 의미를 황폐화시키면서까지
부나비처럼 참혹한 경쟁과 승부의 장에 뛰어 들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일러주는 것이 
어른으로서 최소한의 책무는 아닐까

자유와 참된 행복을 누리며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살기 위한 충분조건은 
피 튀기는 경쟁으로 얻은 성취도 아니고
비교 우위에서 오는 안도감도 아니다

그 누가 그랬던가
자유는 구속받을 각오를 했을 때라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내가 바라는 나의 쓸모'에 대해 고민하기 이전에 
'사회적 쓸모', '어른들이 원하는 쓸모'를 좇았고,
 결국 나 자신의 손을 놓치고  
10년 이상의 세월을 방황했음을 시인한다

당시에도 분명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즐거운 일, 
내가 원하는 길을 택할 경우
산적해 있는 숱한 어려움과 씨름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어른들이 인정하는 탄탄대로, 
사회적으로 높이 인정하는 그 길이 유혹적이었노라고 
차마 인정하지 못하고  
나는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자기 주문을 외우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변명해 온 겁쟁이는 아니었던가

단지 신체적 억압, 물리적인 해방만을 의미하지 않음에도  
스스로 자유인으로 착각하고 사는 
非 자유인들로 넘쳐나는 세상인 만큼
요원하게만 느껴졌던 '자유'
이제 그 자유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직감한다 
 
영혼을 살찌우는데 정성을 다하고 
두렵고 어려워도 눈을 감지 않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닫지 않아야 
비로소 자유와 조우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문득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 트루먼이 
평생을 자신을 에워쌓던 세계(쇼)를 버리고 
모험이 될지 모르는 자유로운 세계로 탈출하는 장면, 
그리고 <매트릭스>의 네오가 
거짓된 세계이지만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는 파란 약이 아닌
빨간 약을 선택한 장면이 오버랩 된다

부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매스미디어와 사회의 천박한 잣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는 일 없이 
진짜 자기 모습을 찾기에 몰두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자신의 실체, 알맹이와 직면하기 두려워하는 겁쟁이야말로 
사회적 신분을 의식하고 
워커홀릭이 되기 쉬운 법 

나의 '쓸모', '필요'는 
나의 자유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감히 규정짓거나 정의 내릴 권한이 없다

앞으로 어떠한 선택의 기로에 서든
그것이 온전히 나의 자유의사로 이끌어 낸 결과가 맞는지, 
어떤 힘의 논리에 부당하게 설득되지는 않았는지 
끊임없이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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