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sor Jul 21. 2022

우리의 마감은 당신의 퇴근보다 달다.

사랑하는 메인 작가님은 똑똑하고, 털털하고 귀여우시다.

생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오늘은 노는 날이야. 영화 보러 가자!'라고 하시면서 엉덩이를 마구 흔드는 남사스러운 춤도 추신다. (아니다, 트월킹)

반전 매력은 역시 작가라는 이름에 맞게 회의를 할 때 발현된다.

마치 아수라의 백작, 이중인격자, 킬미힐미의 지성처럼.


“제 생각에 덤덤이 아니라 씁쓸하다고 느낄 것 같아요”

“음... 근데 앞 씬에서 얘가 어땠지? 그거랑 이어서 생각을 해봐. 작가만 아는 얘기를 또 하게 되어서 미안한데, 이 씬에서 나는.....”


워싱을 해서 대략 저런 st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그때마다 내가 알던 이 양반은 이런 양반이 아닌데 한다.

피식- 참지 못하고 웃음이 새어 나올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득달같이


“왜?!!!!!!!! 어디야!!!! 뭐 보고 웃었어!!!!”


메인 작가님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대본을 가장 다독한, 다독하고 있는, 다독할 예정인 내가 웃는다는 건 수면장애와 위경련을 룸메이트 삼아 글 짓는 그녀를 흥분시킬만하다.

그때의 피식-은 사실 눈앞의 작가님을 보며 '나도 언젠가 저렇게? 아니야, 난 작가님이 아니니 좀 더 냉철할지도'라는 상상을 했던 것인데.


“여기서 그 메모를 사진 찍었다는게 새삼스러워서요. 다시 보니 너무 귀여워요.”


입 바른말 하지만 완벽히 거짓은 아니다.

그 씬의 그 주인공과 작가님이 너무 닮아서 그랬으니까. 미래의 나를 상상하면서(부디, 제발 당선하자) 새 나온 피식이었지만, 대략 진심 순도 50% 정도 담긴 나의 말에 그날 하루 신나셔서 작업에 몰두하셨다.

이게 보조작가의 수많은 업무 중 하나다.

진심 순도가 약간 떨어지는 거짓말.


시간은 불규칙하지만 마감 루틴은 비슷하다.


오후 3~4시

한 끼를 먹고 샤워하고 줄줄이 사탕처럼 적어둔 화이트보드를 보며 회의를 한다.

이리저리 용쓰며 굴려도 떠오르지 않으면 소리를 빽- 지르시고는 방으로 들어가신다. 낮잠 타임.

그 사이에 난 자료조사를 하고 다시 한번 대본을 보고 커피를 새로 만든다. 너무 졸리면 시를 읽는다.


밤 8시~10시.

잠에서 깬 작가님은 꿈속에서도 글을 썼다면서, 이게 삶이냐는 자조적 물음을 던지시며 다시 회의를 한다.

기분 안 좋으니 새 종이에 대본 뽑자는 작가님의 말에 동감하며, 복합기 앞에서 따끈한 새 대본을 뽑기도 한다. (지구야 미안해. 성공할게)


새벽 2~4시.

정육점 사장님?... 아니다 의사다.

의사처럼 이야기를 죽이고 살리다 보면 어느 정도 마음에 들게 갈무리된다.

회의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하기 시작하면 작가님은 또 한 번의 샤워를 하시는 것 같다.

(난 회의 내용을 거의 실시간으로 타이핑을 해서 10~20분이면 끝난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난 내 것을 쓴다.


새벽 5~6시.

중간중간 질문 및 요청사항에  답변을 하다 보면 마지막으로 나를 부르신다. 진실의 방으로.

'아, 작가님 오타요', '아 여기 더 좋은 단어 있을 것 같아요. 잠시만요!', '응? 갑자기요?', ‘아까 저희 회의 때 말씀드린 게 없어요’ 하다 보면 해가 뜬다.


이번 마감 후 식사는 순댓국에 참이슬이었다.

체질이 술과 안 맞아서 절대 마시지 않지만, 딱 한 잔만 마시고 싶었다.


짠-하고 시원하게 한 번에 들이켰는데 달았다.

어이없게 너무 달더라.

내가 못 자고 몹시 피곤해서 미각 기능이 저하됐나?


작가님, 달아요.”

“네가 이번에 쓴맛을 오래 봐서 그래. 고생했다.”

“작가님도 정말 많이, 억겁의 세월만큼 수고하셨습니다..”

“고맙다~”


임시 완고를 떠나보낸 이번 마감에서 난 소주의 단맛을 알게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