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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y in Pangyo Jul 17. 2019

고속버스에서 만난 치매 할머니

#정신적 완전함의 오류에 대하여

연구실 워크숍으로 해남으로 가는 고속버스, 옆 좌석에 치매로 보이는 할머니가 혼잣말을 중얼중얼하시며 앉아계셨다. 차표를 확인하자는 기사님의 말씀에 표를 절대 뺏기지 않으려고 손에 꽉 쥐고 계셨고, 안전벨트를 하라는 말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으시고 에어컨을 가리키시며 몇 번 웃기만 하셨다. 에어컨을 틀어드릴까요?라는 나의 물음에도 역시나 답하지 않으셔서, 에어컨을 틀어드리고 안전벨트를 메 드리고 그렇게 버스가 출발했다. 할머니는 40여분 가까이 혼잣말을 중얼중얼거리시다가 잠이 드셨다.


버스가 움직일 때마다 나의 왼 팔과 슬쩍 맞닿는 할머니의 얼룩덜룩한 오른팔을 보며, 그녀의 한 맺힌 한탄을 듣고 있자니, 정상적인 인지 기능에서 나온 말이 아닌 것 같은데도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려고 했다. 치매셨던 우리 외할머니가 생각나기도 했고, 누군가의 엄마로, 아내로 삶의 무게들을 견디며 지금까지 살아오셨을 삶의 대가로 누리고만 사셔도 모자랄 판에, 치매라니. 같은 여자로서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짠한 마음도 들었다.


3시간 30여분을 달려 두 번째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화장실을 들리고 간단한 요깃거리까지 사서 왔는데, 옆자리 할머니께서 돌아오시지 않으셨다. 그렇게 클락션을 울리며 5분, 10분을 기다렸는데도 할머니가 오시지 않자 기사님이 우리 연구실 사람들에게 일행이냐고 물으셨고,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나는 할머니의 옆 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로 할머니가 돌아오시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떠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렇게 할머니를 찾아보겠다며 버스에서 내렸고, 멀리 가지 않아 할머니를 찾았다. 할머니는 화장실 앞에서 가방을 안고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고 계셨다.


"어머니, 해남 가셔야죠~. 저기 버스 같이 타셔요."라는 나의 말에 "여기가 해남 아니여? 나 어디로 데려가려 그러는겨?"라고 답하셨다.

"해남 아니고 휴게소예요. 한 시간만 더 가면 돼요. 가방 들어드릴게요."라고 하니 "니도 나 아픈 거 못 믿지?" 하시며 가방을 끌어안으셨다. 그렇게 어찌어찌 함께 버스로 돌아와서 앉았는데, 할머니 좌석 아래쪽에 신용카드가 떨어져 있었다. 카드를 보며 할머니 존함을 여쭈자, 내 이름을 왜 알려하느냐는 말을 반복하시다가 결국 박○○이라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처음에는 어디에서 오시냐, 해남에서는 어떻게 가시냐라고 여쭈다가 갈수록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어떠한 말을 건네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서 그냥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 후로 잘  할머니는 계속 웃으시다가, 심각해지시다가를 반복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안타깝게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학교 저학년 때였다. 버스를 타고 서울 시내 한복을 달리다가 정류소에 정차했는데, 지팡이를 짚은 시각장애인 분이 버스를 타려고 했다. 기사님이 뒷 문을 열고 버스를 낮추어 주셨는데, 그분은 계속 탑승을 거부하셨다. 일전에 버스를 타던 중에 버스가 출발하여 다친 적이 있다고 시동을 꺼달라는 요구였다. 기사님은 안전하고, 버스도 낮추었으니 믿고 타라고 이야기했고, 시각장애인 분은 시동을 끄기 전에는 절대 탈 수 없다고 대답했다. 같은 대화가 서너 번 오간 후, 기사님과 시각장애인분 모두 동일한 말을 반복하며 화를 내고 소리를 치셨는데, 이때 몇 명의 승객들이 기사님 편을 들기 시작했다. 뒷 문도 활짝 열려있고, 버스도 아래쪽으로 해 주었는데 왜 못 믿냐는 것이었다. 출근길, 몇 분째 버스가 멈추어 있으니 빨리 좀 가자는 의견이었다.


나는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그냥 시동 한 번 껐다가 켜면 되지, 저분의 외침을 들으면 모르겠냐, 누군가의 한 두 번의 단순한 실수로 신뢰가 깨진 것이 아니다, 안심하고 버스를 탈 수 있게 시동만 껐다가 켜면 될 것 아니냐!!!!라고 소리치며 가서 그분께 괜찮다고, 손을 잡으라고 내밀고 싶었다. 그렇게 터질 것 같은 심장으로 행동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기사님이 문을 닫아버렸고, 시각장애인 분을 남겨둔 채 버스는 출발했다. 조금 더 빨리 말할 걸...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했던 경험은 가끔씩 불쑥 떠오르며, 마음 한편을 무겁게 만들고는 했다.



할머니가 휴게소에서 돌아오시지 않았고, 승객들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누군지 이야기하는 순간 저 때의 감정이 또다시 떠올랐다. 이번에는 더 늦기 전에 행동해야 했다. 적극적으로 할머니를 찾으러 나간 선택을 했다는 것은 강력한 쫄보 자아를 이기고 실천할 용기를 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렇게 끝났으면 좋으련만..

이 사건은 위와 같은 의미와 함께 나에게 또 다른 삶의 과제를 쥐어주었다.



오늘 할머니에게 하나님은 할머니를 사랑하신다고, 어디가 지 모르실 때 교회로 가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말씀드리지 못했다. 조금 부끄럽기도 했고, 할머니가 기억도 못하실 텐데라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는 이것이 나의 과제인지 몰랐는데, 오늘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읽은 빅터 프랭클 책의 한 구절이 깨달음을 주었다.



@빅터 프랭클, 삶의 의미에 대하여
'저능아나 위축된 정신분열증 환자 그리고 치매에 걸린 노인은 어떠한가? 만약 우리 스스로 이런 정신적 완전함에 대한 개념에 빠져 있다면 어떻게 그들에게 안식을 가져다줄 수 있겠는가? 비록 의학적으로 정신병에서 회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신의 창조물도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라고 말이다.
<빅터 프랭클, 삶의 의미를 찾아서 재인용, 186p>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유명한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이자 실존주의 의미 치료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이 그의 저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에서 알버 딘 대학의 정신건강학 교수 밀러의 말을 인용한 구절이다.


그렇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인간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고 삶의 의미가 있다. 내가 전하더라도 치매가 있는 할머니가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나의 오만이고 착각이었던 것이다. 사실 정신적 건강함의 완전함이라는 것은 애초에 있을 수 없는 개념일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정신 건강의 정상과 비정상 범주를 나누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치료적인 가능성이나 인지적 수준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 즉 하나님의 창조물은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해남 고속터미널, 조심히 살펴가시라는 나의 말에 할머니는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하셨다. 집에는 잘 찾아가셨을까?

나는 못하였지만, 할머니가 붙여주시는 다른 사람을 통해 꼭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The LORD is close to the brokenhearted and saves those who are crushed in spirit.
시편 34편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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