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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y in Pangyo Sep 18. 2019

교회 안에서 생긴 상처를 흘려버리는 법

#못해신앙을 위한 심리학

신혼 3개월 무렵이었던가. 8평 남짓한 신혼집으로 어머니와 교회 전도사님께서 심방을 오셨다.     

방은 하나에, 부엌은 외부에 있고, 욕조도 없고, 분리수거함도 없는 낡은 주택이었지만, 그 나름대로의 낭만이 있었다. 아래층에는 혼자 사는 70대 노모가 사셨다. 지어진지 30년도 넘은 이 낡은 주택에 사는 사람들의 살림살이란 어떨지 안 봐도 훤히 보이기 마련인데, 특히 혼자 사는 70대 할머니가 어떻게 사실 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첫째 100일 떡을 돌렸을 때이다. 아랫집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5000원을 꺼내시더니 용돈을 주셨다. 그것도 방에서 봉투까지 찾아와 구겨진 돈을 곱게 펴 담아 말이다. 1층 집에는 취업을 준비하는 딸을 둔 가족이 살았다. 이사를 왔다고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인가, 첫째 100일 떡을 돌릴 때인가, 자기 딸이 취업을 준비하고 있어서 걱정이 많다고 하셨다. 우리 부부는 따님과 함께 우리 집으로 한 번 놀러 오라고 말씀드렸고, 며칠 뒤 초롱초롱한 눈빛의 소녀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내가 말하는 것을 어찌나 귀 기울여 잘 들어주던지, 참 따뜻하고 귀여웠던 느낌이 6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다. 이렇게 낭만적인 이웃들하고 살았다. 앞에 내놓은 분리수거를 수거해 가시는 어르신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고, 가끔 지하에 사는 고양이들이 우리를 놀래 켜 주기도 하였고, 지금 사는 집에 있는 많은 것들이 없는 월세 30만 원짜리 집이었지만 정말 행복했고, 감사했고, 또 즐거웠다. 적어도 우리에겐 그랬다.    



우리 신혼집의 첫 손님이셨던 전도사님은 세련된 디자인의 그릇을 선물로 가지고 오셨다. 집을 보고 조금 놀란 눈치셨지만 내색하지 않으셨다. 오디 스무디를 만들어드렸는데 오디가 전도사님 치아에 많이 꼈었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기억에 남는 일 없는 그런 무탈한 날이었다.    



2년 뒤, 우리는 시부모님 댁 근처로 이사했다. 아이도 돌이 지났고, 복직 시기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두 번째 집은 10평 남짓한 빌라였다. 이번에는 분리수거함도 있고, 주방도 집 안에 있었고, 거미나 고양이도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첫 손님은 어머니와 교회 전도사님이셨다. 심방 또한 특별히 기억나는 일 없이 무탈하게 끝났다. 나에게 기억이 남는 것은, 심방이 끝나고 전도사님이 나에게 건네신 말씀뿐이다.    



“아니~, 솔직히 처음에는 나는 최 집사(나)가 너무 마음에 안 들었어. 얼굴이 예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자도 아니고, 믿는 집도 아닌데 왜 임 집사(남편)가 왜 결혼을 하는지, 너무 아깝더라고~. 근데, 쭉 보니까 알겠더라. 임 집사 너무 결혼 잘한 것 같아~. 왜 최 집사를 선택했는지 알겠더라고. 정말 너무 예쁘게 잘 사는 것 같아~”    






순간 온몸이 화끈거리고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안 그래도 누런 피부인데, 빨갛게 되기까지 한 내 모습이 전도사님 말처럼 ‘얼굴도 안 예쁜’ 모습이었을까. 전도사님의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고, 앞선 말에서 내 눈동자와 정신 모두 멈춰 섰다.     



내 인생에서 너무나도 타인인 그녀는, 아직 너무도 어려운 시어머니 앞에서 나의 얼굴과 나의 집안과 게다가 부모님까지 평가를 하고 있었다. 정말 불쾌했다. 이게 나의 첫 번째 생각과 감정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사실이었다. 내 얼굴은 예쁜 편이 아니고, 우리 집은 부자가 아니고, 우리 부모님은 하나님을 모르시는 상태였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임 집사가 너무 아까웠어~’라는 전도사님의 생각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녀 입장에서는 진짜인 마음이었고,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 또한 아니었다. 이미 교회에서 많이 들은 이야기이기도 했고.            






살다 보면 이렇게 황당한 상황을 꽤나 자주 겪게 된다. 내가 살아가는데 단 0.0001%의 도움도 주지 않은 타인이 나의 삶에 대해서 평가하고 조언하고는 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을 나에게 하고, 타인은 본인이 무례한지도 모르고 상처가 되는 말들을 너무나도 생각 없이 내던진다. 나에게 전도사님의 이야기 또한 이런 종류의 ‘쓸데없는 말’이었고, 화도 나고 많이 속상하기도 했던 그런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을 그냥 흘러 넘길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나는 미인이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별명들을 생각해 보면 머리가 짧으면 이병헌, 머리가 길면 이외수, 가끔 여자 연예인으로는 이태란이나 장도연을 닮았다는 소리를 듣는다.(누가 예쁘고 못생겼다는 의미는 아니다.) 객관적인 기준에서 미인이 아닐 수는 있지만, 나는 나의 생긴 모습에 만족한다.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예쁘다고 했고, 우리 남편도 내가 제일 예쁘다고 한다. 물리적인 모습 그대로 나의 생긴 객관적인 모습이 있다면, 예쁘다고 봐주고 사랑스럽다고 봐주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이 개입된 주관적인 판단인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만드시고,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눈에는 내가 가장 사랑스럽고 예쁜 모습 그 자체이다. 이게 진실이다.

부자가 아닌 것 또한 사실이나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남편도 마찬가지이고(ㅋㅋ), 지금까지도 잘 살았고 앞으로는 더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나에게는 진실이다. 부모님이 믿음이 없으신 것은 사실이었으나, 하나님이 우리 가족 모두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확신을 주신 약속이고 나에겐 이것이 진실이다.



2.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나 사이의 문제이다.

전도사님 말씀의 의도는 지금은 내가 너무 예쁘다는 칭찬을 해주고 싶으셨던 것이었다. 그 의도가 나에게 잘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인 맥락으로 봤을 때 분명히 그런 의도였을 것이다. 타인에 말에 의해 내 감정이 흔들릴 때면, 나와 하나님 사이에 풀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가령,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이 나를 온전히 사랑하시는데, 나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나 스스로 ‘타인’이라고 일컫는 사람에게서 왜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일까?”, “하나님이 세우신 종에게 어떤 방식으로 순종하는 연습을 시키시는 것일까?” “주님이 세우신 주의 종인데, 어느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작은 실수에 내가 확대 반응하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모든 사건, 혹여 그것이 인간의 실수라 할지라도, 모든 상황들을 선으로 바꾸실 수 있다. 하지만 그 ‘선’이라는 것은 온전히 나와 하나님 관계에만 해당하는 일이다. 전도사님이 나에게 사과하기를 바라거나, 앞으로 말하는 법을 바꾼다던가 이런 것은 전도사님과 하나님의 관계의 영역이다. 그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고, 내 욕심인 것이다. 나는 오로지 지금 나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이 나에게 알려주고 싶으신 것이 무엇인지에만 집중하면 된다.     



3. 사역자도 사람이다.

사역자도 나와 같은 사람이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한다. 나도 마찬가지고. 그것이 사역자라는 이유만으로 더 확대되는 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다.     



4. 내 생각도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실수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워낙 그분의 스타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스타일이 나와는 맞지 않는 것이고 말이다. 다른 가정도 가능하다. 관계의 심리적 거리가 서로 달랐을 수도 있다. 전도사님은 나와 많이 친해져서 이러한 농담(?)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다. 또는 대상에 대한 정보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전도사님은 남편은 오랜 시간 지켜보고 가족들까지 다 아는 사이이지만, 나를 안 지는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정보의 부족으로 인하여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몰랐을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가설이다. 확인해보지도 않았고,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내 기준으로 또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많은 일들 속에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수많은 이유들, 동기들이 숨어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내 기준으로, 나의 프레임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내가 맞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이면을 들여다보면 내가 틀릴 수도 있는 것이니까.         






지금도 교회에서 전도사님을 가끔 마주친다. 전해 듣기로 전도사님은 우리 교회에서 내가 제일 얼굴이 좋다고 칭찬을 해주신단다. 이 사건 이후로 5년을 일관되게 나를 예쁘게(?) 봐주시는 것을 보면, 나의 감정이 상하는 것과 별개로 그분의 선한 의도 또한 진짜였던 것이다. 나는 전도사님을 굳이 피하지는 않지만, 굳이 가까이하려 하지도 않는다. 늘 웃으면서 인사만 드릴뿐이다.


교회 안이든 밖이든 사람의 말로 인한 상처는 오래 앙금이 남는 법이다. 이럴 때일수록 말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말의 숨은 의도를 봐야 하고, 사람에게 집중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어쨌든 타인에 의해 상황은 벌어졌지만, 마음을 수습하는 것은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굳이 쓸데없는 말은 안 하는 어른이 돼야지.

평가보다 사랑이 가득한 어른이 돼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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