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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an 17. 2024

문학전집

비의지적 기억

여기 책 한 권, 혹은 서너 권 그것도 아니라면 책 더미가 보인다. 달나라까지 탑을 쌓을 만큼 충분한 높이는 아니지만 추상적이지만 많다고 정의할 만큼, 적지 않은 책들이 작은 방안에 널려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때로 먼지로 표현되기도 소각장에서 이미 오래전에 재로 형체를 바꿔버린 불순물로도 불릴 수 있다. 어쨌든 그 책들은 현재 여기에 없으니까. 분명 어느 시간대에 존재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존하지 않는 그 책들을 나는 분명하지 않은 내 기억에 의지해서 여전히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는 존재할 거라고 믿는 것이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졸업하기까지 그 책들은 당시 내 삶의 전반을 아우루는 어쩌면 나라는 인간을 대체하며 확장시킬지도 모르는 기묘한 가능성을 지닌 물건이었다. 예컨대 그 물건의 본질은 '읽는다',라는 단순한 의미의 영향력을 넘어서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불운한 삶까지 지워버리는 위용을 가지고 있었달까.


그 책 말하자면 책 덩어리들은 문학전집류였을 것이다. 소공녀가 나오고 신데렐라, 혹은 인어공주가 나오는, 그것도 아니라면 말하는 동물들이 다수 등장하거나 현실에 속하지 않는 세계가 등장하는 그런 책들. 분명하지 않은 기억들은 대체로 지금의 나를 위해 재편집되고 가공된다. 50권의 달하는,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은 책들을 베개 삼아 이불처럼, 때로는 단짝친구 같은 애착인형처럼 손에 거머쥐고 다녔을 거라고 짐작되지만, 그렇게 닳도록 아껴하며 품고 다니던 그 책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건지 모르겠다. 그것들이 사라짐과 함께 내 유년시절 역시 송두리째 누군가에게 뺏겨버리기라도 한 걸까. 빼앗아 간 것들은 가공의 존재인가, 내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한가.


나의 시공간은 비의지적으로 어느 순간 유년 시절로 옮겨간다. 현재 읽는 책들에서 나는 과거의 나를 비춰본다. 과거의 내가 심취했을 어떤 이야기에 취해본다. 하지만 단지 그랬을 거라고 어쩌면 상당히 유의미한 시절이었을 거라고 추측하는 것이 전부다. 그 시절의 삶은 나 스스로 확인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그때 존재했던 모든 것들은 여기에 남아 있지 않다. 그때의 이야기를 간직했던 인물도 거의 사라졌다.


나의 소중했던 그 책들은 사라졌다. 사라졌지만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그것들은 여전히 내 시야 안에 속해 있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더듬더듬 찾아 떠난다. 시간을 거슬러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 그때의 나를 조정한다. 그때의 나를 바꿀 수 있다면, 무엇으로 바꿀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방향을 조금만 비틀어도 지금의 인생은 어떻게든 달라졌을까.


얼마 전 어머니에게 난데없이 엉뚱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죽도록 미워했지만, 그럼에도 아버지와 얼마 없는 소중한 기억 중 하나는 아버지가 마련해 준 문학전집에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다고. 나는 그 말을 처음으로 꺼냈다. 용기가 필요한 것도, 특별한 도전이 필요한 말도 아니었는데, 나는 입 바깥에 아버지에 대한 어떤 고마움을 밑밥처럼 깔아 두고 그 문장을 늘어놓았다.


어머니는 네 기억이 왜곡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책은 아버지로부터 그러니까 아버지에게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어머니 당신이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할부로 몰래 구입했던 물건이었다고, 덜컥 외판원의 감언이설에 말려들어 넉넉지 않은 살림에, 분수에 맞지 않은 물건을 들여놓았다고 내쫓길 뻔했다는 사실과 함께.


나는 40년 넘는 세월을 가공된 사실로 믿었던 것이다. 종교도 아닌 사실을 교조주의자처럼 맹신하며, 맹목적인 믿음을 아버지에게 바쳐왔다는 것. 하지만 주인공은 다른 곳에 있다. 주인공은 때로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다. 가만히 물결 밑에 엎드려서 파도가 지나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유년 시절의 문학전집은 어머니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은 비의지적으로 어느 순간으로 필연적으로 압도되어 가는 나 자신의 가까 기억을, 왜곡된 종교를 철저히 무너뜨렸다. 


진실을 알게 되면, 추앙받던 인물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까? 그래서 아버지는 다시 원망만 남아 있는 분신으로 돌아가게 될까? 그렇다면 아버지에게 남은 것은 영원한 불신과 미움뿐일까. 그 가벼운 책에 담긴 무거운 의미들은 모두 쓸모없는 기억 때문에 무너지는 걸까. 


아마도 나는 그때부터 현실에서 탈출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존재하는 삶이라면 어디에서든, 현실이 아니라면 반드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바로 책 속의 이야기라면... 실체는 없지만 상상 속에서라면 나는 어디든 탈출할 수 있었으니까, 옷장 속의 신비한 문을 의심 없이 덜컥 열어젖히는 것처럼.


나라는 인간은 실존하는 물리적 실체보다 내가 사용해 왔던 물건들로 대체되어 정의되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나는 상당히 뭔가에 종속된, 그러니까 자립형태의 인간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것들로 형성되고 나를 구성하는 것들은 현재의 나를 생산해 나가는 밑거름이 되어왔으므로 과거에 사라진 나와 나를 둘러싼 물건들과 그 물건들과 내가 상호작용했던 총체들이 나를 계속 밀어내고 있다는 것.


기억은 대체로 왜곡된다. 어떤 기억은 처음의 상태를 고스란히 간직해 왔노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심지어는 확고하게 믿은 사실들까지도 변질되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러니 눈을 감거나 눈을 뜨거나 너무나 선명해서 절대로 부정하지 않을 기억조차 뇌의 어떤 부작용 탓에 미래의 나를 위해 날조되는 경우가 생겨나더라는 것.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의존한다.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과거는 완전히 사라졌으나 내가 현존하니 그 과거들은 죽은 것이 아니고 과거는 더 먼 과거를 뿌리처럼 밑바닥에 깔아 두고 현재를 위해 희생되며 현재는 과거 덕분에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지금 내 눈앞에 실존하지 않지만, 눈을 지그시 감아도 낭만적인 꿈 속에서도 그 책은 가끔 나타난다. 어김없이 나타나서 과거에 내가 단지 특정 시간대에 실존했다는 증거물로써 나를 괴롭힌다. 어쩌면 나는 차라리 기억을 계속 왜곡시킬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남은 인생을 슬기롭게 사는 비결일지도. 그것이야말로 기억의 자정작용은 아닐지.


그러니 어느 순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쪽으로 편향되기만 하는 기억들을 그대로 그 모양대로 똑같은 자리에 둘까 보다. 대신 누군가는 복권을 얻을 테고, 누군가는 자리를 내어줘야 하겠지만.




브런치에서 글을 쓰지 않을지도 꽤 오래됐군요. 글을 쓰지 않은 것은 순전히 의지적이었습니다. 쓰지 않겠다고 펜 따위야 던져버리면 그만이라고 결정을 내버렸으니 벌어진 일이었죠. 쓰지 않아도 되는 삶도, 굳이 쓰는 삶도 모두 이해가 되고 모두 그럭저럭 잘 굴러갑니다. 그저 시간이 없었다는 말은 변명처럼 들려서 사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애정이 식었다는 말도 대체로 맞는 것 같지만 그 말도 내뱉고 싶진 않습니다. 그렇게 말해놓고 다 토해내고 마는군요. 글을 쓰는 일이 쓸모를 만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더 생산적이고 더 애착이 가는 일에 매달렸다고 보거나, 낭만을 떠나서 현실적인 일에 에너지를 모두 소비해 버렸다고 판단해도 틀리진 않습니다. 살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더 재미있고 더 관심이 가고 더 좋아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 시간을 투자했기 때문에 노션이든 생산성 툴이든 모두 개나 줘버려,라고 외치며 무시했던 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글쓰기까지 함께 볼모로 세워가면서요.


브런치는 참으로 오묘한 공간입니다. 이렇게 쓰는 일에서 자꾸만 제가 아닌 다른 대상을 물색하고 도모하려는 저를 보며 대체 왜 그래야 하는 건데? 그냥 힘 빼면 안 돼?라고 묻습니다. 이제 먹을 만큼 나이도 먹었으니 힘을 뺄 시기라도 된 걸까요. 왜 저는 이렇게 힘 빼는 게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뭐 한 자라도 써보면서 마멸해 가는 이 공간을 세워볼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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