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 내 삶의 태도를 수정해나간 10년
꼬박 10년이다. 10년. 아빠가 죽은 지 올해로 10년이 되었다. 중학교 3학년, 등교를 준비하던 새벽에 사고 소식을 들었고 그 안개 자욱한 새벽으로부터 나는 10년이라는 시간을 더 살았다.
아득하다. 노트북 키보드 위에 양손을 가지런히 올려놓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더 해야 할지 알 수 없고 그저 가만히 놓여있는 양손 손바닥이 간지럽고 저릴 만큼 까마득하다. 공허한 생각에 잠긴다. '지난 10년을 내가 어떻게 살아왔지?' 그간 벌어진 사건사고들은 무수히 많았지만, 그날 새벽을 생각하면 여전히 머릿속 사고 회로가 끊어진다.
오늘 저녁 퇴근길이었다. 대학가 앞 인도 커리 프랜차이즈에서 6,500원짜리 커리 박스를 포장해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늘 그렇듯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버스 기사님 옆자리, 우측 맨 앞 좌석에 앉았는데 스마트폰 배터리가 다 닳아서 그냥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
'당장 내일 죽어도 아쉬울 게 없겠다. 내일 죽게 되면 그냥 죽는 거지 뭐.'
이런 생각을 한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 실은 언제부턴가 삶에 대한 미련이 많이 지워졌다. 그냥 이대로 내려놓아도 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죽고 싶은 건 아닌데, 작년부터 올해까지는 종종 '죽으면 또 뭐 어때.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고통스럽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부쩍 자주 했다. 안락사에 대한 생각도 한 적 있다. 나에게 내가 죽을 때 내 옆에 누가 있을 것인지, 내가 죽고 나서 누가 내 장례식을 찾아올 것인지는 별로 중요치 않은 문제다. 그냥 '내가', '나 자신'이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상태에서 마음의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편히 잠들듯 죽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종종 했다.
스스로 생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을 내려놨다고 인지하기 시작한 건 작년 여름부터였던 것 같다. 혼자 3박 4일 동안 제주여행을 떠났는데, 제주는 이미 몇 번째인지 세기 어려울 만큼 자주 내려간 곳이라 그저 발 닿는 대로 혼자 노트북 가방을 옆구리에 껴들고 여기저기 다녔다. 함덕과 김녕 사이, 창밖에 바로 바다를 품고 있는 오랜 카페에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말차 빙수를 먹으면서 타닥타닥 글을 썼다. 유서였다. 언젠가 누군가가 '살다가 이따금씩 유서를 써보면 내가 살아온 삶도 정리되고, 앞으로의 방향을 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라고 써둔 글을 읽어서였다. 유서는 엄마가 읽을 것으로 상정하고 썼다. 그런데 내 짐작과 달리, 막상 텅 빈 문서 창을 마주하고 나니 나는 내 유서에 쓰고 싶은 말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 모든 아이디나 계좌 비밀번호는 ****/*******/******** 뭐 이 두세 개를 조합한 게 제일 많아. 여기서 끝에 느낌표를 추가하거나 빼거나 하는 차이는 있어. 내 재산은 얼마 안 되지만 만약 죽게 된다면 엄마가 하루하루 잘 먹고 잘 사는 데 썼으면 좋겠어. 전부 다. 남에게 단 한 푼도 주지 말고 엄마가 다 써버려. 이왕이면 차를 끌고 어딘가로 여행을 가거나 해외여행을 길게 다녀오기를. 나랑 같이 사느라 고생 많았다.
그리고 이 노트북 컴퓨터랑 외장하드에 내가 정리해둔 글이 많은데, 이 글들 다 버리지 말고 보관하거나 작은 책이라도 될 수 있게 해 주면 좋겠어. 독립출판물이라도. 근데 엄마는 분명히 버리겠지. 기대는 안 해. 만약 내가 그렇게 책을 내길 원했으면 살아생전에 내가 직접 냈을 거야. 아마도. 아님 말고.
인생이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 죽음도 어쩔 수 없는 거지. 엄마. 잘 살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이, **, **이, **, 그리고 싱가포르에 있는 **까지, 친구들에게 내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웠다고 전해줘. 징징거리기도 참 많이 했는데 알면서도 들어줘서 고맙다고. 정말 고마웠다고 전달해줬으면 좋겠다.
A4 용지 반장도 안 되는 분량이었다. 할 말은 이게 전부였다. '같이 고생하며 살아줘서 고맙고, 힘들 때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웠다', 이 말 한마디가 내가 전하고 싶은 전부였다. 가족에게든 친구에게든 할 얘기는 그뿐이었다. 죽고 나서 내가 수장될 것인지, 화장될 것인지, 내 돈은 어디로 갈 것인지, 내 글은 어떻게 될 것인지, 솔직히 결정하고 싶지도 않았고 더이상 내게 중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내가' 죽는 거니까. 내가 죽고 나면 나는 내 죽음 이후 무엇도 더 알거나 느끼지 못할 테니까.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생각이 여기까지 닿으니, 내가 겪은 죽음, 그러니까 아빠가 돌아가신 게 언제인지를 셈하다 2010년에 다다랐다. 10년. 이제 고작 26년을 살았는데, 10년은 참 무서운 숫자다. 사실 이것도 세지 않은지가 오래돼서 '10'이라는 숫자가 참 새삼스러웠다. 10년. 자꾸 입안에서 소리 없이 혀를 굴렸다.
지난 10년 동안, 나라는 개인의 삶은 결국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크게 달라졌던 것 같다. 아빠가 사망했던 2010년 4월 10일에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처럼, 귓방망이를 세게 맞은 것처럼 머리에 크고 멍한 통증을 느꼈다. 그 후 1년이 가장 고통스러웠고, 아빠의 사망 외에도 친가와의 관계 단절이나 당시 믿었던 이들에게 받았던 협박, 위로를 빙자한 외가 친척들의 헐뜯음과 앞으로의 거취 문제로 인해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해외생활을 정리하고 집을 매매하는 과정에서 생긴 불상사들도 크게 한몫했다. 기억을 깡그리 지우고 싶어서 일부러 그 시기를 상기하지 않고 지냈지만, 워낙 고약한 경험이라 붙박이장 속 어딘가에 처박아둔 홈웨어용 티셔츠 쪼가리처럼 끄집어내면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태어나 처음으로 울면서 잠에서 깨본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 1년이 지나고 나서 2년째, 3년째는 여전히 힘들어하던 시기였다. 대인기피증에 시달려서 한동안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올 때면 버스를 타지 않고 30~40분씩 걸어왔고, 교복 상의 츄리닝을 머리 꼭대기까지 끄집어 올리고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채로 짐승처럼 걸어 다녔다. 사실 이때의 기억이 제일 흐릿하고 요원하다. 시간이 흐른다는 감각 자체도 둔해져 있었지만, 당시 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때문에 실제로 기억능력이나 지각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기도 했다.
사망 후 3~4년 차. 이때부터 서서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머리도 크고, 꿈도 생겼다. 먹먹함에 온 몸과 정신이 푹 절여져 있다가 감각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호기 넘치던 시절의 나는 내 두 손으로 직접 아빠의 유골을 강가에 뿌리던 나를 떠올리면서 '죽으면 그토록 무의미한 게 인생이니, 살아있는 매 순간을 의미 있게 써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직업적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오랜 해외생활을 하다가 접했던 국뽕 공익광고 한편이 계기가 돼 이후 여러 편의 상업광고에 홀리면서 광고인이 돼야겠다고 결심했다가 (국뽕 광고도 광고지만 실제로 지금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유명한 카피들은 다 이때 나왔으니 2010년대 초반이 매체 광고의 전성기였다는 건 부정할 여지가 없다)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내 인생 첫 꿈으로 삼게 됐다. 그리고 처음 생긴 내 꿈을 붙잡겠다고 그걸 반대하는 엄마와 고2~고3으로 가는 1년 내내 미친 듯이 싸웠었지. (그러다 또 이유 없이 자궁에 20cm짜리 물혹이 생겨 고작 대입 시험을 한두 달 앞두고 수술을 받았다. 아이고야 내 인생.)
그 후 4~5년 차였던 대학교 1, 2학년 시절에는 정말 미친 듯이 바쁘게 살았다. '죽으면 이토록 무의미한 게 인생이니, 살아있는 매 순간을 의미 있게 써야 한다'는 그 생각이 강박이 되고, 굴레가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년 동안 해가 떠있는 대낮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을 만큼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미친 듯이 사람을 만나고 미친 듯이 일을 벌이고 미친 듯이 그 일을 수습하러 다녔다. 2년 동안 했던 대외활동만 해도 수십 가지였고 직접 함께 작업할 선배들을 찾아 도전한 광고 공모전만 세네 번이었다. 그 와중에도 꾸준히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생활비를 벌었고 교내 동아리 활동에, 외부 강연도 들어가며 틈틈이 국내로 여행도 다녔다. 물론 1학년 때는 학점 4.2, 2학년 때는 3점 후반대를 유지하며 학교생활이나 과제, 팀플도 열심히 했다. 지금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다시는 그렇게 살 수 없다고 확언할 만큼 그때는 날쌘돌이 소닉에 슈퍼마리오처럼 살았다. 그냥 그 풍파가 다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렇게 쉴틈 없이 쏘다니던 게 결국 내 마음속 공허한 구석들을 채우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엄마가 처음 "네가 그래서 쏘다니는 거잖아"라고 말했을 때 머리를 망치로 한대 세게 맞은 기분이었지. 알면 진작 좀 말해주지 쫌.
죽음 이후 5~6년 차, 그러니까 대학교 3학년 때부터 그렇게 바쁘게 사는 삶에 회의감이 진하게 찾아왔던 것 같다. 바쁘게 쏘다니던 일정들은 웬만하면 다 정리하고 휴일에는 주로 침대에 드러누워 시간을 보냈다. 잠을 자거나, 휴대폰을 보거나, 팟캐스트를 듣거나(한동안 강신주의 독설에 빠져 밤새 그가 나오는 팟캐스트만 주야장천 듣던 시절도 있었다) 침대에 딱 붙어있었다. 지나간 2년 동안 만들었던 관계는 다 쳐내고, 정리하고, 끊고, 차단하고, 내가 편하게 웃어 보일 수 있는 몇몇 사람만을 곁에 뒀다. 사실 죽음을 겪고 나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했던 시절보다, 열심히 살아보고 나서 현타가 진하게 찾아왔던 이 시기가 내 삶을 더 크게 바꿔놓은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고, 내가 하기 좋아하는 것과 견딜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내가 곁에 두고 싶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가려내던 시기였다. 나라는 인간의 정신적 에너지와 체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굴복하는 시간. 그래도 재밌는 건 이 시기에 다 했다. 항공사 대외활동에서 1등 해서 혼자 보름 동안 뉴욕 여행하기, 외교관 시험 준비 시작했다가 금세 때려치우기, 한 달 동안 휴대폰 번호도 바꾸고 아무도 모르게 제주로 가출하기, 삼수 끝에 어렵게 합격한 9개월 간의 광고회사 멘토링 코스까지, 내 인생에 참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굵직한 일들을 했다.
여기서 우스운 건 광고회사 멘토링 프로그램 참여 당시 내가 아빠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활동 끝자락 어느 대학 대강당에서의 대규모 스피치 행사 주제로 준비했다는 것인데(아빠가 돌아가신지 6년째 되던 해라 스피치 제목도 '6년'이었다), 이전 글에도 썼지만 그때 당시 죽음을 바라보던 나의 태도와 지금의 시각은 많이 다르다. 그때나 지금이나 6~7년 차가 지나던 시점부터 아빠가 돌아가신 지 몇 년이나 되었는지 세지 않은지 꽤 오래됐지만, 그때는 완전히 자유롭게 '나는 나를 속박하던 것(즉 가부장제)에서부터 벗어났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럼 너무 패륜아 같으니까) 지금은 당연히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그 후 어언 10년이 되기까지, 최근 2-3년 사이에 나는 긴긴 취준생 시절을 겪었고,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버는 경험을 쌓았고, 정규직으로 취업을 했고,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나가고 있다. 그리고 요즘은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선택한 그 이후의 삶과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죽음은 더 이상 내 일상을 무너뜨리거나 나를 괴롭히지 않지만, 아직도 이따금씩 내 꿈을 찾아와 여전히 나를 뒤흔들고 엉엉 울면서 잠에서 깨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내가 죽음으로 인해 겪고 있는 가장 큰 변화는, 내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삶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는' 단계까지 오게 됐다는 것이다. 생(生)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고, 생에 대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길 멈추고, 살아있는 동안 어찌해야 한다는 강박이나 굴레 속에 나를 가두기를 관두고, 그저 살기로, 살아내기로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이것도 저것도 못해보고 죽으면 억울해서 어떡하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 찐하게 사랑을 한다거나, 꼭 한번 가고 싶었던 세계 어느 곳에 가본다거나, 비싸고 고급진 코스요리를 먹는다거나, 한 번쯤 사고 싶었던 명품백을 산다거나, 혼자 운전해서 바다를 보러 간다거나 하는 것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생각들도 전부 다 부질없게 느껴진다. 안 해보고 죽으면 또 뭐 어때.
살아도 그만, 살아있지 않아도 그만.
그게 죽음을 마주한지 10년이 된 요즘 내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