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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Apr 17. 2017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언어로 된 세계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그 언어를 구사하는 사용자들과 그들의 세계까지 같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나라의 언어를 배워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비자발적으로 중국어를 배워서(부모님을 따라 어릴 때 중국에서 6년을 살았다), 사실은 그 나라, 나아가 그 언어권의 사람들이나 문화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그 언어를 붙잡고 있다. 때로는 그 언어가 내게 돈을 벌어다주지만, 실은 별다른 애정이 없다. 이렇게 지내온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느냐. 비교하니까 슬퍼졌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프랑스어과 언니는 그 나라의 문화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프랑스의 그림과 영화와 책을 사랑한다. 그 언니는 자기가 프랑스어를 구사해서, 그 언어로 된 작품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언어로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무척이나 행복해한다. 그러니 내가 갖지 못한 해당 문화권에 대한 애정이 있다. 훨씬 크다. 반면 나는 그런 애정이 거의 없다. 이건 단순히 나라 대 나라, 국격의 차이나 어느 문화가 더 우수한가- 당연히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 문화권의 코드가 나와 맞느냐 맞지 않느냐의 문제다. 


 처음 이 언어를 배울 때의 나는 너무 어려서, 나는 내가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코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러니까 나의 자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생존을 위해 언어를 습득했다. 그 기억은 지금도 별로 즐거운 추억이 아닌데, 어릴 때 집에 과외 선생님이 찾아오시면 너무 중국어를 배우기가 싫어서 숨바꼭질하듯이 거실 에어컨 뒤에 몸을 숨기고 한참 동안 나오지 않은 적이 있을 정도다.  물론 만다린으로 된 수없이 많은 작품들 중에 내가 즐기고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은 분명히 있겠지만, 이 언어에 대한 낮은 애착과 애정은 내가 그런 작품을 찾아다니게끔 노력을 기울이는 것까지도 귀찮게 만들어버렸다. 


 '그 언어를 배웠는데 더 이상 그 나라에 살고 싶지 않다', '그 언어를 배웠는데 더 이상 그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 이것만큼 이상한 저주가 또 있으려나. 어쩌면 나는 6년 전 그 나라를 떠나오던 비행기에서 생각하던 것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이 언어는 내게 돈벌이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쓰고 보니 굉장히 슬프네. 한때는 잠깐, 한국에 돌아와 전공 공부(아이러니하게 나는 지금도 대학에서 중국과 관련된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를 시작하면서 내가 이 나라의 이면을 본다 싶어 좋을 때도 있었지만, 그때 내가 느낀 재미와는 별개로 이 나라는 아직도... 겉만 '위대'하지 속은 텅 빈, 아니 썩은 강정 같다. 


 유구한 역사나 문화까지 갈 필요도 없이, 상대방이 무슨 일을 하든, 내가 만나온 그 언어 구사자들이 다 그랬다. 한 명도 예상을 벗어난 적이 없어. 옛날 어른들이 말하던 '뗏놈'이라는 말에서부터 시작해 요즘 쓰는 이른바 '종특'이라는 표현에 이르기까지, 말이 상스러워서 싫지만 반박할 수가 없다. 좋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 믿는 것과 좋은 사람을 실제로 만나보는 것은 정말 천지차이다. 어제 친구에게도 그랬다. 나는 중국어를 잘 하지만 그 언어로 된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어렵다고 느낀다고.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따라가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그냥 따라가기가 '싫은' 거다. 그럴 만한 가치를, 의미를 못 느끼니까. 그게 정말 좋다면, 그 '좋은 것'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으니까. 해당 문화를 폄하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화를 좋아하기엔 내가 이미 그 안에서 힘든 일을 너무 많이 겪고 못 볼 꼴을 너무 많이 마주쳐버렸다. 건드리기도 싫은 기억들. 한국에서도 계속된 기억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중국에서 친해진 엄마의 지인 분과 한국에서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만나 밥을 먹은 적이 있다. 그분이 내게 물었다. 다시 그곳에 안 가고 싶냐고. 그래서 나는 "그런 일을 겪었는데 다시 가고 싶겠어요"라고 말했고 다음날 나는 엄마에게 핀잔을 들었다. 그분이 그날 자기 아들과 같이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밤에 엄마랑 같이 잠을 잤는데 그랬단다. "xx이는 아직도 그 일로 중국을 많이 싫어하는 모양인가 봐-." 자기도 더하면 더했지 덜 괴로운 일을 겪진 않았으면서, 그렇게 말한다는 게 나는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이제 다 끝난 일이니까 나는 잊을래, 지울래' 하는 거랑 남이 가진 기억을 '너도 지워, 잊어버려' 하는 거랑 같은 선상에 있는 문제인 줄 아는 걸까. 이건 전혀 다른데. 


 어쨌든 그 나라에 대한 감정은 딱 그만큼이다. "그런 일을 겪었는데 다시 가고 싶겠어요"라는 말이, 씁쓸하지만 아직도 유효하다. 이제는 그 언어를 내 입맛에 맞게 이용하기만 한다. 돈을 벌어야 할 때, 그 언어로 돈을 벌 수 있을 때. 딱 그때만. 언어를 구사하는 실력은 비슷할지 몰라도, 이건 결국 그 언어와 문화권을 사랑하는 사람과는 천지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게 내가 이 언어를 구사하는 것에 있어 비극이라면 비극인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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