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
딱히 할 일이 없이 출근했다. 어제도 그랬다. 아무것도 아닌 날에 익숙해진다. 오전에는 평소보다 가볍게 청소를 했다. 며칠 전에 불편해 보이는 것들을 몽땅 정리했다. 그것들은 또 순식간에 자리를 차지한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책상 주변이 어수선하다. 며칠은 두고 볼 생각이다. 커피를 마시며 유튜브를 보는 일도 매일 똑같다. 유튜브 알고리즘에는 서서히 질리고 있다. 그러나 딱히 유튜브의 대안도 없다. 우주소년 아톰의 플로토 이야기는 재밌다. 은하철도 999의 메텔은 충격적이었고, 에어리어 88은 지금 봐도 멋있었다. 신진서 바둑은 역시 강하고, 조훈현의 응씨배 5번 국 이야기라던가, 이창호의 두터움 바둑, 이세돌의 축머리 묘수는 대단히 재밌다. 알파고와의 제4국에서 신의 한 수라는 78수를 본 해설자들의 탄성은 지금도 꽤 좋아하는 장면이다. 정치는 하루가 멀게 흑색이고, 손흥민과 김하성의 스포츠를 보다 보면 유튜브 알고리즘 한 바퀴를 돈 것이다. 자세는 말할 수 없이 흐트러져있다. 컴퓨터를 잠자기 모드로 해두고 일어나서 화초에 물을 주고, 입고 된 책을 조금 읽어 보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책방의 오전은 끝난다. 오후에도 같은 일을 반복했다. 책방의 시간은 오묘하게 흐른다. 손님은 거의 없고 책은 하루 한 권도 겨우 팔릴까 말까 한다. 책이 팔리면 만세를 부르고 싶어 진다. 오늘은 만세를 3번 불렀다. 이대로 괜찮을까? 다가오는 미래를 예측이라도 할 것 같지만 또 유튜브를 본다.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책방 8년 차에게 이런 일은 예사에 가깝다. 오늘도 아내와의 카톡창이 어지럽다. 돈에 관련한 이야기만 하면 우리는 비극으로 치닫는 드라마의 주연급이다.
책방에 앉아 내가 떠날 수 있는 최대치의 여행을 상상해 본다. 고개를 조금 오른쪽으로 돌리면 편의점이 보인다. 그곳에라도 갔다 와야 할까? 기대는 모두 버리고 운동화를 신었다. 불안은 이제 그만, 횡단보도를 건너며 스치는 사람들의 표정을 봤다. 열에 여덟은 최면에 걸린 듯 표정이 없었다. 몇몇은 우산을 쓰기도 하고 말아서 들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대부분의 땅은 젖어있었다. 비는 내린다고 하기도 그렇고 안 온다고 하기도 그랬다.
내가 가는 길은 사람들의 반대방향이었다. 의도하지 않았다. 나는 점점 어두워지는 어느 골목을 향해 걸었다. 점점 깊어지고 어두워졌다. 시력과 청력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불규칙하게 양철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배수로를 타고 흐르는 물소리는 어느 계곡을 연상케 할 정도로 쩌렁쩌렁했다. 불빛이 닿지 않는 골목의 끝과 골목의 입구를 번갈아 봤다. 나는 어느 도로의 혈관에 서 있다. 동맥보다는 정맥에 가깝다. 부패한 냄새로 알 수 있다. 썩은 내가 몸에 달라붙는 걸 느낀다. 발길을 돌려 골목을 빠져나왔다. 사방 어디를 봐도 낮은 담벼락 뒤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같은 아파트 불빛이 보였다. 여느 때보다 높고 멀게 느껴졌다. 돌아오는 길 미용실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손님은 한 명. 아마 마지막 손님일 것이다. 그들은 모두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책방으로 돌아간다. 모든 길은 다시 책방으로 연결된다. 책방은 나의 심장, 길은 나의 혈관. 잠시 쉬었다 집으로 가야지.
이랑의 삐이삐이를 흥얼거리며 내가 갈 곳으로 걸었다. 비는 완전히 그치고 달은 어딘가에 떠 있다.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by 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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