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구불시착 김택수 Oct 19. 2024

주머니 속의 장르 27

정면승부

모처럼 한가한 일요일이다. 사실 모처럼은 아니지만 모처럼이란 말이 쓰고 싶었다. 하찮은 멋이라도 부려보고 싶었다. 오늘 책방에 가면 큰 역병에 걸린다고 뉴스라도 난 건 아닐까? 할 정도로 한산하다. 혼자 있다 보면 심심하고 심심하면 주전부리가 생각난다. 하늘은 금방 소나기라도 내릴 것처럼 낮게 내려앉아있다. 물을 잔뜩 먹은 솜들이 힘들게 뭉쳐 있는 것 같다. 그래 일찍 문 닫자. 

결심은 빨랐다. 우산을 들고 잠시 망설이다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는다. 오늘의 모험은 우산의 선택이다. 비가 내리면 피하지 말자. 정면승부가 재밌겠다. 특별히 갈 곳이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전철을 타고 낙산으로 향했다. 요즘 인스타에 노을 사진이 많이 올라온다. 낙산에 가서 멋진 노을 사진이 찍고 싶었다는 이유로 낙산을 향하지만 오늘은 구름, 당장이라도 폭우가 쏟아져도 이상할 게 없는 날씨였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전후관계라는 것은 무시하기로 하자. 한때 익숙했던 동대문 역에서 성곽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 나의 낙산 코스이다. 창신동에서 올라가 이화 벽화마을을 지나서 혜화로 내려가 좋아하던 이음 책방에서 책을 사고 커피를 마시는 코스가 나의 낙산 스팟이었다. 이음 책방은 없어지고 성곽의 모양도 꾸준하게 진화된 모양이다. 내가 알고 있던 길과 상당히 달라져있었다. 하지만 곧 동화될 것이다. 고요함의 수준으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골목을 울리는 오토바이의 굉음이 텃세를 부리다 사라진다. 조금 올랐을 뿐인데 도시의 소음은 잔잔한 자장가처럼 자세를 낮춘다. 평화롭다. 나는 걸을 때 좋아하는 책의 내용을 재밌게 말하는 연습을 하며 걷는다. 이번에는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회전목마 타는 피비를 바라보는 홀든의 평화를 이해하고 싶었다. 갑자기 비가 내리고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움직이는 순간에 왠지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홀든처럼. 


비라도 내렸으면 하면서 하늘을 올려봤다. 

이제 조금 땀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팔각정 평상에 앉아 좋아하던 버드나무를 바라봤다. 예전의 잘생김은 사라지고 말았다. 성곽의 조경공사가 낙산 명물 하나를 지워버린 것 같았다. 그곳에 더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


이제 곧 낙산 정상이다. 정상까지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숲 속 어딘가 그림자 짖은 곳에서 기척을 느낀 순간 금속처럼 날카로운 것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상당한 출혈을 느끼며 "윽"하는 짧은소리를 내고 쓰러진다. 드라마였다면 비장한 BGM이 나와야 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BGM 따위는 없다. 그래서 내가 직접 부르기로 한다. smile though your heart is aching 가사가 어려워 허밍으로 대처하기로 한다. 템포가 원곡보다 조금 빨랐으면 좋겠다. 나는 예전부터 나의 장례식에 이 노래가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내 인생 최후의 신청곡이 smile이라면 근사한 주인공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노래를 부르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대로 있다간 더 많은 모기들이 몰려와 정말 모기밥으로 생이 끝날지도 모르겠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았다. 


낙산 정상에는 낙산에서 태어나 한 번도 이곳을 벗어난 적이 없을 것 같은 시원한 낙산형 바람이 불었다. 하늘의 별이 모두 도시에 내려앉았다. 이미 몇몇의 커플들이 야경 앞에서 감탄하며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인스타에 수없이 올라오는 질 낮은 사진을 올리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로 조금 다가가 도시를 내려다봤다. 남산에서 북한산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는 도시의 별들은 가로로 길게 누워 평화롭게만 보였다. 어떤 별빛은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하게 보였다. 기억에 담아 가는 방법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비가 내리길 바랐다. 절대 피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걸었다. 

(사실은 그런데 정말 비가 내리면 어떡하지?라고 썼다가 급하게 수정했다. 생각해 보니 소년이 온다의 첫 문장이 그렇게 시작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맞나? 내 기억은 항상 의심스럽다. 비가 내려도 피하지 않는 객기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유난히 비에 관해서는 오기를 부린다. 우천결행 같은 말을 좋아하고, 우천취소란 말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이다.)



지구불시착은 현재 인스타 계정 하나로만 홍보하고 있어요. 해시태그 지구불시착이나, 지구불시착 계정 @illruwa2를 팔로우해 주세요.  



 by 김택수

https://www.instagram.com/illruwa2/



매거진의 이전글 주머니 속의 장르 2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