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이름은?
표지가 별로였어요. 제목도 당기질 않고. 하지만 정답은 그런 게 아니죠. 첫 페이지를 읽고 조금 안도했어요. 맘에 속 드는 문장이 있었죠.
아빠가 나를 잡초처럼 획 뽑더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싹 챙겼다. 아니, 사실 아빠는 내 것들을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 밤나무, 버드나무, 단풍안무, 그리고 건초를 말리는 헛간과 내가 수영하던 웅덩이 같은 것들 말이다.
오늘도 바쁜 하루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 더 바쁜 것도 책방에서는 가능하다. 저녁 해가 지고 골목이 어두워졌다. 책방의 조명이 할 일을 제대로 안다면 지나가는 누구도 걸음을 멈추게 할 정도로 비밀이 가득한 조그만 책방에서 하루를 보낸다는 건 항상 좋은 일이 아니다. 아주 심심하고, 졸리고, 배고플 때가 있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다. 잔잔에게 문자를 보냈다. '뭐 해? 책 읽으러 갈까?' 좋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퇴근 준비를 하고 잔잔을 기다렸다.
잔잔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잠깐 앉아 이야기하는 사이 커플이 들어와 지구불시착 그림 그리기 팁 한 권을 구매한다. 커플이 나가자 우리도 책방을 나섰다. 가까운 카페로 가 각자 준비한 책 100p의 분량을 읽으면 되는 미션이다. 책방 가까이에 좁은 삼거리, 골목을 나란히 바라보는 카페 중 한 곳을 골라 들어갔다. 커피와 소금빵을 주문하고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잔잔은 을유문학사의 아우스터리츠라는 소설을 읽었다. 문장이 시적이라 읽는데 다소 에너지가 소비된다고 했다. 중간중간 보이는 흑백사진이 책 감성을 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책 같아서 주문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청소년 문학을 읽었다. 첫 페이지의 문장이 맘에 들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책장이 더디게 넘어가는 중이었다. 잔잔은 준비한 메모지에 메모를 하며 부지런하게 책을 읽었다.
화장실에 갔다가 자리에 앉는데 건너편 카페에 커플이 보인다. 여자는 스마트폰을 보고 있고 남자는 하얗고 가로로 긴 책을 넘기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노트가 있어 책을 보며 뭔가를 따라 그리고 있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지구불시착 그림 그리기 팁을 보고 그리는 것 같았다. 잔잔에게 물어보니 아까 그 커플이 맞는 것 같다고 한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네. 스마트 폰을 꺼내 줌을 최대한으로 올려 사진을 찍었다. 관찰 카메라 같기도 하고 스토커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잔잔이 묻는다.
"왜 아까 사장님이 쓴 책이라고 말하지 않았어?"
나는 부끄러워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린 다시 책을 읽었다. 카페 종업원이 마감시간이 다 됐다고 했을 때는 이미 우리 둘만 남아 있었다. 읽고 있던 책의 페이지를 확인하니 116p였다. 약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잔잔도 그렇다고 했다.
집까지 걸으며 생각했다. 오늘 하루에 이름이란 게 있다면 어떤 이름이 적당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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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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