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수련 편]
언젠가부터 눈이 침침했다.
하늘이 차츰 노랗게 보였다. 수풀 또한 점점 불그스름한 모습을 띠었다. 있지도 않은 안개가 떠다니는 듯도 했다. 1912년 어느 날, 이러한 이상함을 느낀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비볐다. 처음에는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다. 붓을 놓고 며칠 쉬면 괜찮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 눈은 계속 불편했다. 정도가 심할 때는 아예 온 세상이 뿌옇게 보이기도 했다. 모네는 결국 안과를 찾았다. "내 눈이 왜 이렇소?" 의사에게 물었다. 약만 며칠 먹으면 낫는다는 말을 바랐지만, 의사의 표정은 사뭇 심각했다. "모네 선생님. 수술을 하셔야 합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오?" 의사의 말에 놀란 모네가 바로 응수했다. "정말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모르셨어요?" 의사는 한숨을 쉰 후 말을 덧붙였다. "백내장이에요. 이미 꽤 심각한 단계까지 왔어요."
내 눈에 칼을 댄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혹시 무언가 어긋나면? 앞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된다면? 모네의 걱정은 기우로 볼 수 없었다. 실제로 당시 백내장 수술은 실명 위험이 컸다. 백내장이란 투명해야 할 눈 안쪽 수정체가 하얗게 변하는 병을 말한다. 카메라로 치면 렌즈 역할을 돕는 조직이 혼탁해지는 것이었다. 그 시절 수술은 눈을 찢고 문제의 수정체를 빼는 식으로 이뤄졌다. 아직은 인공 수정체가 개발되지 않은 때였기에, 수술은 그걸로 끝이었다. 환자는 이후 수정체 없이 살아야 했다. 이로써 눈앞 성가신 안개는 없을 수 있지만, 그뿐이었다. 온갖 부작용이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우선 시력이 나빠졌다. 빛도 곧이곧대로 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수술 중 눈을 꽤 길게 절개하는데, 운이 없으면 이때 실명할 수도 있었다. 모네는 서둘러 외투를 챙겼다. 수술 날짜를 묻는 의사를 뒤로한 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무서웠다.
너무 무서웠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모네는 또다시 찾아온 고초에 절망했다. 물론 그에게 이런 시련이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누구든 갑작스럽게 역경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 정도면 이제 이따위 일은 겪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닐까. 모네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름 이유는 있었다. 모네는 늘 뒤통수를 맞았다. 드디어 행복을 쥐었다고 여긴 순간 잠자코 있던 불행이 뒤늦게 고개 드는 식이었다. 불화와 가난, 능멸과 모욕, 사랑하는 이의 죽음…. 녀석의 표정은 이처럼 다양하기까지 했다.
실명의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모네는 수술을 차일피일 미뤘다. 희끄무레한 장애물을 애써 모른 척했다. 그러는 동안 눈은 더욱 악화하고 있었다. 가령 1899년, 모네가 병을 인지하기 전 그린 〈수련과 일본식 다리〉를 보면 당시 그가 무엇을 어떤 마음으로 그렸는지 알 수 있다. 눈앞 펼쳐진 그의 지베르니 정원이 무척 아름다웠기에, 그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수술을 미루며 살던 1922년께 그린 〈일본식 다리〉에선 그 감정을 느끼기 어렵다. 같은 이가 그렸다곤 단박에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분위기가 바뀌었다. 정말 다리와 수련을 그린 게 맞는지 의문이 생긴다. 언뜻 보면 캔버스에 붉은색 물감을 난도질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림 자체가 불타오르는 듯도 하다.
"세상은 여전히 예쁘지만, 나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오."
이쯤 모네는 친구에게 이런 글을 썼다. 암담한 나날들이었다. 모네는 이제 왼쪽 눈으로 겨우 형상만 알아볼 수 있었다. 오른쪽 눈은 실명 상태였다. 화가에게 눈은 생명 그 자체였다. 그간의 역경은 잘 버텼다고 한들, 이번만큼은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는 말도 그의 주변에서 공공연히 나돌았다. 모네는 이번 시련을 어떻게 대했을까. 아울러, 그는 여태 무슨 고초를 겪어왔기에 백내장이라는 말에 더 크게 절망할 수밖에 없었을까. 끝내 동시대 가장 위대한 화가로 이름을 올린 모네의 삶은, 알고 보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모네의 첫 시련은 아버지와의 불화였다.
둘 사이 갈등은 부모와 자식 사이 으레 있는 다툼으로 볼 수 없었다. 서로 절연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정도가 심했다. 부유한 상인으로 집안을 이끈 아버지는 진작부터 모네를 못마땅하게 봤다. 모네는 1840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모네가 가업을 잇기를 바랐다. 그러나 모네는 사업에 전혀 뜻이 없었다. 그가 관심을 보인 건 그림이었다. 아버지는 녀석이 교과서를 두고 꾸벅꾸벅 조는 모습에 가슴을 쳤다. 돈을 받고 캐리커처를 그린다는 말에는 머리를 쥐어박을 뻔했다.
결국 아버지가 한 수 접었다. 소년 시절 모네는 영국 해협의 항구 도시 르 아브르에서 살았다. 그곳에 있던 풍경화의 대가 외젠 부댕(Eugene Boudin·1824~1898)이 가정 교사로 그를 지도했다. 부댕은 모네에게 외광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을 가르쳤다. 빛의 밀도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을 낚아채는 법도 알려줬다. 소년의 가슴에 인상주의 씨앗이 움튼 순간이었다. 그렇게 감각을 키운 모네는 여행용 가방에 화구를 잔뜩 쑤셔 넣었다. 야망을 품고 파리로 돌아왔다. "정 그렇게 살고 싶다면, 그나마 돈벌이가 될 전통 양식을 따르거라." 아버지의 당부가 있었지만, 이 또한 귀담아듣지 않았다.
1862년, 고전 회화의 베테랑인 샤를 글레르(Charles Gleyre·1808~1874) 밑에 들어간 건 좋았다.
문제는 모네가 그곳에서 영 적응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다. 모네는 빛을 찾아 밖을 자유롭게 나도는 데 익숙했다. 그런 그에게 옛 거장의 그림 베끼기만 강요하는 수업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언제까지 그 따위 풍경화만 그릴 텐가?" "그러면 선생님은 언제까지 남의 그림을 답습하기만 하실 겁니까?" 모네는 끝내 글레르와 크게 충돌했다. 모네는 그의 화실에서 뛰쳐나왔다. 아버지는 또 속이 터졌다.
인내심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아버지와 달리, 모네는 이제야 행복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모네는 그와 뜻을 함께한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1841~1919), 프레데릭 바지유(Frederic Bazille·1841~1870)와 함께 파리의 거리를 열심히 쏘다녔다. 모네는 숲과 광장, 바다와 강변의 햇빛 아래 마음껏 이젤을 펼쳤다. 그는 그간 없던 새로운 일을 벌인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그도 그럴 게, 당시는 화실에 틀어박혀 붓을 드는 게 당연한 때였다. 밖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일 자체가 흔치 않은 시대였다.
1865년, 모네는 더 큰 기쁨을 찾았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모네는 일곱 살 연하의 여인, 카미유 동시외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녀는 눈이 크고 깊은 직업 모델이었다. 모네는 동시외에게 스스럼없이 마음을 전했다. 진실한 마음은 통했다. 2년 뒤 둘은 동거에 나섰다. 카미유는 그의 아이까지 뱄다. 혼전(婚前) 임신이었다. 참고 참던 아버지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결국 폭발했다. 그림이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당장 집으로 오기를 명령했다. 따르지 않으면 그간 보내준 생활비를 싹 다 끊겠다고 협박했다. 하지만 모네는 그럴 수 없었다. 꿈과 사랑 모두 포기하지 못했다. 1870년, 모네는 동시외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하객석이 썰렁했던 이 행사는, 아버지와 그사이 돌아갈 수 없는 강이 생겼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한 말을 물리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생활비를 뚝 끊어버렸다.
그 시절 모네는 수입이 없었다.
고단한 삶의 시작이었다. 지독히도 통제하려 드는 아버지에게 할 말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든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가난은 지독히도 찰싹 달라붙었다. 모네는 동료 화가에게 빵도, 기름도, 붓과 물감도 빌려 써야 했다. 이마저도 구할 수 없을 땐 맹물만 꼴깍꼴깍 삼켜야 했다. 동시외와 아들 장 또한 차가운 방구석에 웅크린 채 있어야 했다.
1874년, 모네는 에드가 드가(Edgar De Gas·1834~1917), 르누아르 등 그처럼 전통을 따르지 않는 문제아들과 일종의 독립 전시회를 열었다. 모네가 출품한 건 〈인상, 해돋이〉였다. 그가 르 아브르에 있는 집 밖 항구를 그린 그림이었다. 더 정확히는, 항구를 보고 느낀 즉흥적 인상을 담은 결과물이었다. 이 작품은 범상치 않았다. 어디 하나 제대로 그려진 게 없었다. 해와 바다, 배와 사공, 저 멀리 보이는 공장과 연기 모두 흐릿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바다 위를 유영하는 빛 조각들이었다. 이는 별생각 없이 휙휙 그은 것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 장르는 풍경화지만, 느껴지는 감정 또한 위압감이 아닌 애잔함 뿐이었다.
이 그림 때문에 전시장이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 따위 그리다 만 캔버스를 내걸 수 있느냐며 분개했다. "멋있는 척 폼만 잡은 그림", "비위가 상하는 표현 기법" 등 모욕적인 말도 이어졌다. 미술 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벽지보다 못한 종잇조각"이라고 대놓고 모멸감을 줬다. 분이 풀리지 않은 이 사내는 모네와 그의 동료를 향해 "인상주의자들!"이라며 비꼬기도 했다. 이 또한 모네의 그림 제목에서 따와 붙인 조롱이었다. 지금은 인상주의라면 내리깔린 외광이 자아내는 한순간의 인상을 그리는 기법으로 통한다. 형상은 포기하면서까지 딱 그때 받은 느낌을 표현하는 19세기 중후반의 주요 화풍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모네가 〈인상, 해돋이〉를 내놓은 시절에는 뻣뻣한 고전 양식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모네가 만든 '인상주의'라는 말은 당시 그림을 제멋대로 그린다는 욕으로 치부됐다. 모네는 재차 절망했다.
또다시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을 때쯤 드디어 기쁜 소식이 모네 앞에 놓였다.
외풍에도 굴하지 않고 그린 그림이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다. 수완 좋은 화상 폴 뒤랑뤼엘과 돈 많은 사업가 에르네스 오슈데의 공이 컸지만, 끈질기게 붓을 쥔 그의 우직함도 빛을 발한 것이었다. 유명인과 큰 손이 함께 움직이자 다른 사람들도 큰 관심을 보였다. 덩달아 인상주의 화풍도 차츰 재평가받고 있었다. 모네는 그토록 바란 호시절을 만끽했다. 어제보다 오늘 더 많은 돈을 버는 날이 이어졌다. 이제 그는 가정부를 여럿 뽑을 만큼의 여유를 누렸다. 모네는 다시 거머쥔 이 행복이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지 못했다. 지긋지긋한 불행은 기다렸다는 듯 또 고개를 쳐들었다.
1879년, 6월. 아내 동시외가 죽었다.
고작 서른두 살 나이였다. 사인은 자궁암이었다. 모네가 가장 힘들 때 그를 챙긴 그녀는, 정작 제 몸은 돌보지 못한 것이었다. 모네가 이를 알아차렸을 때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동시외는 둘째 아들 미셸을 낳은 후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그녀는 얼마 뒤 무기력하게 눈을 감았다. 알록달록한 유채색에 발을 디딘 모네의 삶은 다시 무채색으로 바뀌었다. 모네는 죽은 동시외를 두고 그림을 그렸다. 그만의 추모 방식이었다. 모네의 〈임종을 맞은 카미유〉를 보면 당시 그가 얼마나 혼이 빠져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모네는 원래도 대상을 흐릿하게 그렸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동시외를 차마 눈 뜨고 응시할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더욱 옅고 불분명하게 표현했다. 그런가 하면, 그렇게나 밝은색을 좋아한 그가 이 그림에는 차분한 흰색과 푸른색, 회색과 보라색만 가득 칠했다. 모네는 그림 우측 아래 평소에는 하지 않는 표식을 담았다. 검은색 하트였다. 그 안에는 동시외에 대한 사랑과 그간 잘해주지 못한 데 대한 후회, 기구한 삶에 대한 망연자실함 따위가 뒤엉켜있었다.
모네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그는 1883년, 파리 근교의 지베르니로 이사했다. 큰 집을 샀다. 평생소원이던 정원도 꾸몄다. 연못을 판 뒤 그곳에 수련과 아이리스도 잔뜩 심었다. 1892년에는 두 번째 결혼도 했다. 상대는 한때 그를 물적으로 도운 사업가 오슈데의 아내 알리스였다. 무리한 투자로 파산한 오슈데는 알리스와 자식을 둔 채 숨고 말았는데, 사실상 버려진 이들을 모네가 한 지붕 아래 받아들였다. 둘은 그게 인연이 돼 손을 맞잡았다. 모네는 다시 평화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이번만큼은 누구도 이를 깨뜨릴 수 없을 것으로 여겼다. 그는 정원을 가꾸고, 정원 사이를 걷고,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죽였다. 눈이 조금씩 불편해지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안의 일종으로 인지했다. 그게 백내장의 증상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백내장 판정을 받고도 참고 참던 모네는 1923년, 여든세 살에 이르러서야 수술을 받았다.
"지금은 실제 관찰이 아닌, 기억에 새겨둔 인상에 의존해 그림을 그린다오." 지인에게 이렇게 고백한 뒤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드디어 그만이 볼 수 있던 자욱한 안개가 사라졌다. 실명의 위험 또한 겪지 않았다. 하지만 수정체가 없는 데 따른 부작용은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심한 원시를 앓았다. 세상이 온통 파랗게 보이는 청시증도 겪어야 했다. "수술한 게 너무도 원통합니다. (…) 끔찍하게 실망스럽습니다." 모네는 의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다시 색을 보고 싶은 모네의 바람은 실패한 듯했다.
하지만 모네는 끝까지 붓을 쥐었다. 절망도 잠시였다. 모네는 스러지지 않았다. 그간의 갖은 시련 앞에서 늘 그랬듯, 그는 다시 뚜벅뚜벅 앞으로 걸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꿋꿋이 해나갔다. 모네는 이 시련과 친해지기로 했다. 그것은 파란만장한 삶을 보낸 말년의 그가 얻은 깨달음이기도 했다. 모네는 색을 똑바로 보기를 포기했다. 빛이 번져보이면 그대로, 대상이 파랗게 보이면 이 또한 그대로 그렸다. 자기만 볼 수 있는 세상의 풍경을 화폭에 옮겨담았다. 그는 죽기 1년 전에 〈등나무〉를 그렸다. 푸르죽죽한 선만 눈에 띌 뿐, 제목을 보지 않으면 무엇을 그렸는지 짐작조차 하기 쉽지 않다. 등나무가 실제로는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면서도 이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의 말년작은 당시 꿈틀대던 추상 회화에 영감을 안기기도 했다. 모네는 또 한 번 불행을 넘어섰다.
곡절 많은 삶을 유영한 모네는 1926년 12월25일, 폐암으로 사망했다.
여든여섯 살 나이였다. 그는 고장난 눈을 뜬 채로 그때도 그림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렇게 우직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 많은 격랑을 짓누르고 나아갈 수 있었을까. 모네의 삶을 보면 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시련으로 단련시킨다는 격언이 떠오른다. 하늘이 누군가에게 사명을 주려고 할 때는 반드시 고통부터 안긴다는 옛 구절도 곱씹게 한다. 동료 화가들은 그가 빛이 넘실대는 하늘에선 잔잔한 행복만 가득 누리길 기원했다.
〈참고 자료〉
Monet, Christoph Heinrich, Taschen
Monet, 소피 포르니-다게르, 열화당
클로드 모네, 크리스토프 하인리히, 마로니에북스
클로드 모네, 재원아트북 편집부, 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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