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 레핀-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편]
그날은 기분 좋은 휴일이었다.
소파에 등을 기댄 노인은 조용히 콧노래를 불렀다. 피아노에 손을 올린 여인은 그 음에 맞춰 동요부터 민요, 유행가까지 막힘없이 연주했다. 아이들은 발끝에 닿는 햇빛을 문지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카메라가 있다면 그대로 찰칵 찍은 뒤 액자에 모셔두고 싶은 순간이었다. 부엌에선 앞치마를 두른 하녀가 경쾌하게 도마를 두드렸다. 이어 고소한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음식이 다 된 모양이었다. 이들은 식사 후 나들이를 갈 생각이었다. 잔디밭에 자리를 깔고 따뜻한 홍차를 마실 요량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생각지도 못한 일로 망가졌다.
"사모님, 지금…." 시작은 하녀의 조심스러운 노크였다. "식사 준비가 끝났어요? 애들이랑 같이 나갈게요." "그게 아니고요. 한 남자가 찾아왔는데요." 이날 오기로 한 사람이 있었는가. 방 안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다들 어깨만 으쓱했다. "누구라고 하는가요?" 되묻는 순간, 안방 문이 활짝 열렸다. "죄송해요. 밀고 들어와서 막을 수 없었어요. 당신은 누구신데 이런 무례함을…" 하녀가 도끼눈을 뜬 채 낯선 이를 쏘아붙였다. 하지만 눈앞 펼쳐진 광경에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네가 어떻게…."
초라한 남성을 본 노인의 말이었다. "여보…." 여인의 입에서 나온 단어였다. "내가, 왔어."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던 사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어 수차례 마른 기침을 했다. 사내는 벌떡 선 채 굳어버린 노인의 자식이었다. 피아노 앞에서 그대로 얼어버린 여인의 남편이었다. 길고 긴 세월을 건너 돌아온 그는, 이 집안의 가장이면서 동시에 한 정치세력의 열성 당원이었다. 사내는 이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이날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갈라졌던 가족 사이 상봉치곤 공기가 영 어색했다. 노인은 당장 달려가 아들을 안지 않았다. 여인 또한 울면서 남편에 매달리지 않았다. 잊고 있던 아버지의 등장에 아들은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존재 자체를 망각해버렸던 막내딸은 대놓고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녀와 동네 이웃 또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무도 사내가 집에 돌아오는 걸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Ilya Repin·1844~1930)이 그린 이 그림은 제목조차 의미심장했다. 이 가족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작품의 바탕이 되는 사회상부터 살펴봐야 한다.
1879년에 결성된 러시아 제국의 '인민의 의지당'은 농민 봉기를 끌어내 보수적인 차르 전제정(專制政)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도 급진적이었던 선전과 부채질은 외려 대다수 농민과 노동자에게 거부감만 살 뿐이었다. 결국 인민의 의지당은 노선을 다시 짜야 했다. 그것은 적은 지지층으로도 할 수 있는 암살과 테러였다.
인민의 의지당 계열 단체들은 그해 11월 중순부터 당시 차르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1818~1881)에 대한 암살을 세 차례 이상 시도했다.
처음에는 철도 수비대로 위장 취업해 알렉산드르 2세를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일정을 잘못 파악해 허무하게 실패했다. 그다음은 알렉산드르 2세를 태운 기차가 지나는 철로 밑에 폭탄을 깔았다. 예정대로 기차가 달리긴 했지만, 하필 설치해둔 게 불량품이었다. 이들은 절치부심의 마음으로 재차 철로 아래 폭탄을 설치했다. 이번에는 확실히 작동했다. 그런데, 녀석은 애꿎게도 알렉산드르 2세가 탄 기차가 아닌 수행원들이 탄 기차가 지날 때 폭발했다. 더 굴욕적인 건, 이 일로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인민의 의지당은 1881년 3월 1일에 다시 기회를 잡았다. 이날 알렉산드르 2세의 행렬 일정을 입수한 인민의 의지당은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핵심 당원들은 차르의 숨통을 끊기 위해 단검과 권총, 사제 폭탄과 다이너마이트까지 챙긴 뒤 곳곳에 잠복했다. 이들은 먼저 알렉산드르 2세가 탄 마차를 부쉈다. 그가 콜록대며 밖으로 나오자 그대로 폭탄을 투척했다. 기습을 당한 차르의 최후는 끔찍했다. 그는 팔다리가 찢어진 채 비명을 질렀다. 고통에 허우적대다 끝내 숨지고 말았다.
인민의 의지당은 몇 년을 매달린 끝에 과업을 마쳤다.
이제 러시아 각지에서 혁명이 터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농민은 칼과 곡괭이를 들고 진격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르 2세의 참혹한 죽음에 충격을 받은 민초는 되레 인민의 의지당에 반감을 표하는 기류였다. 역풍이 제대로 불었다. 수사 당국은 여론의 눈치를 볼 일 없이 피의 숙청에 나설 수 있었다. 현장에서 붙잡힌 당원들이 다른 가담자의 신원을 술술 불었다. 관계자가 줄줄이 붙잡혔다. 이들 모두 모진 고문을 받았다. 숨통이 붙어있으면 시베리아 유배지로 내몰렸다. 그렇게 온도가 영하 수십도로 곤두박질치는 곳에 맨몸으로 추방됐다. 사실상 사형 선고였다.
"네가…. 살아있을 줄은 몰랐다."
돌아온 아들을 빤히 쳐다보던 노인이 겨우 입을 뗐다. 인민의 의지당. 그가 속했던 정치 세력 이름이었다. 한때 차르 암살에 가담했던 그가 혹독한 고문과 유형을 모두 견디고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사내는 들끓는 피를 안고 정치에 입문했다.
권위적인 차르 정부의 행보는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는 마음속 불꽃에 이끌려 가장 과격한 길로 들어섰다. 어느새 인민의 의지당까지 왔고, 나아가 암살과 테러 업무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속한 당은 이름과는 무색하게 농민에게 전폭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 작전 또한 어설픈 실패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럴수록 이 일에 더 매섭게 매달릴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나름의 사명감을 불태우는 동안 나머지 가족은 어땠을까.
그의 가문은 농민 내지 노동자 집안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화려한 벽지와 고급스러운 가구가 깔린 그림 속 거실 풍경으로 볼 때, 외려 차르 정부에서 고위직을 맡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당장 부모부터 저돌적인 아들의 행동에 긴 시간 속이 탔을 게 확실하다. 아내 또한 나가기만 하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남편 모습에 밤을 지새웠을 게 분명하다.
사내는 종종 집에 있을 때도 쉬지 않고 혁명 정신을 설파했을 것이다.
화폭 정면에 걸린 액자 중 왼쪽에선 차르 전제정을 맹렬하게 비판한 시인 타라스 셰브첸코로 짐작되는 얼굴이 보인다. 오른쪽은 농민의 아픔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한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의 초상화로 추정된다. 이들 사이에는 희생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그림 또한 떡하니 걸려있다. 사내가 밖에서도, 안에서도 뼛속 깊이 인민의 의지당원이었음을 상징하는 소품들이다. 가족은 스스로 생각하는 더 중요한 이상을 위해 모든 것을 내팽개친 자식이자, 남편, 가장인 그를 최대한 존중했을 것이다. 가끔은 지금 가는 길이 정녕 맞는지, 농민과 노동자마저 왜 호응하지 않는지를 짚어보라고 애원하면서도 뒷바라지는 멈추지 않았을 터였다.
사내는 끝내 알렉산드로 2세를 죽이며 과업을 마쳤지만, 얼마 안 돼 비밀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연기처럼 증발하고 말았다. 가족 모두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말을 잃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분명 슬펐다. 가엽고, 불쌍했다. 이 와중에 마음 한편에서 솔솔 피어나는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쉽사리 표현할 수 없는 해방감이었다. 이제 밑빠진 독처럼 돈 나갈 일이 사라졌다. 압수와 수색, 미행 등 살 떨리는 정부의 감시망도 피할 수 있었다. 과격분자가 사는 집이라는 식의 지긋지긋한 소문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1년이 흐르고, 곧이어 3년이 또 흘렀다.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가족은 그가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노인과 여인은 상복 같은 검은 옷을 입는 등 나름의 애도를 표했다. 모두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암묵적인 합의였다. 이들은 빠르게 일상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니까 딱 이런 무렵, 사내가 예고 없이 돌아온 것이었다.
노인과 여인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본능적인 반가움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그의 눈빛을 보곤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눈빛은 그대로였다. 퀭한 표정, 비쩍 마른 몸, 거지꼴의 행색을 하고도 두 눈만은 여전히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는 모든 시계가 과거의 불안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방 안의 모두가 형용할 수 없는 당혹감에 휩쓸렸다. 노인과 여인은 원망과 두려움, 공포와 불안감이 피어나고 있다는 걸 감추지 못했다. 사내 또한 수년간 바란 이 순간이 꿈과는 너무도 다른 데 대해 말을 잃고 말았다.
천륜(天倫)은 신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실타래기에, 많은 이가 그 끈끈함을 믿고 자기도 모르게 가족에게 상처를 주곤 한다.
혈육의 무한한 이해에 기대 많은 순간 가정보다 일, 집안보다 현장을 택하는 식이다. 이들 모두 매 순간 최선의 길을 골랐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옆을 보면 나란히 있어야 할 가족이 없는 일을 겪곤 한다. 정신 차려보니 저 혼자 이방인이 됐음을 느낀다. 혈육은 저만치 떨어진 채 그들만의 세계를 꾸려가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사실 모든 종류의 사랑이 그렇듯, 가족과의 사랑 또한 필사적인 노력으로 가꿔야 하는 것이다. 샘솟는 배려를 당연하게 보는 순간, 불행이 멀리서도 착실히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이 펼쳐진들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상황이 최악에 치닫게 되면 비극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정도 분위기에서 멈추지 않을 수도 있다.
레핀의 〈이반 4세와 그의 아들〉은 가족의 헌신을 당연히 여길 때 빚어질 수 있는 극단적 재앙을 묘사하는 작품이다. 루스 차르국(옛 러시아 제국)의 지도자 이반 4세(Ivan IV·1530~1584)는 원래 유능하고 결단력 있는 황제였다. 벼락의 신처럼 위엄있는 군주, 아울러 천둥과 번개처럼 두려운 군주라는 뜻에서 뇌제로 불린 남자였다. 그런 그는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만이 옳다는 생각에 갇혔다. 모두가 잠자코 따르기를 강요했다. 그렇게 이반 4세는 고집불통의 노인이 되고 말았다. 황실의 식구는 세세한 일정은 물론, 음식 하나까지 눈치를 봐야 했다.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 끝내 사건이 터졌다. 이반 4세는 그를 챙기러 온 황태자비, 그러니까 며느리의 복장을 보고 발끈했다. 임신한 여자가 어떻게 얇은 옷을 입을 수 있느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조신하게 입으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이반 4세는 황태자비가 감히 자신에게 반항한다고 생각해 응징했다. 거칠게 밀치고, 그것으로 모자라 쓰러진 그녀를 마구 폭행했다. 황태자비는 이 일로 유산을 경험했다. 참다못한 황태자가 씩씩대며 이반 4세의 방 앞에 찾아왔다. 우리가 대체 어디까지 맞춰야 하느냐며 소리를 빽 질렀다. 아집에 사로잡힌 이반 4세는 이 또한 항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꼬챙이 같은 쇠지팡이를 들고와 황태자의 머리를 때렸다. 그곳이 하필 급소였다. 황태자는 픽 쓰러졌다. 잠깐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곧 숨통이 끊어졌다. 정사(正史) 아닌 소문에 가까운 설이지만, 레핀의 그림을 그리던 시절 상당수 국민은 이를 실화처럼 믿었다.
그림 속 이반 4세는 공포에 질려있다. 그는 가족의 무조건적인 배려란 언제나 당연하다는 식의 망집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 그는 뒤늦게 자기가 벌인 일을 돌아보고 있다. 자기만의 세상에 사로잡혔던 이반 4세는 황태자와 황태자비, 세상 빛도 못 본 손주까지 죽이고 말았다. 이제야 뒤늦게 후회하고 있지만, 모든 건 엎질러진 후였다.
그렇다면 가족과의 사랑을 다지기 위해선 무슨 노력부터 해야 하는 것일까.
그 첫걸음은 사랑을 말할 수 있을 때 아낌없이 그 감정을 보이는 게 아닐까. 레핀의 〈신병 배웅〉이 이를 보여주는 가장 바람직한 그림일 것이다. 온 가족이 한 청년을 둘러싸고 있다. 이들은 이제 막 입대하는 청년에 대해 안고, 흐느끼고, 다독이며 아낌없이 슬퍼한다. 진지한 표정의 청년 또한 매달린 여인을 꽉 끌어안으며 아쉬움을 감추지 않는다. 이들 모두 주변의 보는 눈과는 상관없이, 할 수 있을 때 서로에게 사랑을 듬뿍 표하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계속 말하고 거듭 행동함으로써 각별함을 전하는 것. 천륜의 실타래 또한 이런 식으로 더 탄탄해질 수 있는 것이다. 전선에 선 청년, 다시 생을 꾸려가는 가족 모두 서로에게 보인 솔직한 마음을 두고두고 꺼내볼 터였다. 그 순간을 곱씹으며 마음만은 함께라고 생각할 것이다. 1년 뒤 재회하든, 10년 뒤 다시 보든, 이들 사이 낯섦의 감정은 없을 게 분명하다.
레핀은 러시아 최고의 사실주의 화가로 꼽힌다. 특히 인물과 인물 사이 감정선을 예민하게 표현한 예술가로 통한다. 그의 모든 그림이 잘 짜인 소설 같은 밀도를 갖는다는 평이 따라오는 까닭이다.
레핀은 1844년 당시 러시아 제국 땅이었던 우크라이나 추구예프에서 출생했다. 그림에 재능을 보인 레핀은 186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황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레핀의 실력은 그곳에서도 독보적이었다. 1871년에 성서를 주제로 〈야이로 딸의 부활〉을 그려 졸업작품전에서 금상을 받았다. 6년짜리 유학 기회도 잡을 수 있었다. 레핀은 부푼 꿈을 안고 오스트리아 빈, 이탈리아 로마, 프랑스 파리 등 유명 도시를 견학했다. 이 과정에서 인상파 같은 아름다움 그 자체를 표현하는 화풍에 끌리기도 했지만, 이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레핀은 지금의 시대상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게 그에게 더 맞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유학 기간이 남았는데도 망설임 없이 귀국했다.
돌아온 레핀은 전쟁과 봉기가 이어지는 19세기의 격동기 속 러시아 국민의 삶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러시아 전역을 돌며 전시회를 연 이동파에 합류했고, 이를 계기로 소외된 민중의 생활상을 더 파고들 수 있었다. 레핀은 이 시기에 혁명을 주제로 한 그림을 주로 그렸다. 다만 단편적 묘사에만 그치지 않았다. 투사와 투사의 가족 사이 복잡한 심리를 담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처럼 한층 더 입체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이는 인간과 시대에 대한 깊은 고찰이 있어야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레핀은 1894년부터 13년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일했다. 그는 화가란 사회 현상 비평가이며, 그렇기에 사회적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걸 강조했다고 한다. 레핀은 생의 말년을 주로 핀란드 쿠오칼라에서 보냈다. 그는 1930년에 86세 나이로 영영 눈을 감았다.
끝으로 다시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를 보자.
사실 이 그림 또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입체적인 그림이다. 그저 엉켜버린 가족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그린 듯하지만, 그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작품이다. 돌아온 투사와 남아있던 가족들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일까. 레핀은 이 그림에 손을 대기 앞서 남성 아닌 여성 투사가 등장하는 작품도 그렸다. 인물의 태도, 가구 배치 등 비슷한 면을 품은 두 그림은 뜻밖의 공통점도 갖는다. 그가 빼놓지 않고 중요하게 여긴 부분은 물감으로 정성껏 펴 발라 칠한 햇살이다. 이러한 빛은 그림의 분위기가 암울해지지 않도록 힘껏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 광경에서 깨달은 바 있는 혁명가가 이제라도 다른 면을 보인다면, 그리고 가족들 또한 다시 한번 마음의 문을 활짝 연다면, 꼬이고 막힌 관계 또한 햇빛에 눈 녹듯 풀릴 수 있을 것을 기대하게 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또, 민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산산조각나도 다시 짜맞출 수 있을 만큼의 끈끈함으로 무장한 존재가 아니던가. 국민의 삶, 민중의 생활상에 천착한 레핀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참고 자료〉
일리야 레핀,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영혼, 일리야 레핀, I. A. 브로드스키, 써네스트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 이주헌, 학고재
러시아, 그 역사와 진실, 올랜도 파이지스, 커넥팅
러시아의 역사, 니콜라스 V. 랴자놉스키, 마크 D. 스타인버그, 까치
Ilya Repin and the World of Russian Art, Valkenier, Elizabeth , Nutt, Tim , Bale, Chris, Columbia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