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천 위에 올려진 사과 편]
"에밀 졸라, 이 나쁜 자식!"
폴 세잔이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는 좁은 작업실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세잔은 손에 든 책을 구길 듯 꽉 쥐었다. 그것은 그의 단짝이자 잘나가는 작가, 에밀 졸라가 쓴 소설 〈작품(The Masterpiece)〉이었다. 세잔도 처음에는 졸라가 보낸 이 책을 반갑게 펼쳤다. 그런데, 종이를 넘길수록 기분이 묘해졌다. 책 속 주인공은 가상 인물 클로드 랑티에였다. 나름 안목과 확고한 철학이 있지만, 세상의 인정을 좀처럼 받지 못하는 비운의 화가였다. 랑티에는 그림을 그릴수록 놀림만 받기 일쑤였다. 야심차게 전시회에 나섰지만, 이 또한 결과적으로 조롱만 실컷 들었다. 그는 쫓겨나듯 도시에서 시골로 집까지 옮겨야 했다. 이 이야기는, 평생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한 그가 극단 선택을 하는 것으로 끝맺었다.
…이거 완전히 내 얘기잖아?
세잔은 글을 읽는 내내 이 생각을 했다. "별 볼 일 없는 사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 소외당하는 사람, 이 얼마나 우울하고 처량한 광경인가." 이 문장을 읽을 때는 거듭 심호흡을 해야 했다. 실제로 세잔과 랑티에의 삶은 거의 비슷했다. 세잔도 아직 비난만 받는 화가였다. 살롱전에 밥 먹듯 낙방했고, 겨우 참여한 전시회에서도 욕이란 욕만 다 먹었다. 이뿐인가. 세잔은 지금 파리에서 물러나 시골에 머물고 있었다. 그 또한 어느덧 오십 줄에 닿는 동안 그림만 그리고 있지만, 랑티에처럼 화가로 이룬 일이 없었다. 세잔은 이 책을 갈가리 찢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세잔은 얼마간 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게 살았다.
세잔이 이렇게까지 절망에 빠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세잔은 졸라만은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세상 모두가 그를 실패자로 칭하며 등을 돌린들, 졸라만은 늘 옆에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만큼 세잔과 졸라의 인연은 깊었다.
세잔은 10대 청소년 때 졸라를 처음 봤다. 졸라는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의 왜소한 아이였다. 또래의 표적이 된 그는 매번 밀리고, 치이고, 얻어맞곤 했다. 세잔이 그런 졸라에게 먼저 다가갔다. 덩치 큰 세잔이 솥뚜껑만한 두 손으로 그를 지켜줬다. 둘은 서로가 똑같이 예술가의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안 순간 더욱 친해졌다. 두 사람은 각자의 꿈을 끝까지 응원해주기로 했다. 실제로도 이들은 오랜 기간 그 약속을 지켰다. 풋내기 화가 세잔과 아마추어 작가 졸라는 긴 무명 기간 서로에게 의지했다. 그렇게 3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세잔은 가족과 동료 모두에게 외면당한 채 여전히 이름 없는 화가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졸라는 이제 대문호의 길을 당당히 걷고 있었다. "그간 본색을 잘도 숨겼어. 그 긴 세월간 아직도 성공하지 못했다면 네놈 소설 속 인물처럼 차라리 죽어버려라, 이런 말이겠군." 세잔은 〈작품〉을 접한 후부터 입버릇처럼 이 말을 했다. 그는 졸라에게 배신감과 열등감을 함께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도 세잔은 눅눅한 작업실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세잔은 붓질을 하다 말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그가 여태껏 그린 그림 수백장이 작업실에 걸려있었다. 수많은 그림 중 대부분에는 오직 한 사물만 담겨있었다. 그것은 사과였다. 세잔은 졸라의 책을 받기 직전에도 〈천 위에 올려진 사과〉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그림 속 사과는 얼핏 봐도 특이했다. 그저 보이는 대로 빨갛지도 않고, 위치나 놓인 각도도 부자연스러웠다. 눈 앞 모습 그대로를 표현하는 보통의 정물화로는 도저히 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 작품만 그러지 않았다. 그가 당장 새롭게 그리는 사과도, 작업실을 걸린 모든 사과도 다 비슷한 모습이었다. 이제 나이도 찰 만큼 찼다. 그 나름대로 방식으로 그림도 그릴 만큼 그렸다. 그러는 동안 세잔은 가족과 동료, 이제는 둘도 없는 죽마고우에게까지 외면 당하는 꼴이었다. 특이한 사과나 주야장천 그려대는 세잔은 이대로 스러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처럼 거의 한 평생을 무시 당하고 산 사내에게 성공이 절뚝이며 찾아오고 있을 줄은.
세잔은 어릴 적부터 집념이 강했다. 그리고 세잔의 이 성향은, 그의 일평생 삶을 뒤흔들게 된다.
세잔은 1839년에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에서 출생했다. 세잔 손에 처음 쥐어진 건 법학 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대 첫 은행을 세울 만큼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런 그가 집안에 법조인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강요한 학문이었다. 하지만 세잔이 배우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그림이었다. 세잔은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밥 먹듯 반항했다. 말만 잘 들으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는데도 굽히지 않았다. 그런 아들을 놓고 아버지는 야단도 치고, 협박도 하고, "요즘은 아무나 예술가를 하려고 한다"는 식의 모욕도 줬지만 뜻을 꺾지 못했다. 세잔은 이 와중에 1859년 지역 미술대회 구상화 부문에서 2등을 했다. "아버지. 제발요…." 세잔은 그가 입증한 작은 가능성을 갖고 거듭 호소했다. 결국 아버지도 포기했다. 2년 뒤, 세잔은 그토록 꿈꾸던 파리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의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세잔은 청운의 꿈을 품고 왔다.
그는 곧 자기가 치기 어린 아마추어에 불과하다는 걸 절감할 수 있었다. 당장 에콜 데 보자르(프랑스 국립 미술학교) 입시 시험부터 계속 탈락했다. 살롱전(展)에서도 연거푸 낙선했다. 세잔 앞에 버티고 선 세상은 이토록 냉혹했다. 하지만 세잔도 여기에 지지 않았다. 특유의 근성을 발휘했다. 그는 온종일 붓을 쥐었다. 작업실과 루브르 박물관을 오가며 미친 듯 창작 활동을 했다. 그렇게 1년, 2년, 5년…. 골방에 틀어박힌 세잔에게 관심 두는 이는 거의 없었지만, 그는 여전히 캔버스를 칠하고 있었다. 사실, 세잔은 그림에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보기 힘들었다. 세잔은 이 무렵 〈살인〉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어두운 세계 속 두 사람이 팔을 뻗고 누운 이를 살해하고 있다. 음울한 분위기와 기괴한 구도 등 언뜻 봐도 강렬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뚜렷한 주제도, 세련된 기교도, 독창적인 기법도 없었다. 그저 옛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내지 테오도르 제리코의 아류작에 가까워보였다. 몇 년을 죽도록 매달린 결과가 이랬다.
세잔에게 그나마 붙임성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외려 반대였다.
세잔은 당시 파리에서 가장 예민한 화가였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니 극심한 우울증도 달라붙었다. 그는 남이 자기 몸에 닿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상대가 누구든 악수도 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 탓에 인맥도 다지지 못했다.
참다못한 세잔의 아버지가 작정하고 그를 다그친 적도 있었다.
그만큼 해봤으면, 조금의 능력도 없는 걸 알았으면 이제라도 관두라고 압박했다. 화단도 "물감만 떡칠한 그림"이라는 식의 모욕만 가할 뿐이었다. 세잔도 사람인 만큼 한때는 흔들렸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자기를 밀어주는 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졸라였다. 세잔보다 먼저 파리에 온 졸라는 이제 막 기회를 잡고 있었다. 졸라는 에두아르 마네가 1865년에 내건 〈올랭피아〉를 예술계에서 저 혼자 옹호했다. 벌거벗은 보통 여인이 침대에 당당히 누운 이 그림을 놓고 "남들이 이상적인 몸에 집착할 때 마네만이 진실을 그렸다"고 유일하게 지지를 표했다. 이처럼 날카로운 비평 덕에 이름도 알리고, 추종자도 늘고 있었다. 졸라는 세잔의 칙칙한 작품을 보고도 잠재력이 보인다고 격려했다. 세잔은 그런 졸라가 눈물나게 고마웠다.
마음을 다잡은 세잔도 끈질겼지만, 그를 따라오는 불운도 끈질겼다.
어느덧 서른다섯 살이 된 1874년, 세잔은 모처럼 설레는 일을 맞았다. 세잔은 훗날 인상파의 대부로 칭해질 카미유 피사로에게 전시 참여 제안을 받았다. 클로드 모네와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 꽉 막힌 살롱전에 반대하는 화가들이 함께 하는 자리여서 더 좋았다. 세잔은 선뜻 그림을 출품했다. 이 전시는 미술사에 크게 한 획을 긋는다. 이곳에서 19세기 후반 서양 미술계를 강타하는 '인상주의' 명칭이 탄생한다. 다만 당시에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본 비평가가 "그림에 본질 없이 인상만 있다"는 조롱의 뜻으로 쓴 말이었다. 이런 평가에 많은 이가 공감해 용어로 굳어진 것이었다. 즉, 훗날 역사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당시 이들이 연 전시회는 엄청난 비판 행렬과 마주했다. 그런데 모네의 〈인상, 해돋이〉 탓에 묻힌 감이 있지만, 사실 이 전시에서 엄청나게 비난받은 이는 따로 있었다. 이번에도 세잔이었다. 세잔의 그림을 본 이들은 그에게 병원 치료가 있어야 한다고 진지하게 조언했다. 모네의 그림은 빛 아래 어우러진 일상을 담고 있었다. 르누아르의 작품은 아름다운 여인과 소녀를 표현하고 있었다. 이렇듯, 이들의 각 그림은 기법이야 별났으나 색감과 분위기 자체는 밝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세잔만 그러지 않았다. 그의 어두운 작품들은 이곳에서조차 따로 놀고 있었다. 세잔의 모처럼 설렜던 마음은 다시 분노와 서러움만 낳고 말았다.
세잔은 이 일을 겪고도 수년을 또 견뎠다.
그사이 세잔과 함께 논란의 전시를 했던 문제아들마저 하나둘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언제 그렇게 비판을 받았었느냐는 듯 명성을 쌓고 있었다. 세잔만, 세잔만 또 제자리였다. 청운의 꿈을 안고 파리로 온 세잔이 근 20년간 받은 건 모멸감뿐이었다.
"흥. 웃기고 있군!"
그러던 어느 날, 세잔은 파리 시내 카페에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세잔에게 싫은 티를 팍팍 낸 마네가 그곳에 있었다. 세잔의 인상파 전시 동료였던 에드가 드가와 모네도 함께 있었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예술을 논하고 있었다. 작업복 차림의 세잔은 구석에 앉아 홀로 술을 홀짝이는 중이었다. 논쟁을 엿듣던 세잔은 갑자기 모든 게 무의미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더는 저들의 혼돈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세잔은 카페에서 뛰쳐나왔다. 그는 그렇게 파리에 매달려있기를 포기했다.
세잔은 1880년대 초에 짐을 싸고 아예 고향으로 갔다.
당연히 그림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휩쓸리지 않고, 휘말리지 않고 오직 자기만의 그림에 더 천착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세잔은 허름한 작업실 하나를 구했다.
세잔이 그곳에서 집착에 가까울 만큼 그린 게 있었다. 사과였다. 스스로 예리하지 못한 눈을 가졌다고 본 세잔은 지긋이 뜯어보기에 사과만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쉽게 구할 수 있고, 잘 썩지 않고, 들고 다니기도 좋은 최고의 모델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세잔은 같은 사과를 수백 번 보고, 수백 번 스케치했다. 옆으로 돌려서 또 수백 번, 위치를 바꿔서 또 수백 번을 화폭에 옮겨 담았다.
세잔은 언젠가부터 인간의 판단, 가령 '과일' 내지 '먹을거리' 같은 생각을 버린 채 사과를 관찰했다.
즉, 고정관념 범벅인 인간의 눈이 아닌 존재 자체에만 주목하는 우주의 시선으로 사과를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자 그에게 차츰 보이는 게 있었다. 사과의 본질(本質)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녀석은 하나의 구(球)로 보였다. 세잔은 신의 음성을 들은 듯 벌떡 일어섰다. 그는 작업실 안을 초조하게 걸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그간 인간은 오로지 망막에 비치는 사물의 외양을 재현하는 데만 집착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인식이 닿기 전부터 품고 있던 대상의 본질을 그린 것으로 볼 수 없었다. 즉, 사물의 겉모습만 그리는 건 반쪽짜리 예술일 뿐이었다. 대상의 껍데기 속 알맹이를 표현할 때, 비로소 새로운 예술의 장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세잔은 드디어 '보이는 대로'가 아닌 '느껴지는 대로' 그려도 된다는 걸 깨우쳤다. 이는 인류사상 아무도 떠올리지 못한 혁명적 발상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세잔은 연구를 거듭했다. 그는 1895년부터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되는 〈사과와 오렌지〉를 작업했다. 이 정물화를 완성하는 데만 5년 이상 시간을 쏟아부었다.
세잔은 위에서 보는 느낌으로 얇은 접시를 그렸다. 이어 옆에서 응시하는 시점으로 품이 깊은 그릇과 물병을 묘사했다. 사과의 색과 형태 또한 제각각으로 표현했다. 알맞게 익은 사과, 상한 듯 푸르스름한 사과, 안정적으로 놓인 사과, 곧 굴러떨어질 듯한 사과를 다 담았다. 세잔은 한 화폭에 사물의 위, 아래, 왼쪽, 오른쪽 모습을 다 그린 것이었다. 대상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옮겨담은 것이었다. "우리 눈앞에 있는 모든 건 결국 흩어지고, 사라지고 말아. (…) 예술가의 임무는 늘 변화하는 외양을 가졌지만 여전히 그대로인 영원함, 그 신비로움을 붙잡는 것이야." 세잔의 말이었다. 그는 끝내 미술사의 판을 뒤집고 말았다.
세잔은 이처럼 위대한 은둔을 하고 있을 무렵, 평생을 믿었던 졸라에게 〈작품〉을 받은 것이었다.
사실 졸라도 할 말은 있었다. 졸라는 "(책 속 랑티에는)극적으로 각색한 마네 또는 세잔, 굳이 말하면 세잔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밝히긴 했지만, 맹세코 세잔을 저격하기 위해 〈작품〉을 쓰지 않았다. 그는 예술가의 독창적 창작 활동이 그만큼 어렵다는 걸 다소 극단적으로 표현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세잔은 그런 사정에도 마음을 풀지 않았다. 자기를 보고 그 따위 실패한 화가를 떠올렸다는 자체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잔은 이 일을 계기로 졸라와 절연했다. 인간에게 환멸을 느낀 세잔은 은둔의 세계로 더 깊이 발을 뻗었다. 세상과 거의 접촉하지 않은 채 또 작품 활동만 했다. 그는 한 길만 고집하다 끝내 모두에게 버림받은, 그런 실패자의 삶으로 생을 마감할 듯했다. 그런 세잔을 밖으로 꺼낸 귀인이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주목받는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였다. 볼라르는 웬 무명 화가가 시골에서 묘한 그림을 그린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까지 왔다. 그는 안목이 있었다. 툴툴대는 이 화가가 벽면 가득 걸어둔 사과 정물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볼라르는 곧장 세잔의 개인전을 열었다. 결과는 초대박이었다. 사람들은 비로소 세잔의 그림에서 예술의 미래를 봤다. 몇백년간 이어진 회화의 규칙을 통째로 때려부순 작품들에 경의를 표했다. 그때가 1895년, 그의 나이 쉰여섯 살 때였다. 이제 세잔의 모든 그림이 화제였다. 가령 젊은 화가들은 세잔이 1904년에 그린 〈생 빅투아르산〉을 교본처럼 받들었다. 세잔은 어릴 적부터 지겹도록 그린 이 산을 그만의 단순화 기법으로 표현했다. 화폭 속 산과 구름, 돌과 나무, 집과 논밭은 어느덧 입체파의 형식을 품고 있었다. 리듬감 있게 덕지덕지 찍어바른 물감에선 추상 회화의 가능성도 엿볼 수 있었다. 어떻게든 새로운 걸 그려보려고 한 화가들은 이러한 세잔의 그림 한 점을 더 구하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인고의 시간을 견딘 세잔은 생의 말년에 인생역전에 가까운 성공을 이뤘다.
세잔은 그럼에도 그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죽음의 순간 또한 역시나 그 다웠다. 1906년, 10월 15일. 세잔은 오늘도 생 빅투아르산의 한 언덕에 올라 붓질을 하고 있었다. 하필 그날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노쇠한 세잔은 이런 와중에도 두 시간 넘게 그대로 있었다. 결국 온몸이 푹 젖고나서야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얼마 못 가 길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누군가가 그를 발견하고 세탁소 수레에 실어 집까지 데려다줬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괜찮았다. 하지만 세잔은 다음 날 연신 기침을 하면서도 또 그림을 그린답시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재차 정신을 잃었고, 이번에는 아예 눈을 뜨지 못했다. 향년 예순일곱 살이었다. 사인은 폐렴이었다. 세잔은 긴 무명의 시절, 고립과 조롱의 순간을 모두 강한 집념으로 극복했다. 그는 꿈 앞에서 타협하지 않고, 현실 앞에서 무릎 꿇지 않았다. 가족과 동료, 심지어 단짝 친구마저 그를 보고 패배자를 떠올렸지만, 그럼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기만의 제국을 구축했다. 현대미술의 모든 기수가 제국의 일원임을 자처할 만큼 그곳을 융성하게 이끄는 데도 성공했다. 나 또한 한 걸음만 더, 우리 모두 한 걸음만 더…. 세잔의 견디는 삶은 이러한 말을 주문처럼 외우게끔 만든다.
〈참고 자료〉
반항과 창조의 브로맨스 에밀 졸라와 폴 세잔, 박홍규, 틈새의시간
폴 세잔, 색채와 형태의 미학, 실비아 보르게시, 마로니에북스
폴 세잔, 캐럴라인 랜츠너, 알에이치코리아
Paul Cezanne, Wagner, Christoph, Hirmer Verlag Gmb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