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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min Jan 16. 2023

그래서 이제 뭐 하지? 점이라도 봐야 하나?


4년째 이어지던 청탁이 끝났다. 말이 4년이지, 원고로 따지면 한 달에 적어도 4건, 1년에 48건, 4년이면 192건이다.(헤아려보니 실제로는 188건이었다.) 한 기업의 소셜 미디어에서 청탁하는 원고의 소재와 성격이 거기서 거기인 것을 감안하면 같은 주제의 글을 적어도 50건 다른 발문과 결론으로 변주해 온 것이다. 그래, 오래 했다, 이만하면 됐다 싶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의도치 않게 프리랜서로 전환 후 시작된 이번 청탁 건은 2015년부터 맡아오던 프로젝트의 연장이었기에 햇수로 7년째 이어진 것과 다름없다. 7년이라니, 내가 이 대행사에만 6년 반을 다녔는데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 프로젝트가 된 것이다. 이 정도면 대행사 직원이 아니라 일을 맡긴 H기업의 홍보팀 직원으로 봐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그렇게 원하던 자유가 찾아왔다. 개인적으로 기획했던 글에 집중할 수 없었던 그동안의 안타까움을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이제 뭘 해볼까, 뭘 써볼까, 짬 나는 대로 써두었던 글 모음을 되짚어보고 있자니 그때의 막막함이 떠올랐다. 이건 이렇게 해야 하고 저건 저렇게 해야 하고, 이건 이러면 안 되고 저건 저러면 안 되고, 엄청난 아니 멍청한 자기 검열이 내 창작의 앞길에 바리케이드를 단단히 쳐놓고 아무것도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던 것 말이다. 그 막막함과 다시 마주해 보니 그 지긋지긋한 청탁 원고가 실은 내 막막함의 탈출구였음을 깨달았다. 망할, 다음 쥐구멍이 정해질 때까지 꼼짝없이 자기 검열과 마주해야 한다. 이제 정말 뭐라도 해야 할 때가, 써야 할 때가 되었는데, 과연 이 꽉 막힌 여정을 잘 소화할 수 있을까? 심히 걱정이 된다, 걱정만 된다.



최근 아무튼 시리즈의 책을 읽으면서 작가라는 직업을 정의해 봤다. 작가는 혼자 있어도 곧잘 수다쟁이로 변해야 하고, 함께 있을 땐 예상치 못한 소재를 꺼내 마치 내 이야기인 양 맛깔나게 떠들 줄 알아야 하고, 말짱한 정신에도 소주 한 병 먹은 것처럼 쓸데없는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어야 한다. 자신만의 세계를 가져야 하고, 한 단어에 집착할 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작가는 뇌에 근육을 가진 사람이었다. 결론이 이상한가? 이상할 수도 있다. 갑자기 뇌는 어디서 튀어나온 단어인가. 좀 풀어서 이야기해 보면 이렇다. 실은 이들이 지껄이는 아무 말은 아무 말이 아니다. 잡자기 튀어나온 단어는 그냥 나온 단어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자기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인 것이다. 자신이 아는 것들로 유인하고 그 말에 빠져들게 한다. 이 모든 것은 직접 또는 간접체험을 고스란히 뇌에 저장해 두고 언제라도 꺼내어 쓸 수 있게 근육으로 연결해 놓은 결과이다. 처음부터 결론을 아는 상태일 수도 있고, 모르는 상태일 수도 있다. 상관없다. 어차피 좀처럼 보기 드문 결론에 도달하게 될 테니까. 그들은 그렇게 연습을 거듭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을 갖도록 이야기를 지어내는데 전문가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작가는 대단한 직업이다. 그래서 난 그들이 부럽다. 작가뿐 아니라 작가의 성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부럽다. (작가의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작가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부럽다는 걸 보니 난 아직 작가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난 내가 한 번도 작가라도 생각해 본 적 없다. 작가라는 부러운 직업을 내 것인 양 슬쩍 말해본 적은 있지만 말하면서도 부끄러워한다. 부끄러워서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대단한 작가가 아니라 생활을 위해 쓰는 직업을 택한 생계형 작가라고 꼭 꼬리를 단다. 부러운 것은 내가 되지 못해 부끄럽다.



나도 작가가 되려고 노력한 적이 있다,라고 생각했다. 밤을 새우며 단어를 찾았다. 적당한 표현을 찾느라 며칠을 끙끙 거리기도 했다. 어려운 단어 대신 가장 쉬운 단어들을 나열해 이해가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 표현과 단어가 너무 뻔한 나머지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국문과, 문예창작과 출신의 출간 작가와 함께 <소셜피플>을 함께 쓰면서 깨달았다. 난 작가가 되려고 노력한 게 아니라 흉내만 내고 있었다는 것,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쓰고 있었을 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두 권은 함께 작업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난 결론을 모른 채 아니 다음에 이어질 문단의 소주제도 모른 채 쓰기를 반복해오고 있었다. 모든 것을 운에 맡기고 매주 십오만 원 어치 복권을 사는 것처럼 말이다. 글에 근육이 붙지 않고 근육을 소진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다음 단계는 당연히 번 아웃이 뻔하지 않은가. 번 아웃을 이기기 위해, 아니 번 아웃과 함께 지금처럼 꾸역꾸역 버티며 쓰고 있는 이유는 작가라는 단어가 가지는 대중성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에 답을 하기 어려워진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선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6년 반 동안 세 번의 퇴사를 결심했었다. 그때마다 동료가 걸렸고, 지속되던 프로젝트가 걸렸고, 실체는 알 수 없지만 매달 통장에 꽂히는 수입이 걸렸다. 회사를 나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그런데 마지막은 의외로 간단하게 정리됐다. 시기가 잘 맞은 덕도 있었다. 프로젝트도 끝났고, 매일 함께 술을 마시던 동료의 절반은 이미 사라졌고, 혼자서 외로웠고. 대표의 신뢰도 느낄 수 없었고. 아무튼 상사에게 퇴사 결심을 전달하고 한 달도 걸리지 않아 나의 퇴사는 해결되었다.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난 나의 직업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었다. 어린이집에 함께 다니는 아이의 어머니들과 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이 어떤 일을 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아마도 치렁치렁 기르고 있던 나의 자유로움(머리카락)때문인 걸 쉽게 알 수 있었는데, 그래서 난 “어, 얼마 전까진 홍보 대행사에서 기업 소셜미디어 운영을 담당했었는데, 지금은 퇴사해서 청탁받은 블로그 원고를 쓰고 있어요.”라고 길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분은 이렇게 들었던 것 같다. “웅얼웅얼 웅얼, 쩜쩜쩜(…), 블로그를 쓰고 있어요.”, “아, 그러시구나” 알아 차린 듯 반응했지만 난 알 수 있었다. 저분은 후후훗, 모르는구나. 이렇게 두 어 번 정도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럴리는 전혀 없겠지만 나중에라도 그분이 다른 분들과 대화를 하다가 내 이야기가 나왔을 때 ‘직업을 들었는데, 뭐라더라, 그게, 잘 모르겠어요’,라고 얼버무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전략을 바꿨다. 제아무리 재능이 없더라도,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셜미디어에 국한된 글이긴 하지만, 글을 쓰는 건 모두 작가라고 하니까, 나도 작가라고 부르자. 대신, 인간의 실체를 파헤치거나 감정선을 건드리진 않으니 생계형을 덧붙이자. 나의 직업은 그때부터 생계형 작가가 되었다. 효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단박에 사람들은 나의 직업을 파악했고, 심지어 내 말과 행동을 작가라는 단어와 연결 지어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난 작가라는 단어에 부끄러워하는 사람인데 부러워하는 걸 보니 더욱 부끄러워졌다. 난 생계형을 더욱 강조했는데도 사람들은 생계형이란 단어보다 작가라는 단어에 더 집중했다. 작전 실패. 나를 간단하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었을 뿐인데, 너무 과분한 단어가 되어 버렸다. 정확한 표현을 찾는 건 역시 힘들어 그냥 요즘은 생계형도 다 빼고 작가라고 한다.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뭐. 이 정도 호사는 누려도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직업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있어 보이는 단어가 가진 힘 때문이 아닌가.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려 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 호사스러운 직업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만큼 자유롭게 일하는 직업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수입이 그리 많이 않다는 것. 많지 않은 게 아니라 무척 적다는 것. 한창 야근을 밥 먹듯 할 때 합정에서 수원까지 쏘던 택시 기사님이 그런 말을 한 적 있다. “남자가 오백 버는 거 쉽잖아요. 열심히만 하면” 매일 야근하며 이렇게 살아도 고작 삼백 남짓 버는데 오백이라. 또 함께 일하던 직장 동료도 이런 이야길 했다. “친한 분이 지금 프로랜서로 살고 있는데 그분이 그래요. 프리랜서도 한 달에 오백 벌 수 있다고. 근데 암 걸릴 각오로 해야 한다고.” 어쩌다 내 인생의 기준이 오백만 원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기준을 만족시키려면 난 지금 당장 하던 일을 그만두고 대기업에 취업해야 한다. 나이 마흔이 넘어 신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있을까? 차라리 기가 막힌 책을 내고 저작권료를 받는 게 더 빠를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청탁은 끝났고, 그래서 작가라는 단어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새로운 일을 구하기 위해 요즘은 취업 어플을 자주 드나든다. 취업 어플에 자주 등장하는 검색어는 작가, 프리랜서 작가, 에디터, SNS 운영. 여전히 작가 생명의 연장을 꿈꾸고 있다. 새로운 일이 정해지기 전까지도 지금처럼 작가로 날 소개할 것이다. 계속 작가로 먹고살 수 있을까? 점이라도 봐야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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