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분이 일어나는 일에 솔직해지자
오랜만에 성경을 폈다. 편 책은 <하박국>(천주교: 하바꾹)이라는 부분이다. 이 책의 매력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첫 시작을 신에 대한 원망으로 시작한다. "왜 이 악한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른바 아브라함의 종교(유대교, 개신교(기독교), 천주교)의 오랜 질문이다. 정의롭고, 의로운 하나님께서 왜 저런 나쁜 사람을 심판하지 않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나는 이런 면에서 하박국서를 좋아한다. 교회에 오랜 시간 동안 있으면, '고구마를 물없이 계속 먹는 기분'이 든다. 한마디로 답답하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는 성도이기 전에 인간이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느낀다. 누가 봐도 분노할 만한 상황, 가슴 아픈 상황조차 감사하라는 건 또 다른 고문이다. 특히 의분이 치솟는 여러 상황 속에서 모든 것에 순종하라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능할까.
원망은 배신에서 온다. 배신이라 느끼는 것은 믿었던 대상으로부터 그 신의가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나는 믿었던 것에 대한 배신감으로 느껴지는 원망이 오히려 인간의 감정으로, 더 솔직한 고백이라본다. 신은 의롭고, 선한 존재라 믿었다. 그리고 악한 세상에 대해서 심판하리라 믿는 존재다. 신호등 좀 안 지키고, 반찬투정한 것 빼고는 잘못한 일 없는 사람들도 '회개'를 하는 판에, 온갖 불의한 사람들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면 분노가 치미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 신에 대한 배신감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하박국> 앞 부분을 읽다보면, 다윗의 시편 속 절규가 떠오르고는 한다. 잠시 시편 109편 9-15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109:9 그의 자녀들이 고아가 되게 하시며,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하소서.
109:10 그의 자녀들은 음식을 구걸하는 거지들이 되게 하시고, 폐허가 된 그들의 집에서 쫓겨나게 하소서.
109:11 빚쟁이가 그의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게 하시고, 낯선 자들이 그의 수고의 열매들을 약탈하게 하소서.
109:12 그에게 동정을 베푸는 자가 한 사람도 없게 하시고, 고아가 된 그의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도 없게 하소서.
109:13 그의 자손들이 끊어지게 하시고, 다음 세대에 그들의 이름을 완전히 지워 주소서.
109:14 그의 조상들의 죄악이 여호와 앞에서 기억되게 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가 결코 지워지지 않게 하소서.
109:15 그들의 죄가 항상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게 하시고,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소서.
기독교에서 추앙받는 다윗은 이렇게 남을 저주했다. 한편으로 뒷 부분을 읽어보면 공감가는 측면이 있다. "16 그는 남에게 친절을 베푼 적이 없으며, 가난하고 불쌍하고 슬퍼하는 자들을 못살게 굴었습니다."라는 구절이다. 저것은 나쁜 사람이 잘된 일에 대한 의분이라고 다윗을 변호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하박국의 원망과 다윗의 절규 등에 대해서 논하는 교회는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저런 절규를 하는 이들의 의분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본다. 사실 하박국이 아니더라도, 다윗이 아니더라도 이 사회에서 불의 속에 마음을 아파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아픔 속에서, 혹은 세상의 절망 속에서 신에 대한 원망과 분노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감정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범적 모습' 만이 정말 좋은 신앙인의 삶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늘 있다.
정말 믿는 하나님이 전지 전능하다면, 나는 솔직해 졌으면 좋겠다. 분한 일, 억울한 일, 서러운 일을 왜 고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뉴스만 봐도 범법자들이 가벼운 징역을 받는 일들이 나온다. 법의 테두리 아래서 편법으로 죄악을 지질러도 넘어가는 이들을 보면서 가슴이 무거워진다.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던 사람들이 승승장구 할때, 치솟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그마저도 눌러야 '세상사 그런 거다!'라고 말하는데, 기분이 좋을리 없다.
이런 솔직함 때문에 예수께서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대표기도는 항상 '점잖은 그리스도인'의 모습만을 강조한다. 기쁘고.. 감사하고.. 찬양할 일...을 만들어서 '은혜롭다'고 말하고는 한다. 그런데 정말 그렇기만 할까. 우리의 신앙 선배들도 그러하지 못한면이 있다. 나는 모든 일에 불평 불만하자는 취지에서 이글을 쓴 것이 아니다. 다만, 내 주장은 이렇다. '미적찌근한 가식'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조금만 솔직해지자'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