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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포리스트 Aug 09. 2021

조직을 거부할 용기

집단주의를 거부한다.

집단주의하면, 어릴 적부터 배워온 교과서적인 내용이 참 많이 떠오른다. 어른들의 글에 어린아이들은, 청소년들은 익숙해져 버린다. 90년대 초반생인 나만해도 늘 어른들의 안타까움을 배웠다. 교과서 지문 어딘가에 "요즘 개인화되는 생활이 안타깝다"는 그런 말 말이다. 그런 꼰대 어른들의 사상에 익숙해져서 였을까. 나는 개인화되어서 사람이 외롭고 힘든 거라고 생각했다. 가족의 정이니 뭐 이런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조직과 국가를 위해 어느 정도 개인을 희생해야 하는 것이라고 배워온 듯하다.


학교에서, 아르바이트처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군대에서 그러했다. 나는 어떤 조직에 속하면, 그 조직을 위해서 어느 정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기 싫은 회식이나 야유회도 따라가야 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조직생활을 알아야 사회 생활도 알고, "군대가서 집단 생활을 반드시 해봐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어른들의 주장도 "그렇구나"하고 배웠다. 공부를 열심해 해보니, 정말 크게 속았다고 생각한다.


출처: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jxl91&logNo=220749791384

이제는 사회과학자로서, 노사관계를 연구하는 사람으로 보면 저 주장들이 머리가 그저 아프다. 사실 집단 생활이라고 하는 것, 조직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서 그렇다. 내 경험상 이렇다. 조직을 위한 헌신은 지치고, 힘 빠지는 일이다. 그리고 그 조직을 위해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한다. 어디 나라고 달랐을라나. 한 조직을 위해서 내 시험이나 개인 사는 당연히 포기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면 누군가는 멋지다고 박수쳤다. 개인을 희생하는 용기를 냈다고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하나'를 외치는 조직은 나에게 그렇게 큰 관심이 없다. 좋은 일도 잠시 축하해줄 뿐이고, 힘든 일은 대부분은 내가 이겨내야 한다. 내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던 일들 역시 생각해보면 부질 없다. 뒤에서 일명 "폐급"이라고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도, 막상 앞에서는 별 말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른바 눈치를 아무리 줘도, 그냥 아무것도 안하는 속된 말로 폐급이 차라리 마음 편히 살고, 때론 부럽기도 하다. 때론 그들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뿌린 선물값을 차라리 나를 먼저 생각해주는 그 누군가를 위해 쓰는 게 훨씬 나을 뻔헀다. 


원래 작은 바람이 있었다. 우리나라 조직이 '상부상조를 상명하복 대신' 하는 것이었다.  상명하복 조직을 다함께 거부할 용기를 가지면 안될까 싶었다. 회사는 대부분이 사장이 아닌 월급받는 회사원이고, 군대에서는 다 같이 억울하게 끌려온 징집병일 뿐이다. 그런데 모두가 그렇게 힘들어 한다. 중간관리자쯤 가면, 자기 후배나 후임이 조금이라도 편한 것은 못보는 못된 심보를 가진 인간들도 정말 많다. 


세상을 바꾸는 일도 하고 싶고, 혹은 집단주의는 피하고 팠다. 그래서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조직은 일단 거르고 본다. 믿고 거른다. 가족같은 분위기는 피한다. 우리나라는 가족은 챙겨줘도, '가족같은'은 착취를 하기 위해서 그냥 하는 말이란 사실을 알 만큼 컸으니까. 그래서 내 진로를 택할 때, 최대한 집단주의적 조직을 거부하는 직장을 가지고 싶었다. 그러려고 사실 연구직을 하고자 했다. 


누군가는 '남자가 왜 그런 것을 겁내느냐, 용기가 없냐?'고 묻고는 한다. 나는 몰라서 안하냐 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분명 말하고 싶다. 그것은 정말 조직을 거부할 큰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혼자서 일해서 먹고 살만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 만의 뛰어난 능력을 키워야 한다.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만한 용기는 있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 그게 내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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