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에티카 4부 후반부를 읽고나서
<정리 38~39>
스피노자는 인간의 신체와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외부 물체와 상호작용을 하며, 인간은 보통 건강할 때 외부의 물체를 다양하게 변용시킬 수 있고, 건강하지 못하거나 노쇠해지면 몸의 기능이 점점 정지에 가까워진다. 그러한 관점에서 스피노자가 운동과 정지의 비율에 대해서 이야기한 듯 하다.
<정리 40>
스피노자는 인간의 공동사회, 국가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으로 여기는 듯 하다. 이는 나중에 부록 9번과도 연결이 되는 것 같다. 즉, 어떤 사물의 본성에 가장 잘 일치하는 것은 같은 종의 다른 개체밖에 없기 떄문에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이성의 의해 인도되는 인간밖에 없다. 그러한 관점에서 스피노자는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하는 듯하다.
그러나 인간 공동체, 국가 속에는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인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인간도 상당수 존재한다. 우리의 기량과 재능을 높이는 인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인간들이 더욱 많다. 그렇다면 공동체를 마냥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인가?
<정리 41~45>
스피노자는 기쁨, 나쁨, 유쾌함, 우울, 쾌감, 사랑, 욕망, 증오에 대한 선과 악의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대부분 스피노자의 말이 타당해 보인다. 다만, 증오에 관해서는 물론 스피노자는 ‘인간에 대한 증오’라고 한정짓기는 하였지만, 증오가 결코 선이 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에 나는 의문이 든다. 불의와 무지, 그리고 비이성적인 관행에 대한 증오도 선이 될 수 없다는 말인가?
<정리 46~50>
스피노자는 이성에 따라 사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성에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을 향한 타인의 증오, 화, 무시 등을 가능한한 사랑과 아량으로 돌려주려고 노력하며(정리 46), 그러한 사람에게 있어서 연민은 그자체로 악이며 소용이 없는 것이다(정리 50).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이성적인 사람은 감정을 초월한 개인으로 보인다. 그에게 있어서 감정은 부질없어보인다. 과연 인간이 이러한 삶이 가능한가?
<정리 51~58>
스피노자는 호의, 자부심, 자괴감, 후회, 극심한 거만 혹은 극도의 자기비하, 명예 등의 감정과 이성(덕)과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다. 매우 타당한 말들이라 넘어가도 괜찮을 것 같다.
<정리 59>
스피노자는 “우리는 수동적 감정에 의해 결정되는 모든 행동을 그 감정 없이도 이성에 의해서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각해보면 정말 맞는말이다. 예컨대 내가 화가나서 무언가를 부수는 감정적인 행동은 때에 따라서 내가 이성적으로 해야만 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다. 내가 하는 모든 감정적 행동은 감정없이도 충분히 내가 할 능력이 있다.
<정리 60>
스피노자는 기쁨 혹은 슬픔이 신체의 모든 부분이 아니라 일부분에만 관련될 때, 이 감정에서 비롯된 욕망은 전체 인간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다(정리 60)고 이야기한다. 매우 타당한 이야기이다. 내가 만약 먹고싶은 욕망 때문에 야식을 먹는다면 그것은 나의 건강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고, 성욕에 휩싸이면 그것 또한 나를 위한 일이 될 수 없다.
<정리 61~ 66>
이성에서 생기는 욕망은 과도할 수 없다(정리 61), 그리고 정신이 이성에 따라 사물을 인식하는 한, 정신은 현재의 관념에 의해서든 미래나 과거의 관념에 의해서든 상관없이 동등하게 변용된다(정리 62). 지엇을 따른다면 두 가지 선 중에서 더 큰 선을, 두 가지 악 중에서 더 작은 악을 추구할 것이다(정리 65). 이성을 따른다면 우리는 현재의 작은 선 보다는 미래의 더 큰 선을 원하고 미래의 더 큰 악 보다는 현재의 더 작은 악을 기꺼이 맞을 것이다(정리 66).
-> 이성을 따를 경우 스피노자가 생각하기에 현재와 미래를 균형적으로 파악하여, 자신의 보존에 더욱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행위할 것이라고 여긴다. 또한, 이성의 욕망은 과도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파괴하지 않는다.
<정리 67~ 73>
스피노자는 이성에 따라는 사람을 ‘자유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유’라는 것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반대로 생각하자면 이성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속박되어있는 존재라는 것인데, 무엇으로부터 속박되어있는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이는 ‘감정’인 것 같은데 세미나 시간때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같다.
스피노자는 자유인의 특성들 (보통은 긍정적인 것들)을 나열하며 정리 73에서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자유인)은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고립상태일 때보다는 공동의 합의에 따라 사는 국가 안에서 더욱 자유롭다.”라고 이야기한다. 마지막에 이런 정리가 있는 만큼, 내가 보기에 이 정리가 에티카 4장의 핵심중에 하나인 것 같다. 스피노자는 역설적이게도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은 더 자유롭게 살기 위해 국가의 공동 법률을 유지하려 노력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윤리의 극에 달한 초인이 결국에는 공동체의 도덕을 따르게 된다는 것과 비슷한 말로 들린다.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국가란,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이익을 주는 하나의 공동체라고 보여진다. 그렇게 국가를 정의내리면 국가는 매우 유의미하고 이상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나 현대국가는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마르크스가 주장하듯이 현대사회의 국가는 고통과 소외를 불러일으킨다. 현대사회의 국가는 불평등을 자아내고 부정의를 만들어낸다. 내가 보기에 스피노자의 국가는 하나의 이상과 같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국가를 주장하듯이, 스피노자의 국가 또한 이성적인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만약 스피노자의 국가에서 얻을 함의는 확실히 존재한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나에게 가장 이익을 주는 것은 이성의 의해 인도되는 다른 인간이라는 점이다. 나는 지금껏 혼자서 사유해왔지만 이렇게 글을 쓰고 세미나를 거치며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이번 한 학기에 내가 깨닳은 자잘한 것들을 합치면 내가 몇 년동안 학교에서 배운 것들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일 것이다. 비록 스피노자의 ‘국가’가 이상적일지라도, 굳이 국가의 차원에까지 넓히지 않더라도, 조그마한 ‘공동체’의 차원에서 나를 그러한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다른 인간들 속에 위치시킬 수 있다면 나는 계속해서 이성적인 방향으로 인도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