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희원 Feb 17. 2023

왜 앎을 추구해야하는가?

스피노자 에티카 5부 후반부 (2)

나는 항상 모든걸 간단하게 생각해왔다.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군대도, 나의 표상에 집중해여 행동을 해왔었다. 예컨대 나는 고등학교를 남녀공학가고 싶어서 1지망으로 썻었고, 대학교도 그냥 아버지가 공무원이어서 행정학과를 썻었고, 군대도 그냥 여자친구 학교랑 가까운 곳에 가고싶어서 별생각없이 군산으로 배정받을 수 있는 해양경찰로 갔다(그때는 해양경찰 내 가혹행위가 심하다는 것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꽤 잘 풀렸다. (비록 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을 못갔지만) 아슬아슬하게 3차 추가합격으로 (당시 내 정시 성적으로는 절대 못갔을) 대학에 입학하고, 여자친구랑도 군대에 있을 동안에 꽤 자주 만나서 결과적으로는 지금까지 잘 사귀고 있고(한번 헤어지긴 했지만..) 아무튼 결론을 생각하면 나는 내 표상에 따라 한 행동이 꽤 좋은 결과로 나아갔다고 지금까지 생각했고, 그래서 앞으로도 그렇게 행동을 할 생각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의 아버지도 꽤 이렇게 살아왔다고 추측이 된다. 아버지가 대학교를 왜 지원했는지 물어보니까 그 당시 친구가 버린 원서를 주워가지고 걍 지원해봤다고 그러고, 공무원을 왜 하게되었는지 물어보니까 어머니가 시켜서 그랬다고 한다. 어쩌면 아버지로부터 이런 성격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간에, 내 지금까지의 삶은 스피노자식으로 말하자면 1종 인식에 한정되어있는 삶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말대로 우리는 꼭 3종 인식을 추구해야 하는가?


사람에 따라서는 굳이 왜 힘들게 3종 인식으로 가야하는지 이해가 안된다는 말도 나올 것 같다. 나도 지금까지의 경험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솔직히 이러한 말에 많이 동감하는 바이다. 실제로 저번 에티카 세미나 때에도 ‘왜 앎을 추구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꽤 긴 토론을 했었다. 앎을 추구하더라도 그것이 무조건적인 행복의 증가로 이어지는 보장은 없을텐데, 왜 우리는 앎을 추구해야하는가?


내가 지금까지처럼 내 직감과 표상을 바탕으로 행동을 할 경우 고민을 할 시간도 줄어들 것이고, 결과도 좋을 수도 있고, 3종인식을 추구하더라도 그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다. 실제로 어떤 책에서 보았는데,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쉽사리 행동을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동전을 던져서 동전의 앞면 뒷면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게 하니까 오히려 사람들의 행복도가 높아졌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겨난다. “왜 우리는 3종인식을 추구해야하는가?” 


이러한 질문을 생각하다보니 <밴드오브 브라더스>라는 전쟁 드라마가 떠오른다. 해당 드라마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참전용사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는 전쟁 드라마인데, 1화부터 8화까지 열심히 싸우고 죽다가 갑자기 9화에서 “why we fight?"라는 제목으로 왜 그들이 목숨을 걸어가면서 먼 타지에서 싸워야하는지 그들의 전쟁에 대한 의미를 묻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앎을, 3종 인식을 끊임없이 추구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효율이 좋아서? 그것이 행복을 높여주기 때문에? 내가보기에 앞선 이유들 때문에 우리가 앎을 추구해야하는 이유는 그러한 점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앎의 확장은 우리에게 항상 행복만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나에게 만약 빨간약과 파란약 중에 어떤것을 먹을 것인지 묻는다면 나는 쉽사리 현실로 깨어나는 빨간약을 선택하지 못할 것 같다. 또한 로버트 노직이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라는 책에서 한 흥미로운 사고실험인 쾌락기계 사고실험에서 나는 쉽사리 쾌락기계를 포기하지 못할 것 같다. 때로는 모르는게 약일 수도 있다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은 앎과 3종 인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나는 나의 표상만을 가지고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생각하기에 오직 앎의 추구와 정신의 확장만이 나의 존재를 증명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여행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어느 도시의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그 도시는 (뉴욕의 맨해탄처럼) 수직인 길과 수평인 길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샛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상황에서 내가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까지 간다고 했을때, 수직 혹은 수평인 길을 통해서 그 지점을 간다면 물론 나는 더할나위없이 편할 것이다. 그저 정해진 길만 따라서 잘 닦여져있는 길이기 때문에 가다가 다리를 다칠 일도 없고, 어떻게 보면 가장 가까운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길을 걸어가는게 의미가 있는가? 나중에 여행을 마치고 난 뒤에 과연 기억에 남을까?


만약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까지 이어지는, 사이사이에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비포장도로인 샛길이 있고, 그 길이 잘 닦여져있는 포장도로보다 더욱 효율적인 길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지만, 그 사실을 내가 추가적으로 알게 된다면, 나의 여행은 더욱 더 재미있어 질 것이다. 내 여행의 선택지가 늘어난다. 오직 잘 포장되어 있는 하나의 길만이 A와 B를 이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 자체가 나의 삶에, 나의 존재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앞서서 나의 경험을 다시 되새겨보자. 나는 지금까지 나의 표상을 따라 행동해왔다. 나는 고등학교 중에 내가 지원할 수 있는 고등학교의 폭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문과가 한의학과에 갈 수 있는지조차도 몰랐고, 군대도 해양경찰말고도 의방이나 공군의 다른 보직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나의 선택은 나의 표상을 향한 집중과 그로인한 맹목 속에 놓여있었다. 물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물론 더 좋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러한 내 선택들이 지금 돌이켜보면 '선택'이라고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맹목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 삶을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는 선택지라는 것이 없었던 것 같다. 매우 허무하고 구속적인 느낌이 든다.


우리는 모두 인생을 살아가면서 선택을 하고 산다. “인생은 B와 D사이의 C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앎의 확장과 3종 인식이 우리에게 최대의 효율과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러하면 어떠한가? 우리가 앎을 추구하지 않으면 우리의 선택지는 줄어든다. 매 인생마다 우리가 추구할 수 있었던 하나의 선택지 자체가 소멸해버린다. 극한의 상황에서 우리의 앎이 1종 인식에 머물러있다면 우리는 아까 말했듯이 여행길에서 (내 마음속에서) 정해진 오직 하나의 길만을 나아가게 된다. 인생을 여행이라고 비유한다면, 그 인생은 과연 추구할만한 인생인가? 과연 그러한 인생의 끝에서 나는 나의 존재를 이 세상에 증명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히려 자유의지가 없는 로봇과 같은 삶이라고 자책하지 않을까?


나는 내가 죽기 전에 방금전과 같은 후회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최소한 죽기 전에 ‘그래 이 정도면 그래도 재밌게 살았네 나.’이런 생각을 하고 죽고 싶다. 결국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앎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효율과 행복을 떠나서, 내 존재를 증명하는 것, 그리고 삶의 끝자락에서 그러한 느낌을 얻는 것, 그것이 그 목적이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1종 인식과 2종 인식, 그리고 3종 인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