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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잠 Apr 06. 2024

욕심과 자비

절도 사유지입니다

산과 들에 봄나물이 한창이다. 이제 막 해동이 시작된 땅속에서 돌나물, 산부추, 냉이, 민들레 등 봄향기 가득 품고 새순을 내보이고 있다. 알아보는 사람 눈에만 보이는 먹거리들이다. 이즈음에 사찰에서 식사를 담당하는 직원은 바구니를 들고 부지런히 언덕을 오르내린다. 먹기 좋은 크기의 나물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캐려면 우물쭈물할 수가 없다. 눈 밝은 사람들이 새벽부터 나물을 캐러 오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녀 간 자리는 한 번도 새순이 나오지 않았던 땅처럼 깨끗하다. 그곳에 봄나물이 있긴 했는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매일 아침마다 커가는 모습을 눈여겨보며 맛있는 나물 반찬을 상상했던 마음은 허망해졌을 것이다. 먹을 만큼 적당히 가져가면 좋을 텐데 그들은 그렇지 않다. 자루로 담은 나물 중 한 주먹이라도 절에서 먹으라고 주고 가도 괜찮을 법한데 그런 마음도 없는 듯하다. 가끔 자루를 지고 내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 많은 양을 가져가서 먹으려는 것인지 팔려는 것이지 궁금할 때도 있다.


봄나물을 훑어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찰 안에 있는 밭에서 자라는 채소나 과일, 재배 중인 표고버섯을 가방에 담아 가는 사람도 본다. 어쩌다 한 번씩 직원들과 눈이 마주치는 경우가 있다. 봉투를 뒤로 감추며 안 땄다고 하는 사람, 고춧대까지 세워 놓은 밭에서 고추를 따며 자연에서 자라는 고추인 줄 알았다고 하는 말하는 사람은 귀여운 축에 속한다.


직원들이 당황하는 순간은 내 것도 내 것이요, 네 것도 내 것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대할 때다. ‘절에서 뭘 이렇게 야박하게 굽니까?’, ‘산이 주인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가져가면 안 되는 것을 알고 가져가려다 걸린 사람이 아니다. 당연히 가져가도 된다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욕심이 확대경으로 보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욱하는 심정에 또박또박 따지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대화를 포기해야 한다. 일단 봉투나 배낭에 담는 사람에게는 우리의 어떤 설명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한 마디라도 하면 상대의 언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은 큰소리로 욕하고 삿대질을 하는 남자와 만난 적이 있다. 피해야 할 대상이다. 어이없어도 말대답 한 번 하지 못했다. 사무실에 앉아 씩씩거리는 내게 스님이 무슨 일 있냐고 물으셨다. 상황을 설명하면서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내게 스님의 답은 간단했다.

“내 물건 관리하지 못한 것은 내가 문제지 가져간 사람이 문제야?”

“...... 스님은 이해가 되세요? 전 안 돼요. 우리가 눈 감아 준다고 쳐요. 그런데 가져가는 게 당연하거나 당당한 건 아니잖아요.”

“사무장, 한 발 뒤로 물러 나. 그럼 시시비비가 안 보여. 그리고 좀 나눠 먹지, 뭐.”

한 발 뒤로 물러서면 시시비비가 안 보인다니. 흥분은 가라앉지 않고 선문답 같은 대답에 말문만 더 막혔다.


예전에는 ‘서리’가 당연시되던 때도 있었다. 남의 집 과일, 곡식, 가축을 훔쳐 먹는 행위를 장난으로 여겨준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리’하는 양이 많아지며 한 번 먹기 위한 장난이 아닌 행위가 되었고 지금은 ‘서리’가 ‘절도’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도 20대에는 도보 여행 중 도로 밖으로 열려있는 사과를 한 개 정도 따먹기도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한 개여도 과수원 주인이 신고하면 절도가 되기 때문이다. 서리하는 사람은 본인 한 사람이지만 주인 입장은 한 개가 아니다. 정작 힘들게 농사를 짓고 다 빼앗기는 꼴이 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찰 주위는 사찰 소유의 땅이다. 즉, 사유지라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도들도 소유자가 있는 사유지이며 전국 어디든 주인 없는 땅은 있지 않다. 사찰 안이든 산이든 엄격하게 말하면 남의 집 마당인 셈이다. 사찰은 나물이나 채소나 과일을 가져가는 사람을 봐도 한 번도 누군가를 절도로 신고하지 않는다. 스님의 말씀이 맞다. 대문 열려 있으니 들어가 물건을 가지고 나온 것이고, 그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으니 우리의 문제지 그들이 문제는 아니다.


등산객의 가져가는 행동이 스님의 나눠 먹자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나는 그 과정을 베푸는 일로 해석했다. 한 발 뒤로 물러나 생각하니 ‘욕심’이 ‘자비’로 이어지는 과정을 들여다보게 된 셈이다. 그럼으로써 소란스러울 수 있는 일을 조용하게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지키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 서리당할 때가 더 많지만 본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 내가 주인도 아니다. 시시비비 따질 일이 아닌 것이다.



언덕에 올라 두리번거린다. 낙엽을 걷어내며 남아 있는 봄나물을 캐어 바구니에 담으며 생각한다. 한 번 먹었으니 된 것이다. 딱 그만큼이 절에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양이다. 욕심에 대한 시시비비 따지지 말고 자비로 해결하라는 마음, 절에 사는 내가 가져야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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