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 모양일까를 거슬러 올라가면 너는 왜 그 모양이니?가 있다. 어릴 때 많이 들은 말이다. 그 모양이 어떤 모양인지, 어떤 모양이면 안 들을 수 있는 말인지 막연했다. 정작 그걸 가르쳐 주는 어른은 없었다. 할머니의 무조건 내 강아지 오냐오냐에서 벗어나 아빠 엄마가 있는 집으로 왔을 때 엄마는 나 말고도 돌봐야 할 아이가 둘이나 더 있었다.
할머니 집에서 엄마 집으로 공간 이동이 된 후 울타리에서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 가족이지만 그 안에 섞이는 것이 힘들었고 나는 이방인이었다. 할머니와 사는 시간은 나를 중심으로 모든 시간이 돌아갔다. 그 사이 나는 나밖에 모르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 없이 사는 일은 내가 누군가의 시간에 맞춰야 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적응은 힘들었고 겉돌던 내 행동은 '너는 왜 그 모양이니?'로 결론이 나고 있었다.
칭찬보다 질책의 소리를 많이 들었다. 내 행동의 방향이 옳고 그름 중 어느 방향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참인지 거짓인지 알기도 전에 '너는 왜 그 모양이니?'가 내 정신을 지배했다. 어렸어도 좋지 않은 소리는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받아 들였다.
어린 아이가 칭찬보다 더 많이 들어야 했던 소리. '너는 왜 그 모양이니?' 짐작건대 그러면서 무의적으로 칭찬을 받고 싶은 욕구가 생겼을 것이다.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착하면 되는 줄 알았고, 칭찬받을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착한 것인지 무슨 일을 하면 칭찬받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초등학생이던 어느 날, 시를 써서 우수상장을 받아 들고 집으로 갔다. 이건 분명히 칭찬받을 일이라는 것을 알았고 하교 시간만 기다렸다. 엄마가 퇴근하고 돌아오는 시간까지 기다리지 못한 아이는 상장을 들고 엄마가 일하는 곳으로 갔다. 시 써서 상을 받았다고 하면 분명히 칭찬을 들을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엄마는 아주 난처한 표정으로 빨리 집으로 가라며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순간의 민망함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나는 무엇을 해도 칭찬을 받을 수 없는 아이구나.'는 착할 필요 없는 사람으로 생각이 확장되었다. 그 사건은 나의 본격적인 반항과 방황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지독한 사춘기를 보내고 난 후에도 나는 나로 돌아오지 못했다. 오히려 더 지독한 20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20대는 '너는 왜 그 모양이니?'로 해결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혼자 있는 시간도 길어졌다. 말을 잃어갔고 표정도 잊어버리는 시간이었다. 눈물도 감정도 사라지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숨 쉬기가 힘들었고 사는 일이 고통이었다. 우울은 심해졌고 자존감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한창 사람들과 어울여야 하는 청춘은 염세주의에 빠져 허우적 댔다. 또래문화를 전혀 즐기지 못한 채 그 시간을 보냈다.
그나마 그 시간을 버칠 수 있게 한 것이 책이었고 음악이었다. 소설, 시, 철학, 심리서를 읽으며 '너는 왜 그 모양이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착한 아이는 아니어도 괜찮으니 우울에서 빠져나오려고 온갖 방법으로 바둥거렸다. 그 모든 시간에아무도 아프냐고 묻지 않았고 나는 아팠다.20대 마저도 결핍속에서 허우적대다 마침내 30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