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 생활중인 미지수 작가와의 대화
투룸매거진의 에디터 미지수 작가는 '비건' 하면 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입니다. 투룸매거진에서 비건 관련 콘텐츠를 제작하기 전부터 이미 <지속 가능한 삶, 비건 지향>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고, 인스타그램과 브런치를 통해 비건의 일상과 여행기를 공유하며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아왔죠.
지수 곁에서 일을 하다보니 궁금해지더군요. 자신만의 뚜렷한 철학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때로는 불편함을 감수해야할지라도 원칙을 지켜내는 소신의 원천은 무엇일까? 어쩌면 '비건'은 지수의 삶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에게 '비건'을 금지어로 내세운 대화신청을 한 건 그래서였습니다.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인물, 미지수와의 대화를 여러분들과 나눠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독일 베를린, 프랑크푸르트와 뉘른베르크, 프랑스 파리에 흩어져 사는 8명의 에디터와 디자이너로 구성된 투룸 팀이 한 달에 두 번 투룸매거진 제작 스토리와 시시콜콜한 라이프 스타일을 공유합니다. 무료 뉴스레터 <투룸라운지>에 실린 글입니다.
마침내 미지수를 만난 건 어느 여름밤이었다. 화면에 얼굴을 내민 그녀는 인도네시아 발리에 있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체크아웃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했다. 화면 뒤로 분주히 짐을 싸고 있는 파트너의 모습이 보였다.
"비건 되고 비건이라는 말을 한 번도 안 한 날이 없었어요." 몇 주전 대화신청을 받아들일 때 그녀는 엄청난 도전이 될 것 같다며 잔뜩 긴장했었지만, 오늘 인사와 함께 얼굴에 띄운 환한 미소에는 설렘이 가득 차있었다.
지수는 20대 중반에 한국을 떠났다고 했다.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을 통해 캐나다, 호주, 영국에서 생활했고 독일을 잠시 거쳐 작년 10월부터 동남아 노마드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을 떠난 이유를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간결하고 명쾌했다.
"한국은 저랑 안 맞았어요."
그녀가 그런 확신을 얻은 건 대학교에 진학하고 1학년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그래서 홀연히 자퇴했다.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답답한 것들 투성이었어요. 패션을 전공하고 있었고 열정이 넘쳤거든요. 그래서 이것저것 시도해보려 하는데 계속 돌아오는 답은 '넌 안돼', '넌 못해' 뿐이었어요. 하물며 컬러리스트 자격증을 따고 싶다고 교수님께 말했을 때조차 돌아온 답은 '1학년이라 안돼' 였어요. 일찍이 그런 것들을 고민하고 준비하는 청년에게 교수님은 왜 응원 한마디 해주지 못할까? 서운하고 답답했죠. 그러다 학교를 찾아온 졸업한 선배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문득 그런 의문이 들더군요. '그들의 삶이 진짜 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일까? 지금의 기다림은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일까?'
자퇴 뒤 사진관에서 일하며 돈을 모아 고등학생 시절 미드를 보며 열렬히 사모했던 뉴욕으로 떠났다. 뉴욕의 살인적인 물가와 생활비 때문에 5주 만에 버짓을 탕진하고 돌아와야 했지만. 그게 시작이었다. 지수는 그때부터 경력과 언어실력을 차곡차곡 쌓아 연달아 워킹홀리데이프로그램을 통해 해외에 나갔다. 캐나다 1년. 호주 1년. 그리고 영국 2년. 해외생활을 준비하는 동안 한국 리테일 매장에서 매니저로 일한 경험은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에서 빠르게 취업 매칭을 하고 현지에 적응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 토박이었던 지수가 '한국은 나랑 안 맞는다'라는 쿨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부터 품어온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덕택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여러 지역의 사람들과 펜팔을 주고받았고 고등학교 때는 해외 드라마에 푹 빠져서 다른 나라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익혔다. 지수가 간접 경험으로부터 얻은 건 해외에 대한 동경뿐만은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 어른들이 옳은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에 대해 물음표를 던질 수 있게 되었고, 세상에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정답은 하나뿐이 아니라는 자각을 얻었다.
"'미지수'라는 필명은 중학교 시절 어떤 펜팔 친구가 지어준 별명이에요."
미지수. 그만큼 그녀에게 완벽한 필명이 또 있을까.
"비건 말고. 미지수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나의 질문에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 이렇게 답했다.
"여행하는 사람. 여행의 경험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요."
그녀의 여행지도는 남들보다 컸다. 그러나 굳이 목적지와 행로를 정해놓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에게는 아주 정확한 나침반이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미지수는 미지에서 얻는 새로운 경험이 좋았다. 새로 만나는 사람이 좋았고, 새로운 일터가 좋았고, 캐나다, 호주, 영국의 각기 다른 영어 악센트를 비교하고 배우는 것도 좋았다. 하고 싶은 건 꼭 해내지만 하고 싶은 게 당장 안된다고 들끓지는 않는다고 했다. 인내할 수 있는 건 돌아가는 길 마저 새로운 경험으로 여기고 즐길 줄 알기 때문이리라.
"런던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할 때 근무지가 1존에 있었거든요. 저는 일부러 4존에 숙소를 잡았어요. 4존과 1존 사이를 오고 가는 지하철 티켓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저의 생활 반경이 더 넓어진다는 걸 뜻하니까요."
런던의 살인적인 생활비와 긴 출퇴근 시간을 이렇게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런던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미지수는 느릿느릿 육로를 택했다. 가는 길에 명상센터가 보이면 그곳에 들어가 며칠이고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녀는 행복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거주지도, 소유물도, 인생의 계획도 없이 방랑하면서도 누구보다 여유로웠다. 그들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계획이 없다는 건 그만큼 빈 공간을 많이 만들어 둔다는 거야. 빈 공간은 더 큰 기회와 상상도 못 했던 좋은 일로 채워지지."
그들의 말대로 지수는 계획 없이, 기대 없이, 목표 없이 여정을 이어 나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상상도 못 했던 좋은 일이 일어났다. 파트너를 만난 것이었다. 독일에서였다. 그와의 만남으로 그녀는 독일로 이주했고 지금의 동남아 장기여행을 함께하게 되었다.
학사와 석사, 취업과 결혼, 그리고 출산까지. 주류가 정답이라고 말하는 순서대로 성인의 삶을 밟아온 나에게 지수의 청년시절 선택과 행보는 충격적일 만큼 신선했다. 어쩜 저렇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녀에게 묻고 싶다가도, 내가 그렇게 자유롭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문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에 대해 사람들은 아낌없이 조언을 했다. 조언은 대부분 이렇게 시작했다. "너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뉴스 기사, 지인의 지인의 경험담, 책에서 읽은 이야기까지 총동원해 그들은 미지의 세계의 위험과 선택의 어리석음에 대해 경고했다.
미지수는 조언을 듣는 대신 경험을 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경험할 때까지 실컷 의심해 보기로 했다. 자퇴를 택했을 때 수많은 이들이 만류했지만 자퇴 덕에 택한 해외여행은 대학교가 제공하는 학습보다 훨씬 더 값지지 않았던가.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을 통해 호주에 갔을 때, 호주에서의 정착이 소문만큼 힘들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힘들면 주저 말고 돌아와라.' 부모님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 때에도 그녀는 더 의심하고 더 경험해 보기로 했다.
"힘들 때 돌아가버리면 저는 영원히 호주를 힘들었던 경험으로만 기억하게 되는 거잖아요. 평생 그런 식으로 호주를 바라보고 싶지 않았어요." 조금 더 버텨보았을 때 운 좋게 숙소를 구했고 직장을 잡았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해보지 않은 사람들의 말은 듣지 말자는, 경험할 때까지 실컷 의심해 보자는 그녀의 말이 오랫동안 나의 가슴을 공명한다.
돌고 돌아 우리는 여기에 함께 있다. 함께 속한 커뮤니티의 미래를 상상하고 글쓰기의 즐거움을 논하고 명상의 가치를 되새긴다. 투룸매거진 역시 많은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이다. 나침반은 있지만 뚜렷하게 정해진 경로는 없다. 나는 가끔 그게 두렵고 혼란스러웠다. 동료 미지수와 이야기하며 그런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런 도반과 함께라면 인터뷰하고 싶었던 이에게 거절을 당하거나 기대와 다른 결과물 앞에서 아쉬움을 마주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 어떻게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무엇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나름 행복하게 걷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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