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산 미디엄 로스트와 샌프란시스코 소셜 클럽
바람이 세차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일찍 깼다. 아침 9시, 아침도 먹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매주 장을 보는 슈퍼마켓 옆 카페로 향했다. 특별한 계획 없이, 바람에 멀리 실려가는 낙옆처럼.
나는 이 카페를 참 좋아한다. 좋아하는 만큼 가까운 만큼 자주 오지는 못하지만. 공원 앞이라 뷰가 좋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흔치 않게 오랫동안 혼자 앉아있어도 눈치 안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커피도 맛있지만 곁들여 파는 패스트리는 더 맛있다. 우리가 이 동네로 이사오기로 결정했던 그 여름, 혼자 만삭인 배를 품고 구석에 앉아 오랫동안 책을 읽었었다. 책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구절을 필사 했고 부른 배를 접시삼아 가루가 잔뜩 날리는 크로아상을 열심히 먹었다. 지금도 손꼽는 가장 완벽한 오후 중 하나다.
오늘 아침도 오트라떼에 크로아상을 먹으며 책을 읽을 생각이었다. 계획 없는 하루의 유일한 계획이었다. 주문을 하려고 줄을 서고 있는데 커피샵 입구 근처에 앉아있던 홈리스 할머니가 내 뒤에 줄을 섰다. 주변 사람들의 예의바른 긴장감이 느껴졌다. ‘화장실 문 코드를 물어볼 생각인가보군.' 나는 할머니와 조금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내 차례가 되어 주문을 하려고 하는 순간, 할머니가 코트 주머니에서 오렌지색 알약병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꾸깃꾸깃한 지폐가 나오는 것도. 할머니는 1달러 지폐 다섯 장을 꺼냈다. 나처럼 커피 한잔을 즐기러 온 이를 다른 시선으로 보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주문을 하면서 할머니에게 물었다. “뭐 드시겠어요? 제가 같이 계산할게요.“
“과테말라산 미더엄 로스트 푸어오버요. 그리고 블루베리 머핀도 추가할게요.”
어쩜, 취향도 세련되었네.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옆자리에 있던 어느 중년의 남성이 말을 걸었다.
“정말 친절하네요. 멋진 일을 하셨어요.”
이미 카페 주인의 감사의 미소에 잔뜩 멋쩍어 있던지라 칭찬이 부담스러웠다.
“아…. 아녜요. 생일이라서 작게나마 좋은 일을 하고 싶었어요.”
라고 불쑥 말해버렸는데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커피 한 잔 대접하는 그 작은 제스쳐를 아무 특별하지 않은 날에 했다면, 더 자주 했다면.
중년의 아저씨는 부드럽게 말했다. “오, 생일 축하해요.”
아저씨는 할머니가 이 곳의 단골이라고 설명해주셨다.
단골을 알아본다는 뜻은 아저씨 역시 단골이란 소리다. 아저씨와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커피샵을 떠나는 많은 손님들이 아저씨에게 인사를 했다. “씨유 어라운드.” 그는 가끔 바리스타들과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아저씨 덕분에 카페는 금새 온화하고 다정한 커뮤니티처럼 느껴졌다. 나도 왠지 이곳의 일원이 된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을 포토그래퍼 라고 소개했다. 정치 저널리즘 사진작가로 일해왔고, 지금은 대마초의 합법화 및 대중교육을 돕는 사회운동가로도 활동 중이란다. 샌프란시스코 소셜클럽이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대마초에 대해 평소에 많이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참 의견을 주고받았다. 중고등학교에서 성교육처럼 대마초교육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대마초의 부정적 인식은 대마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용하는 현상에서 비롯되는거라고, 캐너비스의 사회문제는 결국 정치 움직임에 뿌리를 둔다고. 사실 주제가 캐너비스든, 테니스든, 방탈출게임이든 나에겐 상관없었다. 무언가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 자신과 조금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그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보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대화 속에서 너그럽게 나눠주는 열정과, 반짝임과, 선한 마음이 참 고맙다.
“저도 저보다 더 큰 무엇에 대해 선한 마음을 품고 저의 열정과, 창의력과, 기술을 쏟아내는 사람이 되길 희망해요. 그렇게 사회에 기여하고 싶어요. 사회에 속한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요. 사회의 틀에 맞추기 위해, 따라가기 위해 열심히 뒤쫓는 삶 말고요. 그 ‘큰 무엇’을 찾으신 것 같아 부럽네요.“
아저씨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을 무렵, 나는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마치 마음 속 숨어있던 어떤 존재가 내가 조금 릴렉스 해진 틈을 타서 불쑥 고백을 뱉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것이 나의 ’생일계획없음‘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확신에 사로잡혔다.
생일만 되면 착찹한 마음에 사로잡히곤 했는데, 올해는 그 마음이 유난히 강렬했단 것 같다. 그래서 생일이 다가온다는 현실을 회피했던 것 같다. 아침 일찍 카페에 나온 것도 “생일 축하해! 생일 계획이 어떻게 돼?” 라고 입을 맞춘듯 물어오는 지인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 질문이 지극히 형식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랑과 우정의 표현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질문을 마치 인생 최대 난제인냥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생일날 계획없음의 상태를 스스로 이해하지 못해 감추고 싶어했다. 나는 자신의 욕망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던가? 나는 자기돌봄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던가?
삶은 이미 계획으로 가득차 있다. 실행에 옮기는 시간 만큼이나 계획을 세워야 하는 시간도 크다. 직장에서도, 일상사에서도 그렇지 않는가. 미팅을 위한 미팅, 프로젝트를 위한 프로젝트, 살림을 위한 살림. 잡일을 위한 잡일. 나는 계획을 세우는 일에, 계획으로 나의 삶의 틀을 세우는 일에, 그를 열심히 뒤쫓는 일에 지쳐있었다.
기존에 따르고 있던 일상의 계획들은 생일을 채우기에 너무 투박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무언가 새로운 걸 계획해 보기에 생일은 너무 짧고, 나는 너무 피곤했다. 어떤 계획들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았고, 어떤 계획들은 너무 남을 위한 것만 같았다. 너무.너무.너무. 그냥 나무가 될래.
가만보니 생일 계획의 딜레마는 특히나 요즘 계속 머리를 어지럽히는 고민을 많이 닮아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글을 나누고 싶은 이유. 누군가에게 글쓰는 즐거움을 가르치고 싶은 이유를 자꾸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글을 밖으로 꺼내는 일을 잊는다. 나의 글은, 나의 글쓰기를 위한 활동은 정말 다른 사람들을 돕고 있는 걸까? 정말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걸까? 정말 너와 나를 연결시켜주는 걸까? 이것을 우리가 함께 커뮤니티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굴러들어온 이 카페에서, 낯선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의 가면을 쓴 나의 인생은, 젠틀하게 나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계획의 틀을 벗어났을 때 너는 선의의 마음을 베풀 만한 아량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누군가의 열정을 즐겁게 들어주고 축하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그 마음을 양분삼아 나의 계획을 뿌리처럼 단단하게 뻗어나가 보라는걸 가르쳐주고 있었다.
아이를 픽업하기 위해 카페를 나서는 이른 오후, 바람은 여전히 세찼지만 따뜻한 햇살 덕에 춥지 않았다.